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인의 청춘 Jun 18. 2020

이제 우리, 약을 좀 줄여봐요.

소중한 당신, 행복한 마음.

"주혁 씨, 제가 지난번에 했던 주혁 씨 검사 결과지를 자세히 봤는데, 걱정했던 특이 사항이 없어요."


와, 진짜요?


3년 동안 별일 없이 다니던 병원을 바꿨다. 새 병원으로 가는 세 번째 방문. 애초에 다니던 병원은 집에서 가깝고 리뷰가 좋다는 점 때문에 선택한 곳이었고, 조용하고 차분한 의사 선생님 덕에 무탈히 잘 다니곤 했다. 원래 정신건강의학과는 길게 약 처방을 하는 것을 권장하지도 않고, 우울하거나 힘이 들 때 쉽게 내원할 수 있어야 하고, 환자가 무기력하거나 극도로 탈진한 상태일 때도 가기 쉽도록 가까운 의원에 들르는 것이 정석이다. 멀리 가서라도 좋은 선생님께 상담을 받고 싶다는 얘기는 그렇게 밖에 나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에너지와 의욕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사치나 다름없으므로.


단지, 특별한 설명과 변화 없이, 3년간 거의 똑같은 약을 먹었다는 것. 특히, 내 약이 무엇인지, 무슨 작용을 얼마만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복용해왔다는 것 때문에,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긴 했다. 내가 굳이 물은 적도 없지만, 그가 굳이 애써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도, 장복을 하는 환자 입장에서는 아쉬울 법한 지점인지라, 아침 약을 안 먹으면 어떤 상황이 있을 수 있는지, 밤 약을 뛰어넘는 날엔 수면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 모른 채 공황장애 증상이 '혹여나' 나올까 두려워 기계처럼 약을 먹었다는 게 맞다.


뭐. 이렇게 확실한 위약 효과도 없다. "째뜬 먹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


그래서, 바꿨다. 병원을.


정신건강의학과 약을 처음 먹게 된 것도, 병원에 가는 게 두렵지 않았던 이유도 모두 친구 덕이었는데, 친구가 이번에도 도움을 주었다. 세심하게 잘 물어봐 주고, 상세한 설명을 들어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며 소개해 준 병원. 집에서 조금 먼 곳이라 걱정은 됐지만 다행히 나는, 밖에 나가 햇살을 맞으며 걷고, 지하철의 사람들을 마주하고, 버스의 드르렁 거리는 소리를 묵직하게 받아들일 정도의 에너지는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고 한번 가보기로 했다.


주혁 씨, 두 가지의 강박이 있네요.

약을 조절하기 위해 해 본 테스트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처음 듣는 얘기. 나에겐 '완벽하고 싶은 강박'도 있고, 반대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 하는 '이완의 강박'도 있다고. 그게 내가 가끔 지나가는 무기력의 계곡에 머무르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체력이 떨어지고 기분이 안 좋은 날도 있을 수 있지 라고 생각했던 게 틀렸던 거다.


완벽에의 추구, 완벽하고 싶은 강박, 실수하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 이런 건 애초에 알고 있었던 거였지만, 이완의 강박이라니. 풀어지고 늘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강박은 어디서 온 걸까.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너무 힘들게 자신을 조이는 순간이 온다고 알고 있으니, 반대로 그만큼 모든 걸 풀고 내려놓지 않으면 다시 무언가를 하기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마음.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온종일 잠을 자고 싶어 한다거나,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어 한다거나,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쉬지 않으면 내일을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불안한 마음. 그래서 오늘 하루의 효율을 0%으로 만드는 과도한 이완. 그게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이완의 강박이었다.


70-70-60-80-70-60-80으로 살아도 되는데, 130-100-0-10-0-150-130-0-0 으로 살고 있으니, 최선을 다한 날들 뒤에 오는 '아무것도 안 하고 숨고 싶은 마음', 그게 바로 내가 가진 이완의 강박이었던 거다. 무기력의 계곡. 방전의 시간. 이런 0의 시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 강박이라면, 나는 '힘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는 두려움을 대체 얼마나 크게 갖고 있었던 걸까.


더욱 심화된 검사를 하나 더 하면서 선생님께서 그러셨다.


아마도 약 조절이 되겠지만,
양이 줄어들기보단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그런데, 그 검사를 마치고, 요가를 하고, 달리기를 하고, 산책을 하고 글을 쓰며 보내온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결과를 들으러 간 날 들었던 얘기가, 바로


주혁 씨, 이제 우리, 약 한번 줄여봐요.


였던 것.


생각보다 마음이 건강하고, 큰 특이사항이 없었던 것.


너무나 다행이고, 주혁 씨가 좀 더 에너지를 쌓는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간다면 위급하거나 두려움을 크게 느끼는 상황은 줄어들 거라고. 그러니 처방해 준 약에서 약을 빼고 먹어보고 정 힘들 때만 상비약으로 두는 느낌으로 먹어보라고.


기억력 문제, 단어 사용 문제 등은 이슈가 아니고, 단지 여전히 생각이 너무 많아서 겪는 일시적인 것들이니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노력하면 서서히 줄어들 거라고.   때리고 항상성을 유지하는데  문제가 없어 보이니, 조금씩 약을 줄여가 보면서 상황을 지켜보자고.


소중한 당신, 행복한 마음


약 봉투에 쓰여 있는 문구다.


그래, 소중한 나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다.


당신의 마음이 부디 행복이라는 울타리 안에 놓여 있길 기도한다. 그게 아무리 소소한 것일지라도. 어제 나의 행복은, 활짝 열어놓은 창을 드나드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