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인의 청춘 Oct 11. 2020

심학산 둘레길을 걷다, 세 번 울었다.

아마 다 잠깐 일지도 몰라

원고를 쓰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그 안에 서서히 번지는 구름을 보면 가끔 심장이 자유낙하를 할 때가 있다.

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나가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운동을 해야겠다. 일요일 아침 8시 깨어나 반디로 방송을 듣고 모니터링을 하다가 내일 생방송 원고 뉴스를 전부 뽑고, 집을 나섰다. 저렇게 파란 하늘을 두고 방 한켠에서 전전긍긍하며 하루를 날릴 수는 없는 노릇. 집 근처에 있는 심학산 정상과 둘레길을 한번에 다 돌아보기로 했다. 후, 하고 깊은 숨을 내쉬며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 완벽주의자의 강박형 산문 ]

생방송 작가로 다시 일하게 된 지 6주 차가 지났다. 괴롭고 힘들었다. 개편 전 2시간짜리 원고 7개, 약 300페이지 원고를 쓰고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2시간짜리 생방송, 영어 교육프로그램 원고를 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나처럼 나를 분쇄기에 갈아 넣는 식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워낙 예민하고, 그래서 수면장애, 공황장애까지 있는 내가, 말레이시아에서 4년을 보내다 한국에 와서 생방송이라니. 그것도 아침형 인간과 가장 거리가 멀 수도 있는 -나는 하루에 8시간 정도를 자야 하루가 말끔하게 돌아간다고 느낀다-내가, 6시에 일어나 출근이라니.


고백해보자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약 20년 전, 모닝스페셜의 첫 조연출이었을 당시엔 모닝스페셜이 1시간짜리 생방송이었고, 나는 원고에 관여하지 않았다. 주로 제작을 돕고, 운영에 관여하고, 방송에 대해선 받아쓰기를 해서, 청취자들을 위해 게시판에 올려주는 정도? (물론 처음 받아쓰기를 할 때 9시간이 걸렸다는 건 다른 글에서 소개했다 https://brunch.co.kr/@infinitolee/116 )


통역병으로 군생활을 마치고, 처음 모닝스페셜 보조 작가로 합류했을 때도 그랬다. 내 역할은 뉴스 원고를 담당하거나 퀴즈를 내는 일 정도였다. 뉴스 원고를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일도 아니었다. 1시간짜리 방송에서 30분을 채우는 일. 기사 두 개와 표현 네 개를 정하는 일. 물론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일이 손에 익을 때쯤, 원고를 쓰는 시간은 1시간 반 정도로 줄었었다.


그리고 15년 뒤. 나는 서른아홉이 됐고 (그냥 마흔), 공황장애가 있고, 수면장애가 있는 중년(?)이 됐다. 작가를 그만둔 게 정확히 2007년 3월이니까 13년이라고 해두자. 13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고, 말레이시아에 4년 다녀왔다. 방송이라고는 TV홈쇼핑 관련 일을 했다든지, 라디오 진행을 했다든지, 세계테마기행 TV 촬영을 했던 일이었지, 방송 작가 일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걸 내가 간과했던 게 어마어마한 패착이었다. 나는 지난 13년간 방송 작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2시간짜리 생방송.

