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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Jun 16. 2019

잠들 수 없는 나를 재우는

끝도 없이 괴로운 여정

잠이 오질 않는다. 나에게 수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면, 하루 수면을 망치고 나면 거의 2-3일을 정신을 차리기 힘이 들 정도로 지친다. 게다가 나는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공황장애의 도화선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 힘들고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잠까지 들지 못하면, 다음 날은 뻐근한 가슴을 문질러대며 하루를 버텨야만 한다.


그렇게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건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고약한 구석이 있다. 어렸을 땐 하도 잠을 자서 뒤통수가 납작해진 건지, 과장을 조금 보태면 지금 내 뒤통수는 2인용 냄비 라면 받침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납두밸'-납작한 두상 밸런스-이 꽤나 그럴듯하다. 그렇게 머리만 대면 잤으니, 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느낄 기회도, 느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눈을 감고 몇 분이 지났는데도 잠을 못 잔다는 걸 상상해 본 적도 없고, 불면이란 것은 내 인생의 '고통의 범주'에 존재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라, 길을 가다 코너에서 만난 사람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고 - 사무실 코너에서 소리를 지르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더 놀랐지만-, 지하철에서 누가 몸에 닿으면 마치 '오이를 본 고양이'처럼 화들짝 뛰어오르기도 한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도 들린다. 오죽하면 손끝이 닿아야 느낄까 말까 한 심장 소리가 들리는데,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건 물론이요, 나를 둘러싼 타인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정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타고 들어가 가슴을 후벼 판다.




오늘은 라디오 첫 방송을 위한 녹음을 했다. 라디오 진행자로서 완벽을 추구해 보기 위한 나름 세 번째 녹음이었고, 때문에 12년 만에 방송 원고를 썼다. 방송 원고를 쓰는 일은 정말 이제 기계적으로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그게 또 그게 아닌 것이, 재미있고, 유익하며, 논리 정연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 이어지게 하려면, 수십 번의 퇴고가 필요하다. 짧은 글이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더욱 어렵다. 최근 샘터사에 보냈던 원고는 고작 A4용지 한 장짜리였지만, 쓰는데만 3시간, 퇴고에만 5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세상에 '자소서'만큼 힘든 글이 없는 것 같다. 고작 2,000자의 공간 안에, 나라는 사람이 살아온 20년의 나이테를 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쓰레기 같은 하루를 정리하는 글을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 보라 해도, A4용지 10장은 족히 쓰고도 남을 거 같은데.


문득, 취업 자소서를 10개까지 쓰다가 응급실에 갔던 날이 생각난다. 나는 그게 진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사, 붙여 넣기는 꿈도 꿔 본 적이 없고, 누군가 이걸 나를 평가하기 위해 읽을 거라는 사실만으로 나는 가슴을 쥐어짜듯 최선을 다했다. 후에 알게 된 허탈한 사실이지만, 논술에 애국가를 쓰고도 합격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른 회사 이름을 썼는데도 서류 전형에 붙었다거나, 오탈자가 많고,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서술을 했는데도 합격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세상이 마치 '트루먼쇼'처럼 나를 비참하게 기만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냥 그런 거지. 그저 그런 건데.




라디오 녹음을 하기 위해, 방송용 마이크를 사고, 그 마이크로 녹음한 음성이 깨지지 않고 들리는지를 확인하는데만 자그마치 6시간이 걸렸다. 밤 10시부터 체크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조금 만족스러운 정도네 라는 생각에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30분이었다. 오기라고 해야 하나, 집착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광기라고 해야 할까. '1도 모르는' 오디오의 기술적인 내용들을 구글링 해가며, 결국 소리를 잡아냈을 때의 희열은 너무나 벅차오르는 감정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새벽 4시 30분의 나는 이미 온전한 내가 아니었다.


극도로 예민하고 흥분된 상태에서, 잠을 자려고 해도 잘 수 없는 그야말로 'High'한 상태. 불행히도 나는 그렇게 올라간 텐션을 절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아주 큰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날은 그냥 자는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글이라도 끄적거려야 하는 게, 생명도 없는 시간을 마주하는 마땅한 예의처럼 느껴진다. 시간에 불손하고 싶지 않아서 다 타버리고 남은 재 밖에 안 남은 나에게 다시 한번 불을 붙이는 느낌.




