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인의 청춘 Jan 30. 2021

살지 않은 집에 1년째 월세를 내는 기묘한 이야기

이걸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매월 17일이 되면 어김없이 월세를 낸다. 그리고 매월 말일이 되면 어김없이 또 다른 월세를 낸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한 명이고 돈을 내는 사람도 한 명인데, 방은 두 개, 돈을 내는 나라도 두 곳. 이렇게 내는 생활비만 한 달에 어림잡아 130만 원. 뭐 누군가는 작은 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수입이 일정치 못한 프리랜서에게는 130만 원이 아니라, 고정비 30만 원도 매우 피같은 돈이니까. 그리고 내가 살고 있지 않은 그 집의 월세가, 지금 내가 버티고 있는 집의 월세보다 많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기분이다. 130만 원을 내고 50만 원의 집에 사는 아이러니.


내 결정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에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가족들의 성화도 있었고, 안전에 대한 욕구가 그 어느 때 보다 컸던 코로나 초기 상황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MCO라는 이동통제명령을 내렸었는데, 생필품을 사러 나가는 것, 병원에 가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게 금지된 상황이었으니까. 하던 일도 모두 중단되고, 밖에서 할 수 있었던 - 돈을 벌어올 수 있었던 - 모든 일이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그러니, 몇 개월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느니,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자, 밖에는 떠오르는 비책이 없었다. 해외 입국자의 입국을 막자는 원성이 날로 커지는 때였어서 마음은 더 급하고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 11개월이 흘렀다. 말레이시아에서 하던 모든 일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면 돌아갈 수 있겠지 - 사실 돌아가야만 하니까 -라고 생각하고 모든 짐을 그곳에 두고 떠나왔다. 옷, 신발, 음식들, 가전기구들 뭐 더 말하는 것은 손 아프고 입 아프니 생략하겠다. 그리고 11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거다.


그땐 그랬다. 금방 돌아갈 수 있을 줄로 알았다. 절대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현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그 현자의 축에 속하지 못했으니, 집 계약도, 소지품도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뿐이다.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고, 돌아가야만 하니, 잠시 집을 비워둘 뿐이라고. 단기 알바라도 해서 월세를 부치다 보면 언젠가 다시 돌아가, 하던 일을 다시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장밋빛 그림을 그렸었나 보다.


그리고 6개월을 수입이 없이 살았다. 아무것도 구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매일 말레이시아 코로나 뉴스만 보면서 살았다. 다시 돌아가려는 마음을 품고 사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주에라도, 다다음 달에라도 갈 수 있으면 어떡하지. 안 돌아가야 하나 생각해 보니, 우울감이 밀려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4년을 고생하며 그곳에서 해왔던 일들이 작은 비눗방울처럼 손에 닿지도 않은 채로 팡팡 터졌다.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동남아 전문가의 꿈을 키운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과연 다시 갈 수는 있을까. 가지 못하면 뭘 해야 하나. 뭐 그런 복잡한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집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 꽤 많다고 들었다. 당연히, 모든 걸 버릴 각오로 떠난 거다. 가재도구를 다 팔아 달라,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모두 그냥 버려달라, 보증금 필요 없으니 다 처분해 달라,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삶의 터전에서 어쩔 수 없이 쫓겨난 심정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온 분들, 그 마음이 과연 어땠을까. 뭐, 나라고 달랐을까. 내가 조금 달랐던 유일한 것은, '곧 다시 갈 수 있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밑도 끝도 없는 미련함 - 책임감으로 쓰고 그렇게 읽고 싶지만 이제 도저히 그렇게 쓸 수 없는 -으로, 집주인과 담판도 짓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도망 나온 한국인'은 아니야 라는, 현실감각은 1도 없는 체면만 붙잡았나 보다. '나 언젠간 갈 수도 있어. 도망친 거 아니야. 집세 안 밀리고 낼게. 걱정 마.'


