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측은해서요.
처음이다. 인종 차별이라니.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망자가 500명에 육박하고, 한국 확진자가 18명, 말레이시아 확진자가 10명인 가운데, 중국계 인구가 전체 인구의 25~30%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내가 인종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니.
말레이시아는 중국인들이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는 국가 중 하나다. 기본적으로 중국계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응당 중국어 소통, 중국 음식 찾기가 이보다 쉬운 곳도 없을뿐더러, 누군가의 가족, 친지, 친구들이 살고 있는 이곳, 말레이시아. 물가도 싸고, 싱가포르와도 가까워 여행하기 더욱 편리한 곳. 그래서일까. 말레이시아의 첫 확진 케이스는 싱가포르를 방문했다가 말레이시아로 넘어온 중국인 가족들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다민족 국가다 보니 웃지 못할 풍경도 벌어진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은 자신들이 '말레이시아인'임을 강조하며, 중국인과 다르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인의 특유의 억양과 액센트-망글리시-를 살려 목소리를 낸다. 자신은 중국인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인이라고 티를 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그제 한국에 놀러 가기로 했다는 현지인 친구가 한국 사람들이 '자기를 중국인으로 알면 어떡하냐며' 나에게서 속성 한국어 공부를 하고 떠나기도 했다. 그건 전혀 소용없다고 누차 얘기했지만.
중국 본토의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중국인을 잘 구별하기 힘든 서양인들과 다른 민족들은 초면인 경우에는 무조건 중국인일 거라 의심하고, 구면이라도 춘절(CNY, 음력설) 덕에 이동이 꽤 많았기 때문에, 중국인과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의 접촉이 많았을 거라 지레짐작하기도 한다.
동시에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곳, 모일 법한 곳에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았을까 의심 반, 우려 반의 걱정을 하는 것도 작금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나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일명: 우한 폐렴)이 창궐하고 Pandemic으로 갈 거라는 얘기까지 나온 이상, 조심하지 않을 수 없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는다든지, 손 세정제를 구비해 집에서도 사용하고, 이전보다 훨씬 더 청결한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 손을 더 자주 씻고, 구강 청결제로 가글을 하며, 면역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활동 영역이라는 게, 어디 하루아침에 그렇게 쉽게 바뀔까. 외부 미팅도 있고, 모임도 있는 날엔, 사전 취소하거나 극구 사양할 수가 없는 경우, 어쩔 수 없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며칠 만에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때, 웬걸. 아이를 안고 있는 서양인 부부가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서자마자 좁은 엘리베이터 벽으로 바짝 붙는다. 새롭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그랬다손 치더라도, 내게 걸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 나를 보고 방긋 웃었던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들어서면서 놀란 표정을 짓고, 모자와 겉옷으로 아이를 숨겼기 때문. 그냥 아이가 아프면 안 되니까 부모로서 그러려니, 조심하고 싶으려니 하고 말았다. 그랩을 타고 친구 집에 도착해 (음력설 명절을 맞아, 오픈 하우스를.... 굳이.......) 점심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내가 방금 이런 일을 겪었다 했더니, 중국인 친구들이 깔깔대고 웃으며 말한다.
"Jay, 너 쌍꺼풀 없잖아! 마스크도 안 썼고! 너 영락없이 중국인인 줄 알았나 보네!"
"뭐라고? 그럼 그거 내가 중국인일 줄 알아서 피한 거야?"
