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인의 청춘 Oct 21. 2019

EBS세계테마기행 촬영에 임하는 자세

'말레이반도' 세테기 촬영 준비, 내게 무엇이 필요했나

EBS 세계테마기행 제작팀의 연락을 처음 받고 그 뒤 몇 번의 인터뷰를 거치면서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촬영이 끝난 지금에 와서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참 많은 질문을 받은 것 같다. 하기사 나는 말레이시아에, 제작팀은 한국에 있으니 대면 인터뷰로 평가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전화나 화상 통화로 할 수밖에 없었으니, 화면 너머의 나에게 더욱 궁금한 점이 많았을 터였다. 생각나는 질문 열다섯 개만 꼽아 보라면 아래와 같다.


"말레이시아에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3년 조금 넘었습니다.

"지금 말레이시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시는 거죠?"

우리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돕습니다. 작가 겸, 라디오 진행자입니다.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는 어떤 거죠?"

영어는 자유자재로 하고, 말레이어를 조금 할 수 있습니다. 생활하는데 문제없을 정도입니다. 중국어는 조금 알아듣습니다. 한국어 네이티브입니다.

"지금까지 여행을 얼마나 해 보셨어요?"

안 세어봤는데... (세어보니 27개국이었다)

"시력은 얼마나 좋으시죠? 수영은 잘하시나요?"

2.0입니다. 너무 좋은가요? 몽골편에 가야 했었는데.. 수영은 잘은 아니지만 공포감은 없는 정도입니다.

"옷은 평소에 어떻게 입으시죠?"

일 때문에 비즈니스 캐주얼을 많이 입지만 간편한 복장도 자주 입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어떻게 친해지시나요?"

저는 가벼운 농담을 잘하고, 잘 웃고, 공감대 형성을 노력하는 편입니다.

"약간 험한 일도 해낼 수 있는 마인드를 갖고 계신가요?"

음...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일을 하는 건 좋아하고, 도전하는 것을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세요?"

문제는 언제나 생길 수 있는 거라 생각하고, 어떻게 푸느냐가 중요한데, 잘 중재하는 편이고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나서 잊어버리는 편입니다.  

"스트레스를 푸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으신가요?"

요가, 스쿠버다이빙, 독서, 달리기를 합니다. 잠도 자고요

"못 드시는 음식이 있으신가요?"

음.. 다 잘 먹는 편인데, 생선류를 잘 먹진 못하고, 혐오스러운 식품은 못 먹습니다. 혹시 바퀴벌레나 쥐를 먹으라고 하시면 그건 거부하겠습니다.  

"두리안 혹시 드시나요?"

제가 두리안을 생과로는 딱 두 번 먹어봤는데, 제 취향은 아니지만 먹어야 한다면 먹어야겠죠? 두리안 아이스크림이나 첸돌, 두리안 슈크림 퍼프 같은 건 먹어봤는데 괜찮았습니다. 두리안은 세 번만 참고 먹어보면 그 참맛을 알게 된다고 하는데, 이번에 기회가 되면 먹어보죠 뭐.

"지금까지 제일 힘들거나 기억에 남는 여행이 어떤 거였나요?"

아이슬란드 링로드 트립 3천 킬로미터 여행, 호주 울룰루 2박 3일 비박 트레킹 같은 것들?

"혹시 여행을 아직 안 가본 곳 중에 가보고 싶은 곳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꼭 가보고 싶습니다. 무릎이 성할 때 가야 할 것 같아요.

"말레이시아의 가장 자신 있는 여행지를 시청자에게 소개한다는 느낌으로 3분 영상을 만들어 주세요"

나의 사랑, 랑카위를 소개했다.

"영어, 말레이어 자기소개 영상을 찍어 보내주세요"

영어로 4분 말레이어로 1분 정도의 영상을 만들어 보내드렸다.