곧 있을 라디오 첫 방송 녹음을 하고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 단 하나다. 원고를 작성하면서 극도로 긴장했고, 마이크 조절을 하고 목소리를 테스트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웠고, 녹음하는 내내 딕션을 신경 쓰느라 '젖 먹던 힘'을 다 써버렸고, 깔끔한 편집을 하느라 체력을 다 써버렸고, 새벽 2시 녹음 파일을 wav 파일로 컨버팅해 이메일을 보내고는, 내일 있을 PD님의 '피드백'이 궁금해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 것, 그거다. 아마도 내게 해가 뜰 때까지의 체력이 남아있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아마도 PD님이 10시에 이메일 답장을 보낼 때까지 잠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혹에라도 달콤함이 수면에 도움이 될까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만들어 먹고, 몽롱한 기분으로 글을 쓰고 있다. 잠이 드는데 도움이 되는 약은 이미 먹은 지 오래고, 지금 이 의자에서 일어나면 약 기운으로 비틀거릴게 뻔하고, 침대에 누워서는 매트리스 위에 몸이 쿵 하고 떨어지는 충격으로, 간신히 오려던 잠이 달아날 것이 뻔하다.




이게 서른아홉의 오만한 '자기 확신'으로 깨달은 '나'다. 메타인지를 잘해야 성공한다지만, 사실 '나 자신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이제 나를 '사용설명서'대로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사용설명서'에 설명이 되어 있지 않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단 사실까지도 인정해야 하는 지난하고 고된, 고통스러운 일이다.


환불할 수 없고, 고장 나도 어쩔 수 없는, 교환할 수도 없는, 나라는 물건을 잔뜩 설명한 폰트 1짜리 약관을 들여다보면서, 반복해서 읽을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나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갈아서 빻고, 물과 함께 툭 털어 넣고, 몸속에 넣는 일. 목구멍에 들러붙은 쓰디쓴 가루약처럼, 그건 아마 쓰고 불편한 '불평등 약관'일 수 있겠다.




허나 어쩌랴. [센서티브]라는 책이나 [나는 생각이 너무도 많아]라는 책을 보면 이렇게 예민한 사람들이 이 지구 위에 적어도 다섯 중에 하나는 된다고 하니, 길 가다 마주치는 네댓 사람 중 하나가, 어젯밤 나처럼 잠을 설쳤을 수 있다는 걸 위안으로라도 삼아야 할까. 그의 고민이 무엇이었든, 그녀의 고통이 무엇이었든, 나에게는 하등의 의미가 없다.


그저 해가 다시 뜨고 난 뒤의 오늘 하루를 또 살아내는 것. 어젯밤의 잠을 벌충하길 소망하면서 오늘 밤은 편안히 잠들어 보려나 하고 기대를 해보는 것. 그게 나의 작은 소망으로 내일 하루를 최대한 버티게 해 주겠거니 하고 누가 들어주지 않을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방송을 하기 전에, 원고를 쓰고, 마이크를 테스트하고, 첫 번째 방송의 흐름을 되짚어 모니터링해보는 것, 더 나은 두 번째 방송을 위해 더 좋은 원고를 쓰고, 더 좋은 목소리로, 더 간결하고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해서, 청취자로 하여금 '들을 만한 방송이었네'라고 느끼게 하는 그 여정. 그게 나를 즐겁게 해주는 걸로 위안을 삼고,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설렘과 과도한 긴장, 불태움, 오기, 집착, 또는 광기, 아주 보통의 말로 표현하자면 '완벽주의'를 발휘해, 나는 또 두 번째 방송을 녹음한 뒤, 긴긴밤을 지새우게 될 것이다.




잠들 수 없다는 이유를 잘 아는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모르는 게 더 고통스러울 것 같지만, 모르는 단계를 넘어서 아는데 뭘 못하는 게 더욱 고통스럽다. 다만 이제 내가 "예민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엔 이력이 나고도 많은 시간이 흘러서, 별 감정도 없는 누가 '너는 너무 예민하다'말해도, 이젠 아무런 감흥이 없다.


너무 잘 알아버려서 어떻게 하면 잠들 수 있을지 알 것 같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서슬 퍼런 자각을 한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은 그래서 지난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장점도 아닌 단점을, 약점을, 모난 점을 제대로 인식하는 건 무던히 애쓰는 시간이 투입돼야 한다. 내가 왜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면서,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인정과 포용'은 '나는 오늘 이래서 잠에 들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잠이 오지 않아도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이건 나쁜 게 아닌 거야'라는 위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자위 말고는 별다른 특효약도 없다. 나의 예민함이 언젠가 무엇엔가, 어디에선가 장점을 발휘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쓰인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지금의 나는 정말이지, '머리만 대면 잘 수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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