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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May 31. 2020

길을 잃어도 함께 걷는다면

온기를 나누어주어서  고맙수다 예~

제주 날씨는 예측하기 어렵다. 내가 살고 있던 쿠알라 룸푸르 KL의 변화무쌍한 날씨만큼이나. 오늘 종일 흐리고 비가 올거란 소식에, 집에서 느긋하게 글이나 쓰려고 마음먹었는데, 이게 웬일.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불어 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나가야겠다.

오늘은 글을 쓰기로 작정한 날. 집 근처 오름을 잠시 둘러보고 한적한 카페를 찾으려고 길을 나섰다. 지도를 둘러보다 찾게된 [노꼬메 오름]. 산세가 조금 가파르긴 하지만, 야트막한 오름들보단 제법 도전하고픈 마음도 생기고, 무엇보다 한라산을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라는 얘기에 서둘러 도착했다.


자유롭게 뛰노는 노루를 볼 수도 있고, 근처에 승마 학원과 말 목장이 있어서 빼어난 모습의 말도 구경할 수 있는 노꼬메 오름. 1시간 반정도면 충분히 오를 수 있을 거란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연의 힘은 언제나 옳다. 풀내가 솔솔 피어오르는 산길,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들에 가슴이 탁 트이고. 너른 고사리숲, 파도처럼 밀려오는 바람소리가 역시 오길 잘했다는 안도감을 준다. 온통 푸른 빛에 둘러싸여 한시간 반쯤 올랐을까.


한라산이다.

정상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 한라산이라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는 건 꽤 운치가 있다. 센 바람에 구름이 흩어지듯 흘러가고, 그 아래로 끝없이 푸른 능선이 넘실댄다. 덕분에 미끄러운 산길을 오르느라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별안간 턱 풀어지며, 제주 바람에 감싸인다. 젖은 옷이 시원하게 말라간다.

올라왔던 길이 미끌거리던게 생각나 내려갈 땐 족은 노꼬메 오름쪽으로 내려가보기로 했다. 큰 노꼬메 오름보다 볼건 없다지만, 족은 노꼬메 오름도 인기가 많다고 하니, 내려가 보면 주차장이든 화장실이든 정류장이든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개운하게 이 길을 내려가 한적한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하며 글을 써야지.

꽤나 경사가 있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오니 이제 끝이 보이는 것 같다. 100미터 앞에 고사리 숲을 지나 1.6km만 더 가면 족은 노꼬메 오름 주차장이 있다고 하니, 20분 정도만 더 가면 이 푸르름도 끝이구나.

그런데 이상하다.

애플워치가 보여주는 시간은 벌써 20분이 훌쩍 넘었고, 내가 걸어온 거리만해도 2.5km가 넘었다고 알려주는데, 왜 주차장이 안 보이지. 분명 반대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봤는데. 이렇게 길을 깔끔하게 꾸며뒀다면 이제 사람들이 보일 때가 지나지 않았을까.

산속이라 그런지, 이럴 땐 스마트폰도 무용하다. 분명 두 갈래 길에 서 있는데 그런 표시가 없다.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구글일까, 네이버일까, 다음일까. 모두 찾아봤지만 몽땅 허사. 그때였다.


"저기 죄송한데요, 혹시 족은 노꼬메오름 주차장으로 가려면 어느쪽으로 가는게 맞나요?"


어? 아까 정상에서 쉴때 스쳐지나간 한 커플이다.


"어, 저도 사실 그걸 궁금해 하던 차였어요. 아무리 가도 안 보이네요. 어딜까요 대체?"


그럼 저희 셋 다, 길을 잃었군요.
같이 걸어 볼까요?

어디서 온건지, 왜 길을 잃었는지, 제주의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정담을 나누며 걸었다. 구름에 가려 어둑해지던 길도 조금은 환해진 느낌이다.


"오름이라고 샛별오름 같은 쉬운 곳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요."

"그러게요. 겸사 겸사 마실처럼 오르려고 했는데, 등산이 돼버렸어요."

"저희 무슨 로스트(LOST)찍는 거 같지 않아요?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없죠?"

"포레스트 검프(Forest Gump) 같기도 하네요. 이러다 끝날때쯤엔 40명쯤으로 불어나는 건 아닐까요?"


꽤나 어색할 수 있는 만남인데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어? 저기 사람이 또 있어요!"

"그러게요, 저희쪽으로 오시는게 아니라, 앞서 나가시는 거 보면 길을 아시는 분인가봐요!"




"저.. 실례지만 족은 노꼬메오름 쪽으로 가려면 이 길이 맞나요, 선생님?"