이렇게까지가 끝이었느냐,라고 말한다면 조금 싱거울 수도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EBS세계테마기행은 EBS의 12년 장수 프로그램이자, 수많은 애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그간 많은 출연자들이 세테기를 지나갔고, 그 가운데는 교수, 작가, 화가, 사진작가, 연예인, 탐험가, 오지 여행가 등 쟁쟁한 출연자들이 많았다. 그런 반짝이는 사람들 사이에 끼기에 왠지 나는 작고, 초라해 보였다. EBS 라디오 프로그램 [그곳은 어때 말레이시아]를 지금까지 4개월 동안 진행했고, 말레이시아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금일 기준 조회수 47만 회), 현지 라디오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것. 그것들 외에 나라는 사람은 그동안 출연진에 비해 첫째, 화제성도 낮고, 둘째, 방송인이나 연예인도 아니고 셋째, 누굴 가르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며, 넷째, TV에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인가, 마지막으로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마흔인데도 그간 출연진에 비해 나이가 어린 편이고 해당 분야의 권위가 떨어지니-내가 무슨 교수나 학자가 아니니- '내가 하는 말을 믿어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까지 있었다.


그래서 그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뿐, 그리고 제작진을 믿고 함께 하는 수밖에. 그렇게 준비한 열한 가지가 있었다. 주어진 단 20일 동안.


0. 밑도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오는 체력

매일 운동을 하려고 시간표를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이 매우 고됐다는 글을-이전 세테기 큐레이터들의 증언-온라인상에서도 많이 읽었고, 몇 편 모니터링을 했더니 1편에서 끝 편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총기가 사라지고 매우 검게 그을리며, 점점 활기가 떨어져 보이는 모습이 보이더랬다. 그래서 매일 요가 30분, 팔 굽혀 펴기 100개, 윗몸일으키기 100개, 스쾃 100개를 했다. 정말 요상하게도 세테기 촬영이 결정된 20일 동안 나는 정말 미친듯이 바빴다. 하루에 미팅을 3개씩 하고, 해외 출장을 두 번이나 다녀오고, 밤새 프로젝트를 준비하기도 했다. 심지어 20일 중 8일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 가운데 매일 심쿵심쿵심쿵하는 마음으로 운동을 하려니 매일매일 꼬박꼬박 하기가 쉽지가 않더라. 체력이 없으면 절대 소화해 낼 수 없다는 세테기 큐레이터 선배이자 친구 지은이(기차타고 구석 구석, 우리가 몰랐던 일본 편)의 조언도 있었다.


"혁아, 다른 건 몰라도 홍삼이랑 프로폴리스는 무조건 챙겨. 꼭 챙겨. 많이 챙겨."


목도 쉬고, 입술이 터지고 감기약도 열 번 넘게 먹었다. 촬영하다가 약국을 몇 번 들렀는지 모르겠다. 다음날 체력을 위해 매일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먹고 잤다. 물론 지은이가 알려줬기 때문에 알차게 챙겨갔던 홍삼과 프로폴리스, 심지어 말레이시아의 인삼이라고 부르는 통깟 알리 알약은 촬영 기간인 21일이 다 지나기 전에 전부 떨어져 버렸다.


1. 해박한 지식

말레이시아를 찍는 것까진 좋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지내는 3년간 나름 부지런하게 여기저기 다닌 덕이었을까, 대부분의 주요 관광지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설명해 줄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까. 가이드 일을 하시는 아는 형님도 계셔서 그분께 듣고 새롭게 이해한 내용들도 많았다. 먹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고, 친구들과 만나면 항상 맛집을 찾아가기 때문에 음식 설명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단, 이번 에피소드는 '말레이시아'가 아니라, '말레이 반도'가 주제였다는 게 관건이었다. 게다가 말레이시아는 그동안 7번이나 방송된 터라, 매번 가는 곳을 또 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제작진이 택한 곳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찍어 본 적 없는 말레이시아'였다. 그중에서도 세테기에서 한 번도 다룬 적 없는 곳들을 중심으로 이동하며 촬영하기, 오지 찾아가기 등. 거기에 말레이 반도의 특색을 담기 위해, 태국 남부를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나꼰 시 탐마랏, 뜨랑, 그리고 끄라비. 문제는 총 촬영 장소 중 내가 가본 곳이 딱 세 곳뿐이었다는 것. 별수 있나. 공부하는 수밖에.