2시간짜리 생방송은 2시간의 원고 작업으로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걸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국내외 뉴스 8개를 선정하기 위해 적어도 40개 정도의 기사를 읽는다. 같은 주제의 기사를 언론사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작성하기 때문에 더 읽어봐야 하는 건 물론이다. 거기에 청취자들에게 들려줄 표현을 꼭 넣어야 하고, 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참고해 영작한다. 깊이 있게 다루는 뉴스는 또 어떤가. 나라별 비중도 봐야 하고, 뉴스 주제 카테고리도 매일 다르게 분배한다. 주야장천 미국 뉴스만 할 수도 없고, 일본, 중국 뉴스는 세심히 다뤄야 한다. 사람들이 귀를 쫑긋할 수 있는 국내 뉴스라도 사안이 어떤 건지, 사실에 입각한 내용인지 체크해야 한다. 거기서 왜곡의 가능성이 있는 모든 내용을 배제하고 사실만 구별해 한 글자 한 글자 채워간다. 그게 영어로 매일 40페이지다. 2부 코너는 어떤가. 영화, 건강, 여행, 상담, 환경, 음악, 책,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인 만큼, 그 내용을 내가 다 이해해야 한다. 영화도 봐야 하고, 건강 뉴스의 팩트 체크도 해야 하고,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꼼꼼히 읽는다. 상담에서 잘못된 말은 없는지 체크하고, 환경 이슈는 어떤 주제로 어떤 각도로 다뤄야 할지 게스트와 꼼꼼히 상의한다. 음악을 많이 들려주는 토요일은 모든 선곡과 주제를 테마 안에서 정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재미있는 원고 작업이지만 그만큼 신경이 곤두선다. 욕이 들어있는 노래는 아무리 듣기 좋아도 다 빼야 하고, 얼마나 자주 튼 노래인지도 하나하나 체크해야 한다. 물론 생방송인만큼, 노래 한곡당 길이가 어떻게 배분되어야 할지, 남성 여성 노래 비중이 어떤지도 봐야 한다. 일요일 책 원고는 다른 작가님이 쓰고 있지만, 그것까지 내가 해야 한다면 아마 벌써 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거다.


* 지금까지 서술한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오프닝을 써야 한다. 매일 의미 있게, 매일 새롭게. 재미있는 문장을 번역해 볼 수 있는 퀴즈를 내고 표현을 고른다. 매일 1-2시간씩 논의해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사연이나 신청곡이 있으면 그게 어디에 어떻게 어떤 길이로 들어가는지 고민해야 한다. 거기에 게스트들이 작성해서 공유하는 원고를 다 읽고 구성을 해야 한다. 내용에 맞는 질문을 해야 하고, 재미없거나 틀린 내용은 체크해서 수정해야 한다. 방송 시간에 맞게 분량을 줄였다 늘렸다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 하고, 퀴즈는 그냥 내는 게 아니라 거기서 뭐라도 건져갈 수 있는 상식은 줄 수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그마저도 아니면 웃기기라도 해야 한다. 영어 학습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학습자를 배려하는 구성을 하고 싶다.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표현을 넣는 건 싫으니 매번 다르게 쓰고 싶어 진다. 어제 배운 내용, 앞으로 배울 내용도 꼼꼼히 체크해야 하고, 혹시 잘못된 표현이나 내용이 없는지 끝없이 체크해야 한다. 너무 자주 나온 표현이 없는지, 겹치는 건 없을지, 의미가 다른데 잘못 들어간 건 없는지 체크해야 한다.


* 그러니 과부하가 오고야 만다.


[ 개편 전주 ]

목과 어깨가 굳었다. 손끝에 전기가 와서 잠깐잠깐 스트레칭을 해주지만 별 효과가 없다. 개편 전 주에는 점심과 저녁을 모두 먹지 못했다. 화장실을 갈 엄두가 안 나서 그냥 계속 원고를 썼다. 약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도 했다. 어딜 다시 봐도 틀린 걸 찾아낼 수가 없다. 눈은 계속 돌아가는데 왜 그걸 못 봤지, 자괴감이 든다. 원고를 보내면 잘못된 부분이 체크돼서 다시 돌아온다.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누르다가 시간을 보면 매일 12시. 오늘도 17시간쯤은 일한 것 같다. 원고를 15시간씩 썼다. 생방송이 시작되면 체계가 잡히고 달라지겠지 라고 기대해 본다.