"아, 사실 저는 바리메 오름 쪽에서 노꼬메 쪽으로 가던 중인데 길을 잃어서.."

"아, 정말이요? 저희도 그래요! 저희 다 육지에서 왔는데."

"저는 제주 토박입니다. 그런 저도 길을 잃네요. 하하."

"여기 표지판이 너무 없어요. 괜찮으시면 같이 걸을까요?"


그렇게 우리는 또 넷이 되었다.

또 한 차례 정담이 오갔다. 어느 오름이 좋은지, 현지인이 추천할만한 곳은 어딘지, 우리 모두는 어떻게 길을 잃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길의 끝은 과연 어디일지.  


제주 토박이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저도 길은 잘 모르겠지만 혹시 주차장이 나오면, 제가 여러분 차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어유, 정말요? 실례가 안 된다면 그래도 될까요? 너무 감사합니다."


점점 평탄한 길이 길어지면서 차들이 오간다. 히치하이킹을 하듯,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돌아가며 물었다.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나요?

그렇게 우리는, 가고자하던 곳에서 3-4km는 족히 떨어진 바리메오름 주차장에 도착했다. 제주 토박이 선생님의 차가 주차되어 있던 곳.


"오늘 이 제주 오름 여행은, 아마 제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싹싹하고 예의바르던 청년이 말했다. 나머지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송글송글 맺힌 땀이 코끝을 따라 또르르 굴러 붉고 진한 길 위에 빗방울처럼 떨어진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완전 살려주셨어요." 내가 말했다.

"네, 비도 부슬 부슬 오는데 어떻게 가나, 택시는 오려나 걱정했거든요."

"저흰 커플인데도 길 잃은 바람에 오다가 싸울 뻔 했잖아요.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타세요."


서울서 내려온 커플을 큰노꼬메오름 주차장에 내려주고, 남은 여정동안의 행운을 빌었다.

"선생님, 혹시 빵이라도 드릴까요? 너무 감사한데 드릴게 빵밖에 없어요." 커플이 물었다.

"아, 제가 빵 먹을 나이는 지나서.." 선생님이 괜찮다며 피식 웃으셨다.




십여킬로를 더 갔을까. 이 감사함을 어떻게 전하고 갚아야할지, 편안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좌불안석이 된다.

본인은 제주 동쪽에 사신다면서도 아무데나 내려주면 아마 찾아가기 불편할거라며, 시내 교통편 찾기 쉬운 곳에서 내려주시겠다는 선생님. 아무리 고민해도 생각나는게 없더라.


"선생님,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전화번호 좀 여쭤도 될까요?"

"전화번호는 왜요?"

"아니, 오늘 너무 큰 도움 주셨는데, 제가 너무 감사한 마음에 뭐라도 해드릴게 없나 싶은데, 당장 드릴 게 없어서요. 가족들 함께 드시라고 카카오 쿠폰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요."

"아닙니다. 무슨, 가는 길인데요 뭐. 저도 군복무 하고 그럴 때 외출하고 외박 나오고 하면, 딱히 택시나 버스도 탈 수가 없어서, 지나가던 차 많이 얻어타 봤습니다. 그분들께 드린 것도 없고요. 이렇게 갚을 수 있다면 좋은거죠. 건강히 남은 여행 잘 하고 올라 가세요."

"선생님, 오늘 정말 저 구해 주신 겁니다. 정말 오래 오래 은혜 잊지 않을게요."



우리 모두는, 주고 받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서로의 온기 밖에는.


가고자 하는 방향은 달랐어도, 한날 한시에 모두가 길을 잃었고, 길을 잃었기 때문에 함께 만났다. 길을 찾는 길 위에서. 모두가 함께 길을 잃었으나, 종국엔 모두가 함께 길을 찾게 된 두어 시간 남짓의 여정. 아무 것도 나눈 것이 없지만, 많은 걸 나눈 우리는 오늘의 따스함을 힘으로, 또 며칠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한때 육지에서 10년 살기도 했지만, 제주만큼 좋은 데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돌아왔어요. 제주 살기 참 좋아요. 사람 사는 것 같고."

"네, 그런거 같아요."


선생님 같으신 좋은 분들 덕분에.

각골난망(刻骨難忘)의 심정으로, 이렇게 글이라도 남긴다. 때로 우리 모두는 길을 잃지만, 그 길 위에서 만난다. 그러다 언젠가 다른 기회를 통해 다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고.


그러니 길을 잃는다해도, 잠시 함께 걸을 수만 있다면 그런대로 꽤 살만한 인생이다.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받았던 친절을 수십년이 지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세상 아니겠는가.



고맙수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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