2. 언어 구사력  

말레이시아는 어디를 가나 영어를 쓸 수 있다. 단, 내가 '오지'에 가지만 않는다면. 약간 외진 곳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구수한 말레이 사투리와 함께, 영어가 통하지 않는 말레이시아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도 문제는 내가 가는 모든 곳들이 '오지고 지리는' 오지였다는 것. 말레이어가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촬영이었다. 물론 그랩 택시 기사와 차 타고 가는 내내 말레이어로 농담하고 웃으며 대화하거나 식사 주문을 하는 등의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전혀 없지만, 오지 말레이어, 사투리를 내가 무슨 수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물론 방송에는 현지 코디네이터가 있다. 번역이나 통역을 도와주는 사람들. 다만, 아무리 신나는 일도 당사자가 서로 직접 대화하지 않으면 신이 나지 않는다. 반응도 느리다. 적어도 방송인데 서로 무슨 말 하는지 못 알아들으면서 멀뚱멀뚱 바라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어 공부를 했다. 사전을 외우고 동영상 강의를 들었다. 매일 2시간씩 새벽에 공부를 했던 것 같다. 태국어는 거의 문외한 수준이지만 간단한 단어들을 익혔다. 이렇게 20일 동안 공부한다면 정말 뭐라도 할 수 있을까. 걱정은 끊이지 않았지만 부딪혀 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에피소드 5개 안에서, 말레이어, 중국어, 태국어, 영어, 한국어를 모두 쓰는 방송이 방영될 예정이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5개 국어를 다 쓴 방송은 이번 에피소드가 처음 아닐까 싶다. 촬영 15일 차쯤 되니까, 이 모든 언어가 다 섞여서 나오는 기이한 일도 벌어지더라.

3. 적절한 복장

세테기는 모든 연령대가 사랑하는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어르신들도 많이 시청하시는 프로그램이자, '교육방송'인 EBS의 간판 프로그램. 여행자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하고, 여행자에게 적합한 TPO에 맞는 가방과 신발도 준비해야 했다. PPL도 아닌데 브랜드가 노출되면 좋지 않기 때문에 브랜드 로고가 없는 옷을 골라 구입하고, 로고가 가장 안 보이는 신발도 따로 준비했다. 실제 촬영할 때 모든 로고에 검은 테이프를 붙이고 촬영했다. 민소매나 너무 짧은 바지 금지. 너무 허름해 보이는 옷도 금지. 낡은 패션도 금지. 웬만하면 옷깃이 있는 옷, 긴바지를 입을 것. 모두 시청자를 위한 배려였다.


거기에 하나 추가된 것. 바로 안경. 나는 중학교 때 1개월 정도 '겉멋'으로 안경을 써본 이래로, 안경을 써본 적이 없다. 첫째, 눈이 나쁘지 않으며, 둘째, 극심한 짝눈 (왼쪽은 0.1 이하, 오른쪽은 2.0)으로 스물한 살 때 라섹 수술을 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 이후로 18년간 양 눈이 2.0이었다. 가끔 운전하거나 여행할 때 선글라스를 착용하긴 하지만 안경이 웬 말. 게다가 나는 머리가 크고, 눈 옆 부분 뼈가 크고 넓어서 안경을 쓰면 마치 얼굴에 '비키니'를 얹어 둔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인데, 큰일 났다. 진짜 못난 얼굴 더 못나 보일 텐데.


사실, 납득할 만한 이유는 이랬다.