[ 개편 첫 주 ]

목이 더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정면을 보는 건 가능한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면 현기증이 와서 돌에 자꾸 걸려 넘어질 것 같다. 잠을 너무 못 자니까 정보가 머리에 입력이 안된다. 방금 들은 얘기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오늘 방송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람만 든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너무 긴장을 하고 원고를 10시간씩 쓰니 팔꿈치에 멍이 들고 어깨가 굽었다. 아무리 스트레칭을 해도 몸이 나아지질 않는다. 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코로나 시기에 무슨 요가야. 집에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웬걸. 시간이 1분이라도 남으면 자고 싶다. 요가는 무슨 요가. 사치다. 점심, 저녁을 모두 건너뛰었다. 밤 11시에라도 밥을 먹으면 다행. 아, 이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 둘째 주]

이제 좀 자리가 잡히는 걸까 싶지만 도무지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다. 내가 바보일까, 멍청한 걸까. 왜 속도가 안나는 걸까. 보고 또 봐도 왜 계속 오타가 나오고 틀린 부분이 있을까.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님 소질이 없는 걸까. 왜 더 여유가 생기지 않지. 잠을 푹 자보고 싶은데 도저히 여유가 없다. 하루치를 간신히 끝내고 나면 다음 날 원고를 조금이라도 미리 써 놔야 내일 일이 일찍 끝날 것 같은데, 그걸 조금이라도 보고 자려면 어느덧 새벽 2시, 3시다. 알람을 5시 50분부터 8개 정도를 맞춰 놓는데, 매일 기절해서 자니 뭔가 불안하다. 밥을 제대로 먹은 때가 언제였을까. 이번 주엔 그래도 두 끼는 먹었구나. 마음이 급해서 밥을 욱여넣듯 삼키고 들이켜 버리니 소화가 안되는 것 같고 매일 아랫배가 딴딴하게 뭉치는 느낌이다.


[ 셋째 주 ]

도저히 손가락이 아파서 안 되겠다.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려니 컴퓨터를 사야 될 것 같다. 밤 11시에 원고 작업을 끝내고 과감히 쿠팡에 들어간다. 내일부터라도 숨 좀 쉬려면 새벽 배송밖에는 답이 없는 것 같다. 윈도가 깔려있는 컴퓨터를 5분 만에 찾고, 11시 40분에 컴퓨터를 주문했다. 새벽 4시에 컴퓨터가 도착했다. 웬걸. 윈도 PC +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업하니 속도가 2배 정도는 빨라진 걸까. 6시간 만에 작업을 끝냈다. 앞으로 계속 이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시간만이라도 더 자고, 30분만 산책해 보고 싶다. 지금 내 삶엔 원고 + 잠 + 원고 + 잠 + 원고 + 잠 밖에 없으니까. 모든 대화를 다 씹기 시작했다. 활성화되어 있는 카톡창은 제작팀 창 하나뿐. 나머지는 전부 진행자, 게스트와 나누는 대화 밖에는 없다. 모든 약속을 다 미루고, 받아야 하는 수술을 취소했다. 평일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냥 포기했다 치자. 토요일 생방이 끝나고 딱 24시간 정도 주어진 휴식, 어차피 일요일 아침 11시쯤이면 다시 원고 걱정을 해야 하지만, 뭐 어때. 토요일이 엄청 소중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지, 그냥 잠만 자고 싶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다.


[ 넷째 주 ]

이제 한 달째가 되어가면서 속도가 훨씬 빨라지긴 했다. 처음 13-15시간을 원고에 쓰던 시간을 5-6시간으로 줄여도 원고를 쓸 수 있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점심을 잘 챙겨 먹었다. 여유 있게. 물론 그날 저녁을 먹진 못했지만, 다음날은 저녁을 챙겨 먹은 적도 있다. 매일 점심 저녁을 먹진 못하지만 그래도 '밥을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원고가 한번 8시에 끝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좀 눈물이 나려고 했다. 가까이 사는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잠깐 차 한잔만 해도 되냐고 물었다. 나 오늘 너무 행복해.라고 말하는데 말문이 막혔다.


이제 좀 시간이 나려나 싶었다. 언감생심이지만 요가도 할 수 있으려나 했고, 매일매일 조금이라도 하던 달리기도 하고, 밥도 차려먹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지옥의 녹음 주간이 시작됐다.


추석 연휴가 왜 이렇게 긴 걸까.

