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까만 강아지, 백구.
하던 일은 끊겼고, 불확실성은 커졌다. 먹던 약을 바꿨고, 멍해지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난 더욱 무기력해졌다. 빈털터리가 된 것 마냥 제주에 내려왔다. 그리고 이곳 제주에서, 세상에서 가장 까만 강아지, 백구를 만났다.
백구는 내 친구의 강아지다. 바닷가 근처를 떠돌아다니는 유기견이었던 백구가 보호자를 찾게 된 건 다름 아닌 가수 장필순 님 덕분. 장필순 님은 동물 보호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신다. 그런 장필순 님의 마당에서 어느 날 백구가 갑자기 사라졌고, 그 후 동네를 마구 떠돌아다니던 백구를 발견한 친구가, 평범한 유기견이 아닌 것 같다며 뭔가 수상함을 느끼고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3일 동안 친구는, SNS를 총동원해 '분명 주인이 있는 강아지 같은데, 요 녀석을 찾고 있는 분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며 호소했다. 그게 바로 요놈.
운이 좋게도 친구의 목소리가 장필순 님께 가 닿았고, 둘은 만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주일이 지나고, 주인을 잘 따르고 사랑스러운 백구는, 내 친구의 반려동물이 되었다. 친구 역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보신 장필순 님께서, 친구가 훌륭한 보호자가 될 수 있을 거 같다며 일주일 정도 한번 고민해 보시고 알려주시라는 얘기를 꺼내셨던 거다. 몇날 며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친구는 백구를 데려오기로 했다. 난 그 과정에, 분명 백구의 사랑스러움과 애교도 한몫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백구는, 건강하고 총명하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이 많은 강아지가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살던 턱에, 나는 백구를 언제나 사진으로만 보았다.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백구 잘 지내?"라고 묻는 통에 친구가 백구의 인스타그램도 만들었지만, 그걸론 만족스럽지 않았다. 혹여나 내가 기회를 잡아 제주에 가게 된다면, 꼭 백구랑 함께 놀아야지 마음먹었더랬다. 글을 쓰러 내려온 제주,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백구는 짖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는 백구가 함께 한 20일 동안, 백구가 무슨 이유로든 집안에서든,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서든 짖어대는 걸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야, 참 이상하다. 근데 백구는 원래 안 짖어? 어떻게 저렇게 조용해?"
"뭐, 너무 순하고 착한 게 탈이죠. 안 짖어요."
"넌 그럼 짖는 걸 본 적은 있어?"
"네, 짖긴 짖죠. 고양이나 자기한테 다가오는 개가 있을 땐 조금씩 짖긴 해요."
"정말 순하다. 사람을 엄청 좋아하나 봐."
"오히려 사랑이 너무 많아서 탈이죠, 형."
친구가 일이 많아 바쁠 때, 내가 백구 삼촌이 되어 밥도 챙겨주고, 물도 주고, 산책도 시켰다. 날 뭘 안다고 저렇게 꼬리를 흔드는지.
"백구야, 삼촌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야."
들은 척도 안 하는 백구. 백구는 언제나 내 가슴 위로 올라오려 끙끙 댔고, 내가 잠들려고 누울 때마다 내 옆에 와 똬리를 틀고 앉았다.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는 내 얼굴과 입술을 핥고, 산책을 나가면 내 속도를 항상 체크하며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내 눈빛을 바라보며 질문도 하더랬다. 더 길게 산책하고 싶어도, 더 좋은 냄새가 나는 길이 있어도, 백구는 내가 힘들다면 단 한 번도 더 멀리 간 적이 없다. 자신을 듬뿍 사랑해주는 좋은 주인을 만나 하나하나 배워가며 생긴 좋은 습관들이겠지만, 백구는 그랬다. 내가 백구를 알고 있는 것보다 왠지 나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 녀석.
나는 이 녀석 덕분에, 서서히 힘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백구야, 삼촌하고 산책 갈까?"