"주혁 씨가 그동안 출연진들보다 나이가 실제로 어리기도 하고 조금 어려 보여서, 전문성과 중후함을 더하려면 안경을 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쌍꺼풀이 없는 눈매가 조금 매서워 보여서 보시는 분들이 편하시려면 렌즈가 없더라도 안경을 쓰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말레이시아 방사 빌리지에서 안경을 20개 정도 껴보았다. 웬걸. 어울리는 안경들은 모두 50-60만 원이 넘더라. 나중에 다시 와서 꼭 사겠노라 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5일 뒤 태국 출장길에서 곧 폐업한다는 안경 가게에 들어가 20개 정도를 써보고 하나를 골랐다. 그래서 착용했다. 렌즈 없는 안경. 촬영 중간중간에 렌즈가 있는지 없는지 손가락으로 내 눈을 찔러보는 현지인들 덕에 얼마나 웃었는지. '멋 부리는 오빠'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물론 평생 써보지 않았던 터라,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 '아, 내 안경 어디 갔지?' 했던 적도 있다. 이제는 많이 자연스럽고 편해진 것 같다. 심지어 PD님은 '잘 어울리는데 그냥 평소에도 앞으로 쭉 쓰고 다녀요'라고 하셨다. 그러고 있다.


4. 원만한 성격

세계테마기행은 원래 4편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가, 그 분량이 살짝 늘어나고, 또 한 번 늘어남을 거쳐 총 5회 에피소드로 탈바꿈했다. 내가 출연한 에피소드는 왠지 느낌 좋은 11월 11일, 1111 월요일부터 5일간 방송된다. 그래서일까. 촬영 기간까지 늘어났다. 무려 21일. 제작진이 사전에 성격을 물어본 이유는 분명했다. 문제가 생길 것이 뻔하고, 싸움도, 마찰도 생길 수 있는 지치고 힘든 촬영 기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는 터라, 이 문제를 큐레이터가 더 크게 만들어 버리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법도 할만하다.


게다가 현지 촬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현장 박치기'가 많다. 촬영을 하러 갔는데 예상치 못하게 상대가 촬영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고, 날씨 탓에 정해진 촬영을 하지 못할 때도 있고, 뭔가 스토리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맞닥뜨린 환경에서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촬영할 만한 소재 자체가 증발, 혹은 고갈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할 법하다 - 해보니 그렇다-. 게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도 왕왕 있기도 하고, 촬영 허가에 갑자기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안타깝지만 그 나라 사정이 그렇다 하는데 어쩔 것인가.


결국 출연자인 큐레이터와 제작팀의 합도 잘 맞아야 하고, 연출자와 카메라도 잘 맞아야 함은 물론이며, 현지 코디네이터와 제작팀 간의 신뢰도 매우 중요하다. 그 모든 협업이 오케스트라처럼 빵빵빵빵 터져줘도 좋은 방송이 나올까 말까 한데, 만약 그렇지 못하다? 그럼 이건 그냥 편집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전혀 그럴싸하지 않았던 것들. 편집은 전혀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 예민한 시청자는 그것을 느낄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천운인지 전생에 우주를 구했는지, 최고의 제작진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 논리 정연하고 한없이 사랑스러운 PD님-15일 차쯤 되니까 약간 안아주고 싶더라(?), 현장에선 깐깐하시지만 최고의 실력과 가르침으로 모든 걸 누그러뜨리는 귀요미 카메라 감독님, 수준 높은 현지 지식과 훌륭한 성품, 유머감각까지 넘치는 코디네이터 님을 만났다. 실제 방송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 내가 인터뷰했던 모든 이들, 나의 촬영에 함께 해준 현지인 친구들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참 귀한 존재들이었다. 지금 글을 쓰다가 떠올려도 눈물이 날법한 좋은 사람들.


그래서일까, 우리는 21일간, 단 한 번의 문제도 없이 그 지난하고 큰 임무를 함께 고생하고 같이 웃으며 완수해냈다.


5. 민첩성  

촬영 현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왕왕 일어난다. 뭐 굳이 예를 들자면 내 아이폰 X가 물에 빠진 일 같은 것.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현장에 가서 답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동 중에 잠을 하도 자서 인가 몸도 찌뿌둥하던 차에 물가에 다가가니 갑자기 신이 났다. 심지어 정말 그곳에는 '물 반, 고기반'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나 싶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았다. 잡아볼까? 하는 생각에 살짝 들어간다는 것이 이끼가 잔뜩 낀 돌을 밟고 넘어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버렸다. 난 그 순간의 PD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저..저...저...ㅅㄲ 저거... 떠내려간다..!!!' 걱정과 절망의 표정. 그 표정이 아직도 너무나 눈에 선하게 남아서 너무 고맙다. 진심이 담긴 놀람이었다.