원고를 80장씩 쓰기 시작했다. 추석 연휴 동안 녹음 방송을 하기로 했으니 4일 치 원고를 다음날 생방 원고에 얹어서 함께 써야 한다. 40장을 5-6시간 썼으니, 다시 80장을 12시간 동안 써야 하나. 숨이 턱 막힌다. 이번 주에도 밥 먹긴 글렀고, 커피 한잔 내려 마시려고 해도 이 작은 방에서 뛰어다녀야 했다. 모두 다른 내용으로 의미를 주어야 한다는 건 대단한 압박감이 뒤따르는 작업이다. 그게 매일 생방송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생산자에겐 어떨 땐 지옥 같은 일이기도 하다.


다시 잠을 못 자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추석 원고를 썼던 주간 동안 7일 동안 내가 잔 시간을 더해보니 20시간이 되지 않았다. 40 평생에 처음 겪어보는 일인데, 손톱이 갈라져 깨지더니 반이 날아가 버렸다. 영양실조란다. 21세기에, 이토록 풍요로운 시대에, 한국에서, 나이 40 먹은 덩치 큰 남자가 영양실조라니. 어라? 몰랐는데 발톱 하나도 그러네. 이게 웬일인가. (이제 거의 나았다.)


물건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어디에 두고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기사 3분 전에 한 얘기도 기억이 나질 않으니까.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운 걸 - 간신히 밥 한 끼 먹겠다고 - 까먹고 4일을 그대로 두었다가 찌개에서 구더기가 나왔다. 분명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 준비를 했지만, 밥을 먹지 못했다는 사실도 잊었던 것이다.


운전을 이상하게 하기 시작했다. 계속 원고 생각을 하느라 신호를 잘 못 본다.


물을 마시려고 물병을 열었다가, 마시지 않고 다른 일을 한다. 그리고 몇 분 있다가 아차, 물을 먹었어야 하지? 라면서 물을 찾는데 물을 어디에 뒀는지 찾을 수가 없다. 간신히 짬을 내서 빨래를 돌렸는데 빨래가 끝났다는 걸 잊었다. 다음 날 다시 빨았다.

알람 시계를 켜 놔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기절하듯 잠을 자는 바람에 방송에 늦었다. 물론 8개를 다 켜놓고 잤는데도 못 일어나서 방송에 늦은 날도 있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옆방에서 어느날 파티를 하는지 너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놀아서 -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게 다행일지도- 에어팟으로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고 3시 반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든 날이 있었는데, 그날 그놈의 완벽한 '노이즈슬링'기능 덕에 알람을 하나도 못 듣고 7시 50분이 되어서야 스튜디오 간 적이 있다. 에어팟 프로는 정말 신이 만든 완벽한 gadget이다.



불면증이 웬 말. 불면증이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 기면증이다. 침대에 눕자마자 내일 업데이트할 뉴스가 있나 살펴보다 5-6초도 안돼서 잠이 들면서 얼굴 위에 폰을 떨어뜨린다. 기절하듯이 잠을 자는 것이다.


가끔 자다가 악몽을 꾼다. 원고를 틀렸다는 장면이나 방송 사고가 났다는 얘기가 오간다. 잠자다 계속 끙끙거리거나 소리를 질러서 내가 내 목소리에 놀라서 가끔 잠을 깬다. 집이 쓰레기장이 되어간다. 청소를 매일 하고 살았는데 그럴 기력이 없다. 목을 풀려고 마사지기를 샀는데 만족스럽다. 다만 그걸 켜고 마사지할 시간이 없었다. 운동은 웬 말. 남는 시간에 밥을 먹느라 매일 밤 11시, 12시에 저녁을 먹으니까 계속 살이 찐다. 1시간이라도 시원하게 달려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뛸 여력이 없다. 잠이나 자야지. 쇼핑이 계속 늘어난다. 쇼핑하는 시간은 언제나 밤 11시 40분, 원고를 간신히 끝내서 최종고를 보내 두고, 새벽 배송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찬스. 자꾸 뭘 사고 싶다. 계속 뭔가 필요한 것 같다. 뭔가 좀 익숙해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아무리 길게 자도 하루에 3-4시간 자는 게 전부다. 아, 미치겠네.