"흐응 흐응 끙끙 흐으으응"
"백구, 밥 먹을 시간이네 밥 먹을까? 기다려. 오옳지~!"
"흐응, 뚝뚝 -침 흐르는 소리- 와그작 와그작"
"백구 안 더워? 물 마셔."
"흐루릅 흐루릅 흐루릅"
아이고 잘했어. 아구 잘했어. 우리 백구 예쁘지.
백구의 유일한 이슈는 분리불안이었다. 당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버려진 기억 때문이었을 테다. 사람을 잘 따르는 만큼, 사람을 고파하고, 언제나 누군가가 옆에 있길 바라며, 주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어김없이 애처로워지는 강아지. 하긴, 어떤 강아지가 그러지 않을까만은. 백구는 유독 그랬다.
그러니 친구가 바빠서 일을 나간 사이에, 나는 웬만하면 집에 있으려고 노력했다. 산책도 하고, 터그 놀이도 하면서. 함께 소파에 누워 잠들기도 하고, 서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체 넌 무슨 생각하고 있니'라고 서로에게 의미없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답은 없었다만.
그런 백구가 지금까지 처음 보여준 이 모습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백구는 누구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녀석이 아닌데, 유난히 반가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던 날, 손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더니, 자기 집 위로 뛰어 올라간 것이다. 세상에. 이미 그러고 있었는데,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니. 그럼 너는 항상 그 모습으로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거니? 멀리서 차 소리만 들려도 확인하고 싶어 지는 거니?
테라스가 있는 마당에서 이렇게 테이블 위에 올라가,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동네 개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걸 보기도 하는 녀석이었지만, 자기가 아는 사람이 온다는 느낌에, 저렇게 개집 위까지 뛰어 올라가 꼬리를 흔들며 그걸 내려다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얼마나 반갑다는 얘기일까.
언제나 눈치를 보고 있는 백구. 곁눈질로 모든 사람이 뭘 하는지를 유심히 보고 있다. 부스럭하는 소리만 들려도 눈을 희미하게 뜨고 쳐다보며 신경을 쓰고, 이쪽으로 가는지, 저쪽으로 가는지, 짐을 싸는 거 보니 지금 나가려는지, 머리를 감는 거 보면 외출할 예정인지, 멀리서 소리 없이 지켜보는 녀석.
"지금의 이 안락함을 빼앗지 말아요. 날 두고 어디 가면 안 돼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눈빛. 금세 돌아와 보면, 혼자 있던 동안 눈물이라도 흘렸을까 싶은 표정을 하곤 안아달라며 뛰어오르는 녀석.
친구가 무척 바빴던 날, 나도 시내에서 마침 볼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백구를 두고 함께 외출을 하게 됐다. 백구라는 강아지가 짖는 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 아랫집 아저씨께서 그랬다더라.
"둘이 언제 한번 같이 나갔지? 그때 장난 아니었어."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와 나는 그렇게 짖고 우는 거 처음 들었는데, 정말 동네 떠나가라 울면서 짖더라고."
"아... 그랬어요..?"
마음이 아팠다. 백구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또 얼마나 불안했을까. 온전히 사랑받던 주인을 두고, 또 사랑을 얹어주는 삼촌까지 합세해 사랑을 듬뿍 받다가, 갑자기 휑 하니 텅 비어버린 하루를 보낸 기분. 주위를 맴맴 돌며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둘. 그날 백구는 한참을 둘 사이를 오가며 낑낑거리며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제발 가지 말아요. 나를 두고.
"근데 내가 그럼 좀 덜 좋아하는 척을 해볼까? 내가 지금 백구를 괴롭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형, 뭐 어쩔 수 없죠. 환경이 잠깐 길게 달라진 건데, 그것도 지나갈 일이죠. 감당해야 할 거예요."