물론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냥 깊지 않은 곳에서 '허둥지둥' 댄 것뿐이었어서. 그날 오전에 비가 많이 와서 바닥이 안 보이는 바람에 더 겁을 먹기 충분한 상황이었을 뿐. 괜찮았지만 아이폰 X는 지금도 반쯤 혼이 나가 있다. 그뿐인가. 오지와 정글, 동굴, 바다 등을 다니다 보니 각종 벌레, 야생 동물, 거머리, 모기와 21일 내내 씨름해야 했다. 미끄러진 적도 많고, 걷고 뛰다가 발목이 접질린 적도 네댓 번 있다 - 모두 걱정하실까 봐 말하지 않았지만 - 지금도 발목 양쪽이 욱신거린다. 오지 여행을 떠나는 큐레이터에게 민첩성은 필수!

6. 친화력 / 섭외력  

이번 촬영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느꼈던 것은 체력 다음으로 사실 '친화력, 섭외력'이었다. 방송 화면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물론 편집으로 많은 것들이 보완되겠지만- 내가 진짜 신나지 않으면 시청자도 신이 날 수 없다. 내가 가슴 뛰지 않는 여행에 누가 설렘을 얻을 수 있겠는가.


현지인들과의 어울림, 친화력, 섭외력도 매우 중요하다. 그냥 '막 가는' 거다. 지금 당장 카메라 화면에 내가 등장하지 않으면 그 화면은 쓸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다. 폭죽을 터뜨릴 예정인 사람에게 폭죽을 터뜨릴 순간 이전에 다가가 '지금 뭐하세요, 이건 왜 해요, 무슨 의미가 있어요, 몇 개 터뜨리실 거예요? 저도 구경해도 돼요? 저도 같이 해도 돼요?'라고 물어야지, 방금 폭죽을 터뜨린 사람에게 '아까 하신 일은 무엇이었나요?'라고 백날 물어봤자, 그 순간은 방송에 나갈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바로 '원 테이크'. 내가 진짜로 여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즐기는 것을 담아 내야 최고의 장면이 탄생할 수 있다. 그러려면 꼭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원테이크. 끊김 없이, 실수 없이, 어색함 없이, 쭉 가야 한다. 카메라 앵글, 카메라 워크, 설명, 대화, 웃음, 감동, 지식 전달까지 단 한 번에. 그게 정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촬영하면서 알았다. 이 모든 것들을 한 번에 해낼 수 있으려면 생글탱글한 친화력, 섭외력,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필수 조건이다.

7. 정신력

촬영은 정말이지 고된 작업이다. 나는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원고를 쓰고 녹음을 하고 편집을 하지만, TV는 그것과 결이 매우 다르다. '비주얼라이제이션'이라는 것처럼 무서운 단어는 없다. 궁금한 건 궁금한 표정으로, 무서운 건 무서운 표정으로, 맛있는 건 맛있는 표정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적당히 땀을 흘려야 마땅하고, 시원한 곳에 들어가면 아이처럼 어푸어푸 하면서 노는 게 당연하다.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면 그게 얼마나 꿀맛인지 표정으로 보여줘야 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역사가 더해지면, 왜 그 장소에 그런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첫 촬영에서 몇 번이나 NG를 냈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수도 없었다는 것뿐. 전혀 어떻게 촬영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카메라 동선도 꼬이고, 긴장하고, 머릿속 코멘트까지 잊어버리는 바람에 가장 쉬운 촬영, 심지어 잡지사에 기고까지 했던 '나시 르막'을 먹는 장면에 어마어마한 NG를 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지 음식이자, 가장 자주 먹었던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내가 이것밖에 못하는 사람이었던가.'


