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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Aug 30. 2019

꾸준함의 미학

무엇에 꾸준함을 쓸 것인가

나는 호기심이 많다. 당연히 '진짜 이유'를 알고 싶은 게 너무도 많다. 이유를 알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할 때도 많다. 찾아보고 또 찾아보고 또 찾아보고. 일 얘기를 하자면 더욱 그렇다. 왜 상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그 이면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상대를 설득하려면 어떡해야 하는지가 너무도 궁금하다. 그게 내 '불완전한 완벽주의'와 합체해 버리면, 그땐 진짜 별다른 방도가 없다. 밤을 새워서라도 끝까지 판다. 정말 왜 그러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게 날 죽일 때도 있다. 물론 살릴 때도 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 내가 정말 알고 싶은 일에 대해선 남들보다 한발 더 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욕심도 많다. 그래서 마땅히 해보고 싶고 궁금한 일도 너무나 많다. 이게 내 호기심과 합체해 버리면, 그때도 진짜 별다른 방도가 없다. 해보고, 겪어보고, 실패해 봐야 직성이 풀린다. 지금 당장이라도 해보고 싶은 일들을 나열해 볼라치면, 그 리스트가 끝도 없다.


까미노 데 산띠아고 - 내년엔 해볼 수 있으려나..

키나발루 산 정상 밟아보기 - 무릎이 성할 때 할 수 있으려나...

스쿠버 다이빙 강사 자격증 따기 - 다이브 마스터 교육만 시작하다 만...

요가 강사 교육 듣기 - 일단 뱃가죽이나 허벅지에 붙여보고 말하자..

내 책을 출간해 보기 - 도대체 무슨 주제로,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 앞에서 순수한 내 이야기로 강연해 보기 - 일단 똥부터 싸고 유명해져야 하나.

조금이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캠페인의 리더가 되어 보기 - 다음 달에 시작하지만 리더는 아니다..

한 번이라도 내게 반드시 있다고 믿는 '식스팩' 만들어보기 - 13년째 생각 중인데 대체...

뭐라도 좋은 걸로 TV 출연 등등.... - 음...?


잘 안다. 너무 큰 꿈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당장 돈이라도 많아야 하고, 당장 시간을 내야 하며, 당장 뭐라도 해나가야 내가 가당치도 않게 '욕심'하는 저것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 이 사이클을 이제껏 기다려 온 건지, 이렇게나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내 삶에는 어떤 특이점이 오는 '변곡점'이 항상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아니, 이제 불혹-아아아아아아아아앙아아아악아아아아아가아아앙아악!!!!!!!!!!!!!!!!!!!!- 을 앞두고 생각해 보니 그런 시기가 진짜로 있었던 게 선명해졌다. 무슨 아홉수도 아닌게....


17세-19세

내 인생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시기. 그래, 굳이 이런 거까지 밝히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라고 묻는 독자도 있겠지만, JTBC '팩첵'을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눈 부분이기 때문에, 주저리주저리 '자랑해 본다.' (의도가 이게 아니라는 건 너그러이 알아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대부분' 전교 1등이었다. 정말로 '한두 번' 아니었던 때도 있었지만, 그냥 그랬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말썽 한번 안 부려 본 지극한 모범생이었다. 그래서 삶이 별로 재미는 없었다. 그냥 학교 갔다 와서 공부하고, 학교 가서 공부하고, 자기 전에 공부하고 그랬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중쉬어' 자세로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고 하면 말 다했다. 초등학교 중간, 기말고사 전에 '밤새' 본 적도 있다. 부모님이 시킨 적은 없다. 그냥 내가 그렇게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그때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였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중학교'가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지 모르고, 첫 시험을 앞두고 교복을 뒤집어 쓰고 책상에서 쉬는 시간에도 공부했다고 말하면 '얼마나 재수 없을지' 나도 잘 알지만, 그땐 그냥 그랬다. '올백'이 아니어서 울어본 적도 있다. 세상에.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 풀스탑.


안병영 님 감사합니다.


