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가 또 브런치했다.
브런치 작가로 말레이시아 글을 쓰다가, EBS라디오 프로그램 [그곳은 어때 말레이시아] 라디오를 진행하게 되고, 그 기회로 현지 DJ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이제 EBS 세계테마기행의 큐레이터가 되었어요. 브런치로 시작한 말레이시아 이야기가 이제 꿈처럼 TV에 살아나게 된 거예요. 브런치가 브런치했죠.
일이 많아서 무척이나 정신 없던 어느 날 전화를 한통 받게 된 거죠. EBS세계테마기행 팀의 전화였죠. 말레이시아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은데 혹시 함께 할 수 있냐는 믿을 수도 없는 제안을 받았어요.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죠. 내가? 어떻게? 내가 뭘 할 수 있지? 내가 자격이 되는 사람인가? 내 능력이 충분한가? 과연 내가 TV에 출연한다고 하면 시청자들이 어떻게 봐줄 수 있을까? 욕만 먹는 것 아닐까? 좌절의 연속 아닐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 내기에 충분한 사람인가?
고민하는 저에게 친구 A가 이렇게 말했어요.
"그걸 네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니? 평생 그게 꿈인 사람도 있을 거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도 많을 텐데 제안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너무나 감사한 일 아니니? 고민하지 말고 도전해 봐."
동생 B가 이렇게 말했어요.
"뭘 고민해요? 오빠가 그걸 하지 않으면 오빠는 아마도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요. 오빠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세테기를 보면서 '아 저 정도였다면 내가 할 수 있었을 텐데', '아 저런 좋은 곳에 내가 갈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C가 이렇게 말해주었어요.
"형, 그냥 질러요. 형은 지금 형의 수준과 자격을 고민하면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거 고민할 시간에 형보다 훨씬 못한 사람이 그 기회는 채갑니다. 다들 하고 싶어서 안달 날 일이잖아요? 인생 뭐 있나요. 그냥 하세요."
D가 이렇게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 누구보다 주혁 씨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어요. 심지어 저도 하고 싶은 일이지만 못한답니다. 그저 건강히 즐겁게 즐기면서 촬영하고 와요. 이 기회는 그냥 주혁 씨 거라고 믿고요."
이런 분에 넘치는 이야기들을 듣고도 고민에 고민을 했어요. 과연 내가 '충분한' 사람인가. 괴로웠어요. 자기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고, 끝없는 자기 검열과 후회들이 뒤따랐거든요.
'왜 나는 지금껏 이런 능력조차 갖추지 못했을까.'
'왜 이런 좋은 기회를 앞두고 나를 의심해야 하는 능력을 갖고 있을까.'
그러다 생각했죠.
'끝까지 가보자. 아무리 지쳐도 최선을 다해보자.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이 와도 웃자. 최고의 제작진을 만났다면 내 맡은 바 주어진 일만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버텨보자.'
그래서 시작했어요. 21일간의 '말레이반도' 기행.
저를 끝없이 의심했어요. 좌절도 했고요. 낙담했어요. NG를 낼 때마다 마음이 천근만근 무너지더군요. 큐레이터가 힘들다고들 말하지만 절대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아는 말들을 뱉을 줄 알고, 지금 기분이 어떤지만 말하면 되는 거였거든요. 같은 길을 세 번 네 번 걷고, 같은 음식을 한 그릇, 두 그릇 먹는 건 어려운 일이었어요. 다만 그건 다 제 탓이었어요. 제 앞에는, 카메라 너머에는 저보다 더 굵은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저를 멋지고 예쁘게 담아주시려는 PD님, 카메라 감독님, 코디네이터들, 현지인 친구들이 있었어요.
넘어지고, 다치고, 미끄러지고, 벌레에 물렸어요. 그게 저뿐이었을까요. 제작진의 고생은 말도 못 했어요. 그 힘든 와중에 출연자인 제가 아플까, 다칠까, 몸살이라도 날까, 약 챙겨 주시고, 손 잡아 주시고, 배려해 주시고, 이동 중에 잘 수 있게, 쉴 수 있게 해 주셨어요.
목소리가 아예 가 버려서 목이 쉰 채로 녹화를 한 날도 있었어요. 그래도 명색이 DJ인데 말이죠. 입술이 터져서 화면에 못난 얼굴이 더 못나게 나가기도 할 거예요. 벌레에 물리고, 피를 흘리고, 넘어지고 다치고 깨졌어요. 팔다리가 전부 상처 투성이네요.
저는 마지막 촬영지인 끄라비에서 6일간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을 갖기로 했어요. 끝없이 밀려있던 잠도 자고, 퀴퀴한 냄새로 버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옷들을 빨고, 책을 읽고, 바다를 거닐면서요. 물론 21일 간 촬영만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못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해요. 정말 식상하지만 '영광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욱신 거리는 몸뚱이를 어루만지며, 촬영이 끝난 하루 뒤, 비 오는 끄라비에서 이렇게 브런치에 인사를 드려요.
제가 출연한 세계테마기행은 11월 11일부터 15일까지 5부작으로 방송될 거예요. 못나고, 깨어지고, 넘어지고, 고군분투하는 이 못난 '타인의 청춘'이 어떤 그림 속에 다시 태어날지 꼭 지켜봐 주세요. 욕도 해주시고 칭찬도 해주세요. 이미 얼마나 못했는지 잘 알고, 얼마나 부족해 보일까도 잘 알고, 대신 얼마나 즐거웠는지도 마음에 담았거든요. 응원도 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세요. 브런치도 좋고, 유튜브도 좋고,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도 좋아요. EBS세계테마기행 게시판도 물론 좋고요. 부족한 점, 아쉬운 점, 좋았던 점, 모두 담아주세요. 여러분의 관심과 댓글, 사랑과 질책으로, 저는 또 성장해 나갈 겁니다.
그거 아세요? 저는 이렇게 마음 놓고 쉬지만, 제작팀의 노고는 이제 또 시작이라는 걸요. 3주간에 걸쳐 편집을 해야 하는 분도 계세요. 아마도 매일 밤을 꼬박꼬박 넘겨내시겠죠? 3일 뒤에 다른 촬영으로 떠나시는 분도 계세요. 충분히 쉬실 틈도 없이 20시간이 넘게 걸리는 혹독한 나라로 떠나신대요. 자동차로 꼬박 1박 2일이 걸려서 말레이시아에 돌아가신 분도 있어요. 제가 촬영 기간 내내 매일 밤 쓰러져 잘 때마다 혹시 잠에서 깰까 봐 손전등을 켜 두고 일을 하셨던 분이에요.
그렇게 한없이 좋은 사람들과 단 한 번도 마찰 없이, 말레이반도 여행기를 담았어요. 이런 스물 하고도 하루, 분명 부족한 저에게 천운이었겠죠? 브런치가 또 한 번 브런치 해냈습니다.
궁금하시죠? 저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랍니다. 그래서 곧 시작합니다. 21일간의 세계테마기행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