그래서 카메라가 몇 번을 돌아갈지, 어떻게 움직일지, 드론은 언제 날리게 될 건지, 어느 방향에서 걸어와서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가야 하는지, 누구랑 어떤 이야기를 해야 다음 이야기를 붙일 수 있는지, 모든 것을 고려하고 촬영에 임해야 한다. 촬영 초반에 이런 것들을 잘 이해하지 못해 제작진을 고생시킨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가가 생각하는 그림과 스토리는 내게 생소한 것이었을뿐더러, 어떤 때 치고 빠져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다면 끝없는 NG로 모두를 넉다운 시킬 일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탑재해야 하는 것은 정신력. 완벽하게 하지도 않는 5개 국어를 동시에 쓰면서, 입술이 부르트고, 체감온도가 45도쯤으로 느껴지는 오지에서 거머리, 모기에 뜯기면서 한 장면 한 장면 찍어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적도 있다. 약을 하루에 30알 이상 먹은 적도 있다. 그래서 에필로그 촬영이 끝날 때쯤 되면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적도 있다. '누구도 내게 말 걸지 말아 주세요'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다만, 그런 이기적인 생각이 먹히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나보다 훨씬 더 고생하고 있는 제작진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머리에 물리면 NG를 낼 수 있지만, 카메라 감독님은 더 멋진 장면을 잡아 내기 위해 움직일 수 없다. 나는 '기절각'으로 잠들 수 있지만 오늘 촬영분을 넘기고, 내일 촬영을 준비해야 하는 PD님은 그럴 수 없다. 나는 이동 중에 잘 수 있지만, 꼬박 수천 킬로를 이동한 현지 코디네이터 님은 이동 중에 혼자라도 깨어있어야 한다. 이것이 21일간의 촬영 중 내 정신력을 유지시켜준 유일한 이유였다. 우리는 한 팀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


8. 감수성

'와', '맛있다', '시원하다', '예쁘다'는 유치원생도 할 수 있는 말이다. 큐레이터는 화면 속에서, 화면 밖의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공감을 끌어내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맛있다'란 단어 하나로만은 설명할 수 없다. 우리 음식과 비교도 해야 하고, 식감이 어떤지, 첫맛과 끝 맛은 어떤지, 향은 어떤지, 얼마나 매운지, 얼마나 썼는지 모두 공감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 정말 맛있다면 손으로라도 음식을 집어먹는 장면이 나와줘야 하고, 정말 맵다면 물을 벌컥벌컥 먹는 장면이 나와야 한다. 뜨겁다면 '앗 뜨거워'라는 감탄사와 함께 얼마나 뜨거운지를 설명해야 하고, 시원하다면 이게 어느 정도로 시원한 느낌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감수성은 필수다. 모든 것들에 감각이 열려있어야만 한다. 느낀 것을 다르게 뱉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좋은 곳에 왔기에 얼마나 행복한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어떤 맛인지를 구체적으로 느끼고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촬영을 하던 중에 두세 번 정도 울컥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울컥함'은 모두 '진심'을 받았던 순간에서 나왔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다시 보고 싶은, 다시 먹고 싶은, 다시 안아주고 싶은 것들. 그것들을 '진심으로 느끼고 공감할 줄 알아야' 시청자도 함께 웃고 울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9. 용기와 도전 의식

나는 물을 무서워한다. 3년 전까지 특히 더 그랬다. 바닷가는 놀러 가 본적도 별로 없고, 수영장은 평생 통틀어 10번도 안 가봤나, 그랬다. 나는 수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2014년에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인생에 이렇게 좋은 것들을 '용기가 없어서' 모르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처음 다이빙 입수를 할 때, '혹시 다이빙을 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엄마 사랑해'라고 문자를 보냈던 5년 전이 생각난다. 레스큐 다이버 자격증 교육을 받고 나서는 가끔 수영장도 다녔다. 친한 형님들께 수영도 배웠다. 호흡법도 배웠다. 말레이시아에 와서는 집에 딸린 야외 수영장에 자주 갔다. 못해도 좋으니 친해지자, 정도의 생각이었다. 이제는 그런 내가 수영을 제법 한다. 물론 생존 수영 정도다. 물에서 죽지 않을 정도. 이제는 '사람이 물에 뜰 수 있다'는 말을 믿는다(?). 오지 촬영에는 생각보다 바다, 계곡, 정글 등 촬영이 많이 끼어있었다. 과연 깊은 곳에 가서도 수영을 할 수 있을까? 촬영 전의 큰 걱정 중 하나였다. 그런 내가 계곡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정글에서 카약도 혼자 타고, 바다에도 맨몸으로 들어가고, 촬영이 끝난 이틀 뒤인 오늘은 처음으로 바다 수영이란 걸 2시간 동안 했다.


