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각오와 소유욕으로 쉽게 발을 떼지 말기를
"오빠, 애견인이 될 때의 마음가짐이 뭐예요?"
친한 동생이 오랜만에 DM을 보냈다. 강아지 입양을 생각 중인데, 궁금했다고.
"음?... 음... 대답하는데 한 시간이 필요한 질문이군."
주봉이를 입양하고 함께 한지 이제 1년이 좀 지난 나라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괜스레 주춤하게 된다. 그렇지만 주봉이를 입양할 때까지 실은 나도 4년을 끙끙 거리며 고민했다고, 그런데도 좌충우돌이 너무나 많았다고, 그러니 지금은 진지해져야만 하는 타이밍이라고 말하고 싶기에, 심호흡도 하고, 각 잡고 불렛 포인트 14로 빵빵 자국 내서 꾹꾹 눌러써야 할 것 같았다.
평소보다 집 청소를 자주 할 것
산책은 짧게라도 하루에 두 번 정도는 해줄 것 V
하루 두세 번 정도는 잠깐이라도 함께 놀아주기 V
분리불안 생기지 않도록 애쓰기
남의 손에 자주 맡기지 않도록 하기
동물이 갈 수 없는 곳의 여행은 최대한 줄이기
배변 패드 자주 갈아주기 V
집안의 모든 전선, 쓰레기, 위험한 물건은 적당히 정리하기
못 먹는 음식,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은 절대 주지 않기 V
삼킬만한 모든 것은 조심하기
남에게 피해 주거나, 남을 위협하지 않도록 훈육하기 V
매너와 예절을 알고 자랄 수 있도록 하기
한 달에 한번 이상 꼭 병원에 가기, 수시로 건강 체크하기
접종, 등록 등 필수적인 것들 절대 놓치지 않기
DM으로 적기에 너무 무겁고 장황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더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참고로 V 표시가 된 것들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애초에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 생명이 오는 일
주봉이는 사랑이 무척 많다. 착하고 온순한 편이다. 다른 개들과도 정말 잘 놀고, 몇 번 본 사람들도 잘 따른다. 참을성도 많고 조용해서, 불안한 나의 소용돌이를 잠재워 주곤 한다. 내가 어디가 아프거나 우울해 보이면, 언제나 나를 위로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와서, 네 다리를 지그시 눌러 그의 등을 내게 기댄다.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만 들려도 목덜미 털을 꼿꼿이 세우고 경계를 한다. 지깟게 뭘 나를 지키겠다고. 차에 타려고 하면 뒷발을 덜덜 떨고, 주방에서 넘어진 접시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는 주제에. 크게 짓지 못하게 훈련을 해둔 덕인지, 조용히 하라고 하면, 무슨 개 짖는 소리가 어르신 헛기침 소리 보다도 작다. 약 먹기, 목욕하기도 참을성 있게 해 낸다. 길을 건너지 말라고 하면, 하염없이 기다릴 줄도 안다. 고양이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가르쳐서, 길 고양이에게 위협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 착한 주봉이가 내 삶으로 들어왔다. 그건 순전히 나의 선택이었고, 주봉이는 선택당한 것뿐. 그러니 나는 언제나 '내가 선택한, 나를 위한 행복'인 만큼,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들을 당연히 감내하자는 마음으로 주봉이와 함께 했었다.
나의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졌다
아무리 내 새끼라 예쁘고, 혼자 두기 싫더라도 세상 모든 곳에 강아지와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주봉이가 가지 못하는 곳에 아무래도 덜 가게 된다. 달리 말하면 그동안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갔던 곳들에 발길이 줄어들었다. 여행도 힘들고, 외식도 쉽지 않다. 코로나 대유행 전에는, 비행기를 밥먹듯이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던 나도 삶의 양태를 바꿔야만 했다.
처음 주봉이를 데려왔을 땐, 몇 개월을 쩔쩔맸던 것 같다. 어디가 아픈 건가. 표정은 왜 저렇지? 우울한가? 안 놀아줘서 힘든가? 한숨은 왜 쉬는 거지? 이리 와라고 부르면 왜 재깍재깍 오지 않지? 뭘 더 가르쳐야 하지?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반려견을 키우는 친구들에게 질문도 많았고,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뭐든지 다 내 방식대로의 해석이었던 것
잘못 먹은 사료 때문에 한밤중에 일어나 토를 하고 있던 주봉이, 새벽에 잘못 울린 화재경보 때문에 이제는 따르릉 거리는 소리에 트라우마가 생긴 주봉이, 처음 광견병 주사를 맞고 쇼크가 왔는데도 낑낑대지 않고 그냥 내 품에서 늘어져 버린 녀석, 내 욕심대로 이리 와를 가르치려고 엄하게 혼을 낸 바람에, '이리 와'를 할 때마다 도망을 쳐 나를 애태우던 주봉이, 추운 날씨에 산책을 시키는 바람에 감기에 걸린 주봉이, 건조한 방에서 생활하면서 피부 알레르기가 생긴 주봉이...
"내가 널 너무 몰라서, 내 마음대로만 너를 읽어서, 너를 힘들게 했구나. 그런데도 너는 나만 믿고 나를 사랑해주는구나."
이제 주봉이는 성견이 됐고, 나도 주봉이와 함께 하는 삶에 아주 많이 익숙해졌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를 배웠고, 함께 조금씩 성장했다. 서로의 존재 자체가 곧 신뢰인, 캐러멜 빛 예쁜 강아지와 아직도 서투른 아빠.
가끔은 이런 생각에 잠길 때도 있다.
"만약 내가 널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지금쯤 훨씬 더 행복했을까?"
매일 밤 주봉이와 조용하게 대화를 나눈다.
"아까 간식을 못 준건 그래서 그런 거야."
"그 강아지가 네가 많이 좋았나 봐."
"오늘 친구들 많이 만나서 좋았어?"
"내일은 이거 하고 놀까?"
"오늘은 아빠가 좀 바빴는데 내일은 날씨 따뜻할 때 뛰어놀러 가자."
"주봉아, 여기 파주는 정말 추워. 오늘은 바람이 너무 세서 산책 못할 수도 있대."
알아듣지도 못할 대화를 뭐하러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언제나 빼놓지 않는 나만의 이야기. 언제나 "주봉아, 아빠는 주봉이 많이 사랑해. 주봉이, 아이 귀여워. 주봉이, 아이 착해. 주봉이 아이 멋있어."로 끝나곤 하지만, 내일도 그렇게 마침표가 찍힐 우리 둘 만의 대화.
아빠, 꼭 건강하게 살게. 주봉이 보다 많이, 오래오래.
아, 위 목록에 하나가 빠졌다.
무조건, 많이, 항상, 더 자주 사랑해 주기
주봉이는주봉이다 - 17개월 주봉이의 하루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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