4년 동안 먹던 약을 못 먹은 지 2개월이 지났다. 그도 그럴 것이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밥 먹을 시간도 없는데 서울에 있는 병원을 어떻게 간담.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매일 먹다가 2개월 동안 안 먹었는데도 공황 증상이 없고 잠을 잔 거면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드디어 4일은 쉴 수 있는 추석 연휴가 왔다. 파김치 같은 몸을 이끌고 2개월 만에 간신히 병원에 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죄송해요. 제가 정말 도무지 올 정신이 없어서요."

"어떠셨어요."

"음.. 너무 피곤해서 잠은 쓰러져 자느라 불면증은 없는데, 폭식을 하고 과소비를 하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자꾸 사람들하고 싸워요.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게 신경안정제를 끊은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다섯 가지 증상 중에 몇 가지예요 주혁 씨."

"아 그래요?"




욕구불만과 불안, 초초, 긴장을 잊으려고 폭식을 한다. 초초한 마음이 불안으로 커지면 그 불안을 해소해야 하는데 지금의 생활 패턴에서 그런 걸 할 여유가 조금도 없으니, 매일 밤 쇼핑을 하고 새벽 배송을 해서 '내가 필요한 것을 가장 빨리 얻는 방법'을 택한 거란다. 하기사, 그렇게 산 물건들이 종종 잘못된 경우가 있었는데, 이유는 내가 상세페이지를 읽을 시간이 없어서, 사진만 보고 3초 만에 결제한 물건들이 때로 3-4배로 오거나, 사이즈가 다르게 오거나, 잘못된 걸 시키거나 하는 일이 잦았던 거였다. 모두 마음의 여유가 없는 불안을 신속, 빠름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 책상을 사고 다음날 그 사실을 잊은 채 다른 책상을 주문해 취소한 적도 있고, 의자를 샀다는 걸 기억하지 못해서 '나혼산' 하우스에 의자 5개를 주문했다가 3개를 취소했다.


폭식도 마찬가지. 보상심리가 작용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다. 원래 나는 자주 배가 고파하고, 많이 고파하지만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진 못한다. 금방 배가 부르는 느낌이 들어서. 하다못해 "새 모이"만큼 먹냐는 얘기를 들을 때도 있었지만 원고를 쓰면서 현기증이 들면 밥을 2-3 공기씩 먹곤 했다. 그러니 살이 찌고, 운동은 못하고, 다시 살이 찌고 붓고, 다시 먹고를 반복하는 것. 군것질을 어마 무시하게 했다. 커피를 몇 잔씩 마시고 과자를 먹고 시리얼을 먹고 초코바나 사탕을 먹고. 그리고 왜곡된 완벽주의의 실현일까. 누가 원고를 지적하면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15시간이나 들여서 쓴 원고가 실패라는 걸 인정하기는 싫었을 테니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살라고. 왜 그렇게까지 일해야 하냐고 물을 지경이니까.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님 불안해서였을까.


파주에 살기 시작하면서 오늘 처음으로 8시에 개운하게 일어났다. 토요일에 본가에 가지 않기로 한 대신에 얻은 엄청나게 소중한 자유다. 심학산은 197미터 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집에서 5분이면 입구까지 갈 수 있는데, 그렇게 궁금한 산에 오늘 처음 가본다.


어제 생방에 나갔던 선곡표를 따라 노래를 들으며 등산을 한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왜 이렇게 하늘이 맑을까. 한강은, 임진강은 왜 저렇게 장엄할까. 노란 꽃들은 왜 그렇게 예쁜가. 저 사람들은 뭐가 저리 즐거운가. 저 꼬마는 왜 저렇게 신나게 웃을까. 북한이 바라다 보인다. 왜 저렇게 가까울까. 그런데 왜 우린 만나지 못할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가 눈물이 난다.


무슨 청승인가 싶어 서둘러 내리막길을 뛰어내려 가다가 아무도 없는 둘레길에서 우거진 숲소리를 들으며 다시 눈물이 났다.