그렇다. 용기가 있으면 시간은 걸릴지언정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혼자 익숙해지는데 3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이제 나는 바다 수영이 좋다. 당연히 콘도 수영장보다 훨씬 잘 뜨더라(??). 간혹 일부 큐레이터들이 겁이 많아서 정해진 씬을 소화해 내지 못하는, 예컨대 스카이다이빙이라든지, 계곡 수영이라든지, 다이빙이라든지, 클라이밍, 짚라인, 동물과 함께 해야 하는 장면이라든지 뭔가 모험을 요하는 것들을 소화해 내지 못해서 방송을 하지 못하는 경우-죽어도 못한다고 하는 것이라면-가 있다고도 들었는데,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는 큐레이터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미덕 중에 하나다. 그래서 거의 헌혈 수준으로 내 피를 앗아간 거머리 6마리도 잘 물리쳤다(?). 제일 싫어하는 바퀴벌레도 잡고.


10.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 미안해할 줄 아는 마음

21일의 촬영 기간은 너무나 길었다. 이동도 많고 매우 고생스러웠다. 덥고 습한 날씨도 장벽이었거니와, 새로 만난 사람들과 12시간 이후부터 TV 촬영이란 걸 해야 하는 상황은 어색하고 힘들었다. 3일째가 되던 날까지는 특히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서서히 편해졌다. 익숙한 것들이 생겼다. 미리 고민해 볼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딱 절반이 지나고 나서는 내일이면 뭘 하겠구나 라는 그림도 그려졌다.


며칠이 더 지나자, 이제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지?'라는 안타까움이 생겼다. 더 잘할 걸, 하는 아쉬움도 생겼다. 감사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와 함께 해준 사람들, 나를 지지해 준 사람들, 나를 배려해준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아련한 마음이 커져갔다.


촬영이라는 건,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더랬다. 함께한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비록 스쳐 지나간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일지라도, 똑같은 장면을 또 묻고 또 찍고 고생시켰던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어준 현지인일지라도, 나에게 환하게 웃어주며 함께 제기차기를 하고, 공놀이도 했던 수많은 아이들도, 내 화면 속의 엑스트라가 아니라, 그들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한없이 고맙다. 지금도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더 잘해줄걸, 더 예뻐해 줄걸, 더 사랑한다고 말해줄 걸, 더 맛있다고, 감사하다고 표현할 것을. 미련이 남는다. 더 미안하다고 할걸, 더 조심스럽게 해 볼걸, 더 예의 바르게 할 것을. 미안함도 남는다. 과연 이 고마움들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 나라는 낯선 사람에게 삶의 한 부분을 내어준, 인생의 한 공간을 비워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감사하고 또 죄송스럽다.



이 모든 것이 세테기를 준비한 나의 마음이다.


https://youtu.be/q-T_bwDNAv8

이주혁

EBS 라디오 프로그램 <오디오천국>의 '그곳은 어때 말레이시아' 진행자이자 카카오 브런치 작가로 말레이시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리테일 채널, 홈쇼핑 등 한국 기업의 말레이시아 진출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가, 스쿠버 다이빙, 글쓰기와 책 읽기를 즐기며 가슴 뛰는 디지털 노마드로 살고 있습니다.  


https://youtu.be/EX6xFe7o4TU



http://www.podbbang.com/ch/1772785


https://www.instagram.com/jleemalaysia_kr/



이전 20화 21일간의 세계테마기행 촬영을 마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