"너무 귀엽고 순하니까 예뻐해주고 싶고, 어릴 적 못 받은 사랑을 퍼부어 주고 싶고 그런데, 나중에 나 가고 나서 그것 때문에 분리 불안이 더 커지고 우울해지면 어떡해."
"제가 다시 잘 교육시키면 됩니다. 마음이 가는 만큼, 예뻐해 주고 가셔도 돼요." 너그럽기도 하지. 내가 백구 덕분에 힐링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해서인지,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백구와의 오롯한 시간들을 허락해주었다.
그랬다. 무기력했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까만 강아지, 백구 덕에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요 사랑 많은 강아지 백구가 마치 나에게 한없이 사랑을 퍼주기만 하는 사랑하는 우리 엄마 같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날 사랑해 주고, 내가 무엇을 하든 그 자리에서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 내가 당신에게 아무리 모질고 모나게 굴어도 나를 다시 볼 때마다 반겨줄 사람. 내가 힘들다,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면 가만히 내게 다가와 손을 얹어주고 날 안아주는 사람. 본인이 가고 싶은 길보다 나와 함께 걸어갈 길을 택할 마음을 가진 사람. 내가 기쁘고 힘이 날 때 나와 함께 펄쩍펄쩍 뛰어 줄 사람. 본인이 먹고 싶은 게 있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내가 먼저 먹는 걸 더 행복해하는 사람. 내가 어디서 무슨 방황을 하고,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와도 작은 스탠드를 하나 켜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줄 사람. 주는 사람. 받는 게 없더라도 또 주고 싶어 하는 사람. 엄마.
백구가 나를 향해 안기고, 엉덩이까지 씰룩이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에 난 반했다.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내 품으로 오고 싶어 하는 모습에 위로를 받았다. 내가 잠들기 전 내 옆구리에 자기 등을 가져다 대고 모로 눕는 게 그렇게 좋았다.
어느 날 미간을 찡그리며 내가 그랬다.
"백구야. 삼촌이 머리가 너무 아파. 왜 그런 거지? 너무 아프다."
그랬더니 백구가 터벅터벅 걸어와서는 갑자기 내 무릎에 손을 얹더니, 내 눈을 바라보면서 손을 내어주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날 측은히 바라봐주는 느낌. 흐응 흐응 대면서 당장 뭐라고 말이라도 해줄 것 같은 느낌.
"어이구, 백구 걱정해주는 거야? 고마워." 했더니 내 얼굴과 손을 핥아주고 돌아가는 백구. 지그시 손을 잡아도, 꼬리를 만져도, 배를 쓰다듬어주어도 가만히 날 바라보기만 하는 백구. 가만히 얼굴을 배에 가져다 대보면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인간보다 1, 2도 정도는 더 따뜻하고 뜨거운 생명. 강아지.
그렇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까만 강아지, 백구에게 갚을 수 없는 큰 위로를 받았다. 고로, 백구가 나를 살린 셈이다. 굳이 친구의 개에게 이럴 일인가 하겠지만, 제주의 스무 날을 함께 하며 백구에게 받았던 무한 위로, 그리고 따뜻한 눈길에 난 좀 더 충만해졌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위로와 지지, 사랑을 받는다는 일은 언제나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것이 변함없을 것이라면 더욱.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복잡하고 어려우며, 진심 어린 위로는 찾아보기 힘든 만큼이나 소중하다.
인간보다 2도 따뜻한 생명의 온기 덕에, 큰 힘을 얻었다. 킁킁, 흥흥, 웡웡, 해석할 수는 없지만 꽤나 말랑했던 그 위로에, 한없는 고마움을 안고 떠난다.
네가 카카오톡이라도 하면, 매일 문자라도 할 텐데. 백구야, 그치?
앞으로 제주를 잘 지켜줘. 아빠도 잘 지켜주고.
다시는 슬픈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 행복하게 잘 살아. 삼촌도, 네게 받은 사랑으로 서울 가서 잘 살게. 고마워, 백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