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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Jul 05. 2019

토이스토리 4-결핍을 채우는 위대한 여정

모자라도 괜찮아. 넘쳐서 사랑받는 게 아닌 거야.

[스포 있습니다] 이렇게 유쾌한 영화가 또 있을까. 정말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말 그대로 '깔깔', '하하'거리며, 신나게 웃고 나올 수 있었던 영화였다. 귀염둥이 보니가 어느덧 유치원에 가게 되면서 수업 시간에 직접 만든 새로운 포키Forky와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되고, 우디, 버즈를 포함한 보니의 모든 인형들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펼쳐지는 모험 속에서, 보니와 가족을 지켜내고,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되는데..... 여기까지 하고 끝내야겠지?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위대한 창의성에 감탄, 또 감탄.

이미 영화를 본 수많은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새롭게 등장한 포키의 가히 '오지고 지리는' 중독성 높은 캐릭터는 웃음 폭탄을 던지며, 영화를 보는 내내 입이 귀에 걸리게 만든다. 자학 개그, 엉뚱 발랄함으로 똘똘 뭉친 포키는 4편의 핵심이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주인인 보니뿐만 아니라, 모든 인형 친구들을 위험과 고난 속에서 구해내며 든든한 파수꾼 역할을 하는 우디와 버즈는 물론이거니와, 오랜 친구였던 보 핍(Bo Peep)이 '이제 더 이상 주인이 찾지 않는 인형'이 되고 난 이후, 인형들의 세상을 이끄는 리더십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를 던져 준다.

보 핍이 이끄는 카니발 속의 새로운 인형들은 어떤가. 모두가 사랑을 받고, 버림도 받고, 선택을 받고, 관심과 애정을 받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로 등장한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형 뽑기 가게 인형들과 듀크 카붐, 개비까지 하나 같이 그렇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개비를 위해,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을 기꺼이 희생하는 우디, 팔이 부러지지만 긍정과 희망의 상징이 되는 보 핍, 자꾸만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부르며 쓰레기통으로 숨어 들어가는 포키까지, 개개인의 능력과 힘은 부족하지만 그 장점을 합쳐 가족을 위험에서 구해내는 인형들. 어딘가 모자라고 결핍이 느껴지면서도 모두가 당당하고 그 나름대로 사랑스럽다.

수동이 아닌 능동의 사랑

인형은 원래 '선택'의 존재다. 선반 위에 먼지를 맞아가며 오랜 세월을 앉아 있는다 한들, '간택'되지 않는 인형은 인형이 아니다. 그저 복제 생산된 '제품'일뿐이다.


간택이 되고 나면 어떤가.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던 주인의 '흥미'가 식어버리는 순간, 또다시 상자나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는 '제품'이 되고 만다. 세상을 떠돌며 차바퀴에 짓밟히고 부서져 새로운 어떤 주인의 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다분히 수동형의 '선택 대상'일뿐이다.


하지만 <토이스토리 4> 속의 인형들은 모두 마치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캐릭터처럼 각자의 색깔과 생명을 갖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영화의 중심 줄기는 작은 물줄기에서 커다란 강과 바다로 이어진다. 게다가 너무나 담백하고 유쾌하게 그린 이 영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받으려고 네 스스로를 바꿔 가며
부단히 애쓰지 않아도 돼.
그저 너 자신을 믿어.

각자의 결핍을 채우며 새롭게 태어나는 캐릭터들

쓰레기에서 더미에서 만들어진 포키는 보니의 손에서 '의미'를 갖는 대상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제 아무리 자신을 '쓰레기'라고 부르며 쓰레기통 속으로 다시 몸을 던진다고 해도, 우디는 그 '의미 있는' 포키를 기어이 살려내고 만다.


보 핍은 어떤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다 이제 흥미가 사라진 채로 버려지지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면서 능동적인 캐릭터로 다시 태어난다. 개비는 자신을 결점 투성이라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지만, 우디의 도움과, 친구들의 응원을 통해서 다시 '사랑받기 충분한 존재'로, 오히려 '주인의 결핍'을 채워주는 '+', 플러스가 된다.


듀크 카붐은, 주인에게 버려진 트라우마로 평생을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지만, 자기 자신을 믿는 순간, 극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영웅으로 재탄생한다.


영화 속 토이들은 각자가 가진 작은 능력들을 최대치로 발휘해, 사랑, 희생, 존재의 의미를 보여준다. 심지어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본인들의 모난 구석과 결핍을 채워 나가며,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진 캐릭터들로 변신한다. 그걸 그려낸 과정이 얼마나 눈물 나게 웃기고,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큼 재치 있는지는 관람한 사람의 각자 감성에 맡기는 걸로 하고, 그렇게 웃음을 그리면서도, 모든 순간과 캐릭터에 생명을 담아, 토이스토리는 '위대한 주제'를 갖는 영화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모자라도 괜찮아. 넘쳐서 사랑받는 게 아닌 거야.

인간도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 않다. 우리 모두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건 '신'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각자의 모난 구석에만 집착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못났다고 탓하는가. 언젠가 자신을 '바보', '천치', '쓰레기'라고 불러본 적 있는가. 혹은 타인을 그렇게 여겨본 적 있는가.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애써 탈바꿈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부러지고, 찢기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불량이라서 작동하지 않는 인형들도 하지 않는다는 걸, '전체 관람가'인 이 영화가 쉽게 알려 주는데서,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매순간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서로가 부족한 걸 잘 알면서도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각자의 생긴 모습대로, 힘을 합쳐 주어진 고난을 헤쳐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사랑도, 애정도, 관심도, 우정도 지켜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로, 관객들을 '사랑의 비'로 흠뻑 적셔주는 게, 이 영화의 진짜 킬링 포인트이자 백미라고 본다.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각자의 모습 그대로.

어딘가 모자라도, 서툴러도, 출신이 다르고, 존재 의미가 달라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받을 수 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으며,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중요한 것, 바로 스스로를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그 그림자 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내가 힘들 때, 누군가 나를 안아줄 수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인생의 모습은 타인의 '선택'과 '평가'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못난 점만 들여다보며, 신세 한탄을 하기엔,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남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면, 자신을 '주인의식'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무수히 선택 받았다 버려지는 인형이라 여기는 것과 진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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