대단한 사교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전교 회장도 했다. 말썽 부린 적 없고, 친구한테 나쁜 짓 한적 별로 없고-있긴 있다-, 매번 반장, 부반장, 회장이든 뭐든 했고, 남들 수업 듣는 시간에, 학년을 가리지 않고 학교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심부름을 했으니, 아이들이 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진짜 공약대로 학교를 바꿨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모범, 귀감, 정의'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내가 전교회장인데 잘 살아야지'라는 생각밖에 없었고, 그래서 공부를 또 했다. 그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학생의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17세가 되면서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연합고사-세상에 웬 단어야-를 보고 합격했던, 전국 1등 비평준화 고등학교는 내가 알던 세상과 너무나 달랐다. 전국에서 모여든 아이들이 나를 단숨에 '압도하는' 그림은 내가 그렸던 그림이 아니었다. 올백 못 맞았다고 울던 내가, 반에서 1등이 아닌 적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반에서 17등을 했다. 반에서 17등. 그럼 전교에서 몇 등이야? 그리고 심지어 중간고사 평균 점수가 80점에 못 미쳤다. 한 과목 시험을 아무리 망쳐도 80점 아래 점수를 맞아본 적이 거의 없었었는데, 전체 평균이 80점이 안된다고?


그때 그랬다. 아, 여기는 내가 죽어라 노력한다고 1등이 될 수는 없는 곳이구나.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제까지랑은 다르게 살지 않으면, 난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없겠구나. 그래서 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뭐 '비행' 같은 걸 했다는 건 아니지만, 좀 '즐겨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매번 나오는 시험 점수와 등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지난 9년 동안 어떻게 노력하면서 살았는데 이래? 항상 남들이 못 풀던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주던 나는, 친구에게 '이 문제 어떻게 푸는 거냐'라고 물어봐야 하는 내가 되어 있었다. 1학년 때, 우리 반에 전국 모의고사 1등부터 6등까지가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몇 등이었냐고? 상위 1프로였는데도, 학교에서 200등을 못했다. '아, 내 생각이 맞네.' 좀 놀아야겠다.


그리고 그냥 적당히, 열심히 공부했다. 어떻게 미친 듯이 공부해도 나는 1등은 할 수 없었다. 내 앞뒤 자리에서 수업 시간 내내 자고 있는 아이들이, 모의고사만 보면 한두 개를 틀리고 전국 1,2등을 했다. 나는 한숨도 안 자고 공부하고 전교 200등을 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약간 내려놨다. 정신줄을 내려놓은 건지, 욕심을 내려놓은 건지는 모르겠다. 다행히도 적당히 공부하면서 친구들도 사귀고 '좀 놀았더니' 삶이 조금은 밝아지는 것 같았다. 동아리 활동을 하고, 여행을 다니고, 무대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재미있었다. 내 짧은 인생을 통틀어 그렇게 신나게 깔깔대고 웃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우리 학급을 더욱 좋은 학급으로 만들겠습니다'라고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 반과 여학생 반을 '짝반'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는 정말 나답잖은 공약으로 부반장도 했다. 나름의 '소심한' 일탈이었던 것 같다.


고3 시절. 공부가 너무 힘들었다. 애들이 '쟤 좀 미친 거 같다'라고 했다. 실없이 웃고, 수업시간에 잠도 잤다. 하필이면 고1, 2 때 그러지 않고 고3 때 그랬다. 남들은 1, 2학년 때 놀고 3학년 때 '바짝 정신 차린다'는 말을 쉽게도 했지만, 나는 반대였다. 그렇게 공부가 지루하더라. 그래서 수능 100일 전까지 아주 잘 놀았다. 그런데 정말 친한 친구가 '꿈'이 뭐냐고 묻더라. 그래서 'Y대 신문방송학과'에 가서, 방송국 PD가 될 거야'라고 했더니 '근데 너 왜 이렇게 정신 빠진 사람처럼 놀고 있냐고 애들이 수군대더라. 속상했어'라고 얘기하더라.


