혼밥이 만연한 세상에서
무언가를 함께 먹는다는 건, 함께 하는 누군가와 몸과 마음을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같은 공기 안에서 같은 재료로 된 무엇을, 동일한 주제의 대화 위에서 몇 번이고 나눌 수 있다는 무언가 충만한 느낌.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때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먹어야만 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취식' 행위가
그래서 때론 소박하게, 때론 위대하게, 다르게는 절실하게도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한솥밥'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닐까. 생각이나 느낌을 나누고 싶지 않은 상대와 억지로 마주 앉아 무언가를 나누어 먹을 때, 양껏 먹지도 못했는데 한껏 체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도 그것 아닐까.
누군가의 '먹부림'이나 '삼시 세 끼'를 들여다보는 것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세상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맛있는 식당을 찾아 발길을 내는 것은 그래서 나에겐 굉장히 놀라우리만치 숭고한 일이다.
그때의 의미, 감정, 추억들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어이 데리고 가서라도 다시금 나누고 싶은 욕심. 살기 위해서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무언갈 나누기 위해서 먹는 것. 그런 소중한 순간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래서 너무나 매력적이다. 오죽하면 인간의 기본 욕구 세 가지 중에, 하루 세 번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식욕일까.
해서 아무리 바쁜 나날들에도 누군가와 점심을 먹으러 나갈 수 있는 시간은 특별하다.
"대충 아무거나 먹자"라고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말을 듣고 싶지도 않다. 적어도 얼마간은 진지하게 메뉴를 고민하고 싶다.
"먹고 때우자"는 말도 맘에 없다. 인생을 '그저 살아내거나 버텨내'고 싶진 않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이거 먹고 잠깐 버티라'라고 강요하기 싫다.
`혼밥`이 유행이라는 세상 속에서도 혀가 즐겁고 눈이 놀라는 맛을 그대와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생각이 자유로운 나에겐 결국 '혼밥'이라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럴 수도 있지', '혼자 밥 먹으면 뭐 죽어?'는 될 수 있어도, '혼밥이 좋아'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언제고 좋은 그대와, 같은 공기 안에서 가끔씩 무언갈 나누어 먹고 싶다. 그것이 나와 밥을 함께 먹는 그대에 대한, 나의 소박하고 때론 거창한 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