말레이시아도 확진자가 10명 (2월 5일 기준)으로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공포심과 경계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악수도 하지 않고, 이 더운 나라에서 숨조차 쉬기 힘든 마스크도 하고. 사실 나는 아직 마스크를 사지 못했다. -고맙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국제 우편으로 보내는 중이라지만, 혹시 세관에서 빼앗아 버리지 않을까 걱정 중- 저 멀리 시골 동네마저도 중국인 관광객들이 마스크를 싹 쓸어가기도 했고. 마스크는 아직 구경도 못했고, 한인들이 밀집해 사는 동네에서는 줄 서서 마스크를 산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애초에 아주 건강한 상태로 집 밖에 계속 나가질 않았으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이 기분은 뭘까. 서양인 부부의 논리를 곱씹어 보려고 해도, 쌍꺼풀이 없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너 = 쌍꺼풀 없는 동양인 = 중국인 = 우한 폐렴 의심자 = 피해야 해!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했단 뜻인가. 내가 그들의 국적을 알았다면, 혹시 그들이 감염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면, 나도 그들을 슬쩍 피해 반발짝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을까. 자가 격리하는 가족들끼리도 1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지 않았던 그 오랜 날들 중, 이미 의심자들, 확진자들이 줄줄이 타고 내렸던 공간을 잠깐이나마 공유했던 건 아닐까.
전 세계적인 비극이다. 언제쯤 진정 국면에 접어들 수 있을까. 이 사태로 인해 위생 관념이 대단히 나아질 거라는 근본 없는 희망을 갖기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사스나, 메르스에 비해서는 그래도 안전한 거 아닌가요?'라는 어이없는 질문이 인터넷 세상을 도배한다.
전 세계가 몇 발자국 더 서로 가까워진 21세기 라이프 속에, 정말 이건 '막을 수 있는 질병'일까 라는 절망감도 느껴진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도 나는 6시간 30분이면 '쌍꺼풀 없는 동양인'으로서, 대한민국에 도착할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위협, 누군가에게는 피하고 싶은 존재로 떨어지는 것도 그러고 보면 한 순간이다. 나라고 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가도, 아니 왜 대체 나를 피해? 라는 이중적인 생각이 드는 거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작은 그릇인가 보다.
말레이시아는 마스크 착용 인식이 얕은 편이다. KL SENTRAL역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어림 잡아보아도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30%라고 말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 내 언론에도 보도된 적 있지만, 중국의 거대 자본과 투자에 목매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는 걸 꺼려하는 탓에, 자국민의 확진자 수를 숨기고 있지 않냐는 의심도 받고 있다. 미얀마와 캄보디아에서는 국가 지도자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발표하기도 했고, 말레이시아의 총리 마하띠르, 그리고 인터뷰에 함께 실린 의사의 말이 인용된 기사에도, 결국 같은 목소리가 등장했다. '마스크를 꼭 써야 하는 건 아니다'라는 말에 더해, '사태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마스크 착용 의무 조건은) 달라질 수 있다'는 어이없는 단서를 걸긴 했지만.
짧으면 짧고(2-3일), 길면 길다(14일)고 보이는 잠복기에, 무증상 감염자도 있다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중국(계)인이 적어도 7-800만 명은 살고 있는 이곳, 거의 온 국민이 고향을 향해 이동하는 춘절을 이제 막 끝내고 삶으로 복귀한 말레이시아.
쌍꺼풀이 없는 동양인이자 동시에 '지금으로선 매우 건강한' 한국인인 내가 중국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a.k.a. 오해)만으로, 내게서 달아나고 싶었던, 아마 숨도 쉬지 못했을 서양인 부부는, 혹시 아직도 나를 의심하고 있을까. 다시 나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난다면, 또다시 반발짝, 내게서 멀어질까. 아니면 이 콘도미니엄엔 중국인이 너무 많아, 라며 이미 저 멀리 다른 곳으로 달아났을까.
차를 한잔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아이를 애써 가리고 있었던 서양인 부부도, 의심되는 중국인들이 가득 차 있던 말레이시아를 떠난 것뿐 아닐까. 그들 나라의 사람들에겐 방금 수백만명의 중국인을 접촉하고 돌아온 의심자들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같은 나라 사람끼리도 결국은 반발짝 멀어질 수밖에 없을까. 결국 또 그러하다면, 이 시국에 국적이라는 분류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 지구인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얼른 이 사태가 잠잠해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1Wr96OCtZX4&t=8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