그래서 그때부터 공부했다. 놓았던 정신줄을 거의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부여잡고, 하루 종일 공부했다. 밀렸던 문제집들을 하루에 한 권씩 풀고, 책이 찢어지도록 읽고 외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답노트까지 만들어 봤다. 독서실에 앉아서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고 공부를 해본 적도 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문제집을 풀다가 새벽에 집에 간 적도 있었다. 그때 아마 인생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이 있었는데,


'와, 나한테 이렇게 초인적인 집중력이 있었어?'라는 것.

사실 그런 생각과 그때의 열정, 기분은, 내 인생을 통틀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미쳐서' 공부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게 내 인생의 아주 짧고도 유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었던 약 '100일간'의 꾸준함이었다. 그리고 나는 수시에 떨어지고, 정시로 논술고사를 보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신문방송학과가 아닌 서어서문학과에.

브런치 작가가 내 미래였는지, 어렸을때도 글쓰는건 좋아했고, 나름 잘했다.


27세-29세

27살, 학교를 다니면서 프리랜서로 방송 작가 일을 했던 건, 내 몸에 큰 무리를 주었다. 내 이전 글들을 다 읽어본 구독자라면 잘 알겠지만, 흉추가 부러진 일, 공황장애가 시작된 일, 이 모든 일은 27살에 일어났다. 21학점을 들으면서, 매일 오전 8시 생방송을 위해 방송국을 다니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과외도 했다.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장학금까지 받아야 했고, 대학원생도 아니면서 조교로도 일했기 때문에 성적도 좋아야 했다. 그것이 성적장학금이었든, 근로장학금이었든, 면학장학금이었든, 나에겐, 그걸 꼭 받아야만 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장학금 받는 애는 아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거의 2년을 하루에 2-3시간만 자고 일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그래서 식상함도 이런 식상함이 없지만 '철근도 씹어 먹을 나이', 스물일곱 살에 피로골절로 '흉추'가 부러졌다. 그 부서진 몸을 다시 세우느라 6개월을 누워있었고, 도저히 의학적으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미스터리'가 불러온 공포심 때문에, 연예인들이나 겪는다는, 이제야 모든 사람이 알게 된 공황장애를 그로부터 10년 겪었다. 공황장애는 지금도 있다. 수도꼭지를 잘 잠그고 있을 뿐이지, 언제든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며 관리하지 않으면, 고무패킹이 낡아버린 녹슨 수도관처럼, 공황이 '콸콸콸' 터져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내 삶의 동력은 '인정 욕구'였다. 얼마 전에 공공연히 인정한 거지만 나는 '관종'이다. 관심을 받으면서 사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1등을 하고 싶었던 것도, 절대로 발표가 좋은 척은 하지 않았지만 발표를 시켜주면 내심 속으로 기뻐했던 변태스런 마음도, 조별과제에서 조장이 되는 걸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내가 조장이 아니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의식 과잉'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언제나 1등이었고, 모든 걸 열심히 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누구에게나 응원을 받는, 그런 '좋은 사람'이길 원했다.


그래서 한 번도 변하지 않고 '꾸준함'이라는 가치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시험공부는 착실히 하는 사람. 장학금을 놓치지 않고 받으며, 교수님들께 사랑받는 사람. 프리랜서로 방송국에서 일까지 하면서도, 밥은 굶어도 수업은 안 빠지는 사람, 잠은 못 자도 친구들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공황장애가 와도-그때는 그게 공황인지도 몰랐지만-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억겁 같은 시간을 웃으며 버티어 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모두가 날 사랑해 주고 인정해 줄 것 같았다.


그게 내 삶의 존재 이유였고, 결국 그게 날 부러뜨렸다. 몸 한가운데가 살짝 부러진 게 아니라, 마음도 함께 부러졌다. 졸업이 너무 늦어져 어쩔 수 없이 방송은 그만두었지만, 나는 흉추가 부러진 이후로도, 학교 앞 고시원, 원룸에서 살면서, 1학년 때 2.7점이었던 학점을, 졸업 시 3.8로 끌어올리면서, 군 제대 후 5학기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군대가 날 '정신 차리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장학금이 없었으면 학교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스페인어도 잘 못하면서 스페인어 특기로 포스코에 입사하면서, 나는 또 한 번 '세상에 뭔가를 보여줬다'라고 오만하게 생각했다. 그 '버티고 버티고 버티는' 지독한 꾸준함이 날 철저히 죽였다는 걸 여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로.