내가 이렇게 사람다운 느낌이 나는 하루가 참 오랜만이구나

너무 서럽더라. 밥도 못 먹고 일하는 게. 잠은 또 왜 이렇게까지 못 자나. 나이가 들어서 작업 능력이 떨어지는 걸까, 욕심이 나는 만큼 더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에 마지막 '저장'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아무도 관심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뭐 하나라도 틀릴까 지적당할까 걱정돼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보게 되는 걸까.


향이 근사한 원두를 사놓고 - 그것도 상세페이지 안 보고 잘못 사는 바람에 엄청 많이 왔다 - 커피 한잔 내려 먹을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그라인더를 써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커피를 내려놓고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둔 사실을 잊은 적이 많아서 2-3일 지나, 향이 달아나 버린 커피를 그냥 버린 적도 있었다. 사실 그라인더는 인생에 처음 사보는 거였는데 산 이유가 더 가관이다. 한 쉬도 쉴 틈이 없으니 저거라도 사면, 억지로라도 원두를 가는 동안만이라도 쉴 수 있지 않을까. 땡. 그래서 원두를 한 번도 갈지 못했다.


냉장고에 썩어가는 음식을 버리는 일은 괴롭다. 파주는 뭐가 그리 까다로운지 쓰레기도, 재활용도 내가 원래 살던 집처럼 매일 내놓을 수가 없다. 일주일에 딱 2일만, 그것도 저녁 4-6시에만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데, 그 시간이 가장 바쁜 나는 언제나 쓰레기를 버릴 타이밍을 놓치고 마니, 새벽 3시에 몰래 나가 버리거나 (사정사정해서 그래도 된다고 관리소장님께 허락 맡았다) 아니면 그냥 집에 쓰레기를 두고 묵히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그러니 쇼핑을 하면 뭐하나. 먹을 시간이 없어서 다 버리는데.





이렇게 각 잡고 앉아서 브런치를 써보는 것도 이제야 여유가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여유도 1시간 뒤면 끝나겠지만. 오늘도 11시가 돼야 나의 하루가 끝나겠지만. 그것도 운이 좋다면 말이다.



사실 이제 그나마 조금 여유가 생겼다. 특집도 없고, 녹음도 없고, 프로그램 개편도 없는 일상의 원고란, 시간은 들겠지만 집중력을 발휘해 보면 4-5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라고 믿는다 -.  몇 주 만에 사람답게 운동하다가, 내 숨소리를 들으면서 산길을 걸으니 '아 이게 뭐라고 이걸 한번 못했을까' 싶다. 그러니 얕은 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오며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청승맞게 둘레길 산책을 하다 앞이 희뿌옇게 변한다. 저 멀리 보이는 물결일까. 서늘한 공기가 만들어낸 습기일까.


그리고 또 다른 노래가 흘러나온다.



남들보다 늦게 문을 닫는 나의 하루에

장난스럽게 귓볼을 간지럽히며

서툰 실수가 가득했던 창피한 내 하루 끝엔

너란 자랑거리 날 기다리니


맘껏 울 수도 또 맘껏 웃을 수도 없는

지친 하루의 끝 그래도 그대 옆이면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다 숨 넘어가듯 웃다

나도 어색해진 나를 만나죠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댄 나의 자랑이죠


[ 종현 - 하루의 끝 ]



"선생님, 제가 이런 마음이 아니었는데요, 자꾸 화가나고 답답해서 사람들이랑 싸워요. 나중에 생각하면 미안하긴 한데 정말 너무 화가나서 그럴 때가 자꾸 생기는 것 같아요. 이것도 약을 안 먹어서 그런 걸까요?"

"주혁씨, 그냥 싸우세요. 분명 주혁씨도 화가 나는 이유가 있었겠죠. 그건 약 안 먹은 부작용 아니에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살라고. 왜 그렇게까지 일해야 하냐고 물을 지경이니까.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님 불안해서였을까. 삶은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가장 확실한 그 어떤 진실이 우리 모두를 울게 만들고 있는 걸까.


누가 알기는 할까. 누군들 알고는 있을까. 아니, 누가 상관은 할까. 사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밥이나 먹자.




매거진의 이전글 불편한 맞춤법, 써리~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