그렇게 발 한번 들이지 못한 말레이시아의 집에, 700만 원이 넘는 돈을 부쳤다. 딱히 수입도 없는 주제에.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사는 집 월세도 내기 어려우면서 살지도 않는 집에 따박따박 부치는 월세라니. '씹선비 정신'일까. 나는 바보다.


법인장으로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초기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Jay, 너는 외국인이잖아.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는 언제나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잖아. 우리는 아니야. 여기가 삶이 터전인 사람들에겐 그 어떤 일도 쉽지 않다고. 그러니 네가 의사 결정을 할 땐, 항상 우리를 생각해줘. 네가 한국으로 떠나면 남은 책임은 다 우리가 져야 한다고.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감옥에 누가 가겠니, 네가 아니라 우리야."


별일 없이 회사가 잘 돌아갈 때 들었던 얘기라 충격이 컸었다. 대체 나를 어떻게 보길래 조언이랍시고 그런 말을 하냐며 화를 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다. 걱정 마라. 첫째, 그런 일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 둘째, 설사 잘못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책임은 내가 지겠다, 셋째, 당신들의 미래는 내가 함께 할 테니, 나와 함께 가자. 나는 이 나라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이니까. 멍청한 호언장담을 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원하지 않는 때에 삶의 터전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걸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끝도 없는 우울의 터널을 지나는 건,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는 건 매우 지치는 일이다. 이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어서, 다음 주가 되면 집주인에게 정중히 사과를 하고 임대 계약을 끝내려고 한다. 그곳의 모든 짐을 버려도 상관없다는 부탁과 함께. 무슨 짐이 있는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으니까.

이제 내가 그곳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 가서 할 수 있는 일도 모두 사라지고 만 이 시점에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또 다른 현실도피일 뿐이다 - 미련은 버렸지만, 여전히 현실감각을 잃은 채로 매월 월세를 부친다. 뭐하는 짓인가 싶다. 살지 않는 집에 1년째 월세를 부치는 기묘한 이야기의 멍청한 주인공이 바로 나다. 그걸 이렇게 글로 쓰는데 까지 1년이 걸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 그렇게 활자로 꺼낸 이야기를 눈으로 봐야만 뼈아픈 현실을 인지하는 -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 같이 산다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행복전도사 마냥 무슨 교조주의 글이나 쓰는 내가, 굳이 이렇게 글을 써놓고 나서야 '아 나는 한없이 멍청하구나'를 현실로 인식하는 이 지난한 삶은 기묘하기 짝이 없다. 살면 살수록 더 어려운 기묘한 인생 이야기.


내가 한국으로 떠나올 당시 말레이시아의 코로나 확진자는 한국의 몇배에 달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났을까, 하루에 5-6명이 겨우 확진될까 말까 하는 상황이 되면서 말레이시아는 '우리는 코로나에 잘 대응하고 있다'는 홍보 기사를 계속 내왔다. '아 이제 갈 때가 됐나' 싶기도 했다. 그게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라면 조금만 더 버티면 될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제 말레이시아 확진자 수는 1일 3천 명을 매일 넘고 있다. 가끔은 4천명이 넘기도 한다. 방심했던 시기, 모두가 모여 행사에 참석했던 때에 집단 감염이 터졌고, 그들이 전국으로 흩어진 이후로 모든 건 겉잡을 수 없게 달라져버렸다. 정치 상황은 혼란해지고, 국왕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총리는 이 난국을 기회 삼아 정권을 붙들어 쥐겠다며 애를 쓰고 있지만, 잠깐의 이동통제명령이 아니라 인생통제명령이 내려진 것 같은 웃픈 현실이 쓰리고 아프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엇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에게, 희망만 붙들고 산다는 건 뼈아픈 일이다. 무얼 믿고 살 수 있는 건지, 과연 믿고 살아야 할게 있긴 있는건지, 살수록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게 40년을 살고서야 얻는 교훈이라면, 인생은 매우 덧없고, 시간은 무력하며, 희망과 꿈이라는 건 매우 무용한 것들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잠들 수 없는 나를 재우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