37세-39세

서른여섯이 될 때까지 서너 번의 퇴사를 했다. 그러고 보면 회사를 다니는 게 내 꿈은 아니었는데, 방송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차선으로 선택한' 회사 생활-물론 내가 방송국 시험을 봤다고 해서 붙었을 가능성도 있을 리 만무하다-을 그럭저럭 잘했던 것 같다. 여러 번의 퇴사를 해 놓고 '뭘 잘했다'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그저 그때 그 당시에 필요한 결정을 남들보다 조금 빨리 내렸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그 순간의 선택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20대 때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진짜로 머리가 커질 대로 커져서-물리적으로도 크고, 정신적으로도 크다-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맘대로' 해야겠다는 '보상 심리'가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제야. 이제야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나 지금 너무 괴로워, 엄마.

포스코를 1년 다니고 그만뒀다. 펑펑 울면서 퇴사하겠노라고 했다. 그 좋은 선배들, 그 좋은 동기들 다 놔두고 거의 '1빠'로 회사를 그만뒀다. 나한테 맞는 회사가 아니었다. 8년이 지난 지금 '너한테 맞는 회사가 어딨냐'는 얘기도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냥 그 회사는 그랬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회사'였지만, 나에게는 '위험한' 회사였다.


한 달을 쉬고 바로 한국쓰리엠에 입사했다. 이전 회사랑은 다른 것 같아서, 다시 퇴사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했다. 내가 원했던 직군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주어진 일을 남들보다 '미친 듯이' 했다. 전사 영업사원 상도 1,2,3등 돌아가면서 많이도 받았다. 남들 안 하는 거, 남들 싫어하는 거 그냥 맡기면 죽은 듯이, 미친 듯이 했다. 글로벌 상도 받았다. 포상으로 미국 본사도 다녀왔다. 승진하고 꾸준히 위로 올라가는 '정상적인' 건 별로 못해봤지만, 5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을 보고, 겪고, 느꼈다. 올해 들어서 처음 전해 들은 얘기지만 그때 회사에서 사람들이 나를 '또라이'라고 불렀단다. 전혀 몰랐다. 근데 뭐 아무렴 어때. 우리 모두는 또 다른 모두에게 언젠가는 '또라이'다.


조기 승진으로 잘 다니던 회사를 5년 차에 그만두었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던가. '내부 고발자'처럼. 내가 열심히 일해 승진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상사 두 명을 그만두게 하고 나도 따라 그만두었다. 회사에서 모든 걸 다 바쳤던 5년이 허무했다.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뭐 잘났다고 자기가.. 취업도 제대로 못할걸'이란 소리도 들었다. '혼자만 깨끗한 척하냐'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렴 어때. 그냥 그러고 말았다. 어차피 스쳐지나갈 것을.


그리고 헤드헌터를 통해 스타트업에 입사했다. 소비자의 마음을 읽고 싶었고, 이전 회사들과 다른 색다른 조직 문화가 나에게 '숨통'을 틔워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아주 좋은 사람들, 아주 좋은 팀원들을 만났다. 역시나 많은 걸 배웠다. 고객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생각해 보는 기회보다 소중한 건 없었다. B2B, B2C를 촘촘히 들여다볼 수 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었다. 리더의 입장에서 한 팀을 이끌면서 무엇보다 소중한 교훈들을 얻었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보여준 고집과 꾸준함이 또다시 내 발목을 잡았다. 린Lean한 조직, 수평적인 문화, 복지가 수준급이다 뭐다 어쩌고 저쩌고랑 상관없게, 그냥 C-LEVEL과 가고자 하는 길이 전혀 안 맞으면, '더욱더 빠르게' 회사와 마음이 멀어질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빠르게 성장하는 넷플릭스, 아마존이 구성원들에게 '성장의 베네핏'을 주면서도 '구성원 이탈의 악명'이 높다는 것은, 이제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때였다. 말레이시아 법인장의 기회를 제안받은 것이. 그래서 나는 지금 말레이시아에 있다.





말레이시아가 대단한 기회의 땅은 아니다. 실제로 주변국들인 베트남, 태국, 미얀마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는 게 어떻냐는 조언도 들었다. 이전에 7-8프로를 넘나들던 경제성장률도 한풀 꺾였고, 새로 바뀐 정부가 '연말 정산'후 환급을 해줘야 하는 국고조차 모자라 세금 걷기에 급급하다는 얘기도 있다.


다만, 내가 지난 3년 동안 말레이시아에서 배운 대단하면서도 별거 아닌, 당연하면서도 모른 체했던 가치들이 있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르고 싶어 하는 것. 매일 생각하지만, 매일 지워버리고 싶은 것. 알면 알수록 더욱 무서운 것. 그래서 그걸 해낼 수 없을까 봐 덮어두고 미루는 것.


바로 꾸준함이다


말레이시아에서 나는 실패했다. 처절하게.


말레이시아가 어떤 나라인지 전혀 모르고 왔다. 일말의 사전 조사도 없이.

합작법인의 파트너가 누군지 잘 모르고도 열심히 협업했다.

한국 회사의 대표님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 번 의심이 됐지만 끝까지 믿었다.

좋은 사람들도 있는데 나쁜 사람도 있을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엄청나게 싸우고 힘들어하면서도 그 끝에 '빛'이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꾸준하게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고 착각했다.

그 꾸준함이 나를 살게 해주는 버팀목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틀렸다. 옳지 못한 꾸준함으로 버티고 버텼다.


이제 알겠다. 진짜 꾸준함이 뭔지. 사전적 정의로 꾸준함은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다는 것이지만, 나는 한결같이 부지런함과 끈기를 '잘못된 데에 썼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꾸준함은 있지 않느냐'라며 자위했다. 그게 언젠가는 이 꾸준함이 나에게 꿀 같은 보상을 보장해 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진짜 내가 '꾸준함'을 발휘해야 할 대상이 뭔지를 알고 덤벼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꿈에 그리던 방송을 한다. 내가 진짜 즐거워하는 일이 뭔지를 먼길을 돌아 돌아와 이제야 알겠고, 그래서 글을 꾸준히 썼고, 그래서 라디오 디제이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지식을 알려주는 일이 즐겁다. 도움이 되고, 편안함을 줄 수 있다는 게 기쁘다. 그래서 페이스북으로, 인스타그램으로, 카카오스토리로, 트위터로, 유튜브로, 내가 가진 지식을 전파한다. 왜 '인플루언스'가 중요한지 이제야 알겠다. 그리고 결국 현지 라디오 디제이가 되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설령 그들이 불특정 다수라고 할지라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욕심이 더 커졌다. 이왕이면 세상에 의미가 있는 좋은 일로 소식을 전하고 싶고, 기왕이면 길가에 쓰레기 하나라도 주워 오늘의 작은 꼭지를 변화시키고 싶어 졌다. TV에 출연하고 싶어 졌다.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남이 시키는 일, 지시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이 끌리는 일을 위해 밤을 새우고, 노력을 쏟아붓고 싶어졌다. 이걸 그만두고 싶지 않다. 뭔가를 계속해서 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40년이 채 안된 내 인생에서, 세 번의 변곡점을 거쳐 드디어 '결국 찾았다'라고 생각하는 기회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의 하루가 매일 새롭고 신기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로 그렇다. 새로운 걸 매일 배우고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고 믿는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무척이나 피곤하고 힘들 때도 많지만, 몇번의 끓어오름과 흘러 넘침으로 배운 내 인생의 '미래 가치'는, 결국 꾸준함이다. 남은 건, 그 꾸준함을 '옳은 대상'에 쓰는 일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멋모르고 공부했던 꾸준함이 나의 '즐거웠을 법도 한 학창 시절'을 잿빛으로 만들었다. 무조건 인정받으며 버터야 된다고 생각했던 꾸준함이 흉추골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내 20대를 죽여버렸다. 나를 믿어주는-그랬다고 믿는-사람이 맡긴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멍청하게 버틴 꾸준함이 내 30대 외국 생활을 짓밟아버렸다.


그래서 지금 내게 필요한 '꾸준함', '누구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쉽게 하지 못하는 꾸준함'을 어디다 써야 할지를 재정의하는 데에 2019년의 절반을 모두 써버렸다. 운동을 하고,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일을 하면서, 내 꾸준함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시험하고 검증해봤다. 이 꾸준함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면, 한국에 다시 돌아가겠다는 비장한 '출사표'를 던지고 다시 말레이시아에 돌아왔다. 가족들 앞에서 울며 불며 내 엇나간 인생을 읊조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글을 꾸준히 썼다. 브런치에.

유튜브를 했다. (이건 꾸준히 했다고 말 못 하겠다. 험난한 유튜브의 길..)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꾸준히 공부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브랜딩'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공개하고, 공유했다.

즐겁다고 생각하는 일의 연결고리를 잇고 중개했다.

실행하고 싶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되새겼다.

할 수 있는 걸 곧바로 실행하는데 몰두했다.

그걸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고 또 연결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안정적이고 꾸준하다는' 신뢰감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완전히 새로운 일들을 하고 있다. 전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정을 쏟아부었더니, 하나둘씩 실현이 된다. 안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 '안되는 일'에 꾸준함을 쏟진 않는다. 나는 또 넘어지고 깨질 테다. 40년을 그래 왔고, 앞으로 40년도, 혹시 모를 또 그 다음의 40년에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제 뼈에 사무치도록 알게 된 '꾸준함의 중요성'만큼은 버리지 않을 '독한 마음'도 생겼다.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 빨래 하나라도 개고, 먼지 하나라도 털어내자는 삶의 의지가 생겼다. 놀라운 점은 그렇게 작은 것들이라도 실행하면서 꾸준히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달성해 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놀라운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손이 떨리는 두려움도, 다리가 저린 공포감도, 지독한 꾸준함 앞에는 장사가 없다.




그저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알고서도 못하는 사람, 알기 때문에 시도하는 사람. 우리는 모두 전자다. 전자였거나, 전자이고, 전자로 남을 것이다. 마음 속으로는 모두가 후자가 되고 싶어 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은 날들도 있다는 건, 우리 모두가 하나같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틀째, 삼일째, 시작도 못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다른 방식으로 외면하는 게 더 마음 편한 선택이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것, 보고서를 쓰는 것, 이를 잘 관리하기 위해 치과에 가는 것, 건강검진을 받는 것, 대청소를 하는 것, 논문을 쓰는 것, 마감을 하는 것 등, 모두 애써 외면하면 잠시마나 마음이 편해지는 어떤 것들이다.




정말 의미 없이 바쁜 나날들. 그날들이 결국 내게 남기는 건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다치고 깨지지 않은, 당장이라도 연기처럼 흩어지고말 헛된 공상'뿐이다. 그 말랑말랑한 둥지 안에는 바늘 하나만 비집고 들어와도 놀라 자빠지고 말, 나약한 내가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까미노 데 산띠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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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강사 교육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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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앞에서 순수한 내 이야기로 강연해 보기

조금이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캠페인의 리더가 되어 보기

한 번이라도 내게 반드시 있다고 믿는 '식스팩' 만들어보기

뭐라도 좋은 걸로 TV 출연하기


이 모든 꿈들을 실천하기 위해, 나는 오늘 양말 한 켤레라도 반듯하게 갤 것이다. 창틀의 먼지부터 없앨 것이다. 수영장에 내려가 두 발이라도 담글 것이다. 30분이지만 요가 연습이라도 할 것이다. 10분이더라도 책을 읽을 것이다.


그걸 또 내일 하고, 모레 하고, 글피에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올바른 꾸준함'으로, 꿈을 이룰 것이다.  


그냥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오조오억배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3분 동안 치실로 이 사이를 쑤시더라도.  


* 글을 너무나 길게 쓰는 나의 꾸준함도 정말 못말리는 꾸준함 중에 하나다. 고칠 수 없을 것만 같다.  


[팟빵] 그곳은 어때 말레이시아
http://m.podbbang.com/ch/1772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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