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인의 청춘 Oct 16. 2017

선택을 책임지는 용기

우린 누구나 '용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불안한 사람이야".


인생의 '불확실성'과 '불안'에 대해 오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뱉은 말. 그동안 한 번도 쉬이 해보지 않았던 고백.




학비를 벌어가며 학교를 다니느라 대학을 10년 만에 졸업한 이후, 처음 입사했던 소위 '내로라하는 대기업'을 1년 남짓 다니고 나왔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다름 아닌 "너 미쳤어?"였다. 안정적인 직장, 대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회사, 잘 참고 오래 버티면 잘릴 위험 없이 다닐 수 있는 회사가, 나는 왠지 그렇게도 싫었다.


야근이 당연시되고, 개인의 맹목적 희생이 빛나는 - 그렇지만 그럴수록 희생은 곧 묻혀 버리고 마는 - 그런 회사. 옳다고 생각하는 걸 입밖에 내면 '감히 신입사원이 어디서 멋대로'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말이 누구에게나 익숙한 회사. 남들보다 비교적 안정적인 주춧돌 위에 서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는 회사. 어제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오늘은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돌아가며 자기 생각을 억지로 말하지 않으면 눈밖에 나는 회사. 리더십이 떨어지는 상사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밥때가 되면 살뜰히 그의 점심과 저녁을 챙겨야 하는 회사. 그런 회사가 나는 정말이지 너무 싫었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해라'는 말이 당연스레 사훈이 되고, 그 사훈과 '불굴의 정신'으로 수십 년간 모두의 추앙을 받아온 '국민 기업'. '갑작스레' 효율적으로 일하자며, 자세하게 풀어야 할 일도 한 장의 보고서로 줄이는 걸 규정으로 만들어 놓고는, 보고서의 자간과 장평이 적합한지 따지는 회사. '한낱 일개 신입사원'이 '하늘 같으신 부장님' 앞에서 4시간 동안 고개를 조아리고 앉아, 이번 프로젝트의 '지연'이 맞는지, '부진'이 맞는지, 혹은 '자체 연기'라고 표현해야만, 나중에 결과가 좋지 않아도 임원들이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라고 평가해줄 수 있는지를 따지던 회사.


'효율을 위한 비효율', '일을 위한 일'이 계속되면서 나는 점점 말라 시들어진 나뭇잎처럼 생기를 잃어갔다.




회사를 다니던 1년 동안 주말엔 누구도 만나지 않고 잠을 자곤 했다. 딱히 즐거울 것도, 공유할 것도 없는 나의 일상을 공연히 드러내는 것이 창피하다고 느꼈다. 내가 선택해서 불행해진 것인지, 내가 가진 것에 만족을 못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했다. 마치 푸르죽죽 변해버린 시체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한없이 자도 자도 피로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심장이 뻐근해지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책상에 앉아 시곗바늘만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던 회사. 토익을 990점 맞은 신입사원은 처음이라며, 점심시간을 할애해 그룹 전원에게 토익 스피킹을 가르쳐 보라 했던 회사. '네가 희생해서라도 해줄 수 있다면' 우리 그룹이 좋은 평가를 받고, 부장님은 승진하게 될 거라던 회사. 하여, 내가 두 달간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회사.


일과 시간엔 미친 듯이 일을 했고, 모두가 퇴근하고 나면 혼자 남아 영어 교재를 들여다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약속, 가족과의 단란한 식사는 어김없이 깨어지고, 일주일에 서너 번을 만취해 귀가하게 했던 회사. '잘 놀아야 예쁨 받는다'면서 노래방에서 똑같은 춤을 수백 번 추게 하고 좋아라  박수를 쳐주던 '아재들'. 절약정신을 지키는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며, 팀별로 지급된 종이가 다 떨어지면 사비로 A4용지를 사게 만들면서도, 임원께 '보고를 올려야 하니 다시 출력해 와'라는 말이 너무나 쉬웠던 회사. 직원 복지를 운운하며 만들었던 직원 휴게실에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라고 핀잔을 주던 회사.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으면 전화가 오던 회사.




그렇다. 나는 아팠다. 몸도 지쳤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매일매일 마음에 상처가 났다. 극심한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매일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저 계단을 끝까지 다 오르기 전에 내가 여기서 죽어버리지 않을까'라는 공포에 시달렸다. 종종 숨이 차올라 길을 걷다가도 보도 블록에 주저앉아 숨을 골라야 했을 때,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선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곤두박질을 치며 뛰어댔고, 끝날 줄 모르는 미팅에 참석해 손바닥을 찔러가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을 했다. 보고서 한 장을 커다란 스크린에 띄우고는 스무 명 남짓의 '엘리트'들이 모여, '상무님께서 보시기에 편하시려면' 자간과 장평을 줄일지 늘릴지, 그림을 왼쪽에 넣을지 오른쪽에 넣을지 토론해야 하는 시간이, 그렇게나 숨이 막히고 억겁의 지옥 같았다.


'1분에 7명씩 아프리카에서는 아이들이 배를 곯아 죽어가는데, 나는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에서의 나의 가치와 의미란 무얼까'를 처음으로 그 무엇보다 앞에 두고 싶다고 느낀 순간, 역설적으로 떠올리게 된 생각. 모든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무슨 내용을 떠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어서 빨리 이 미팅룸을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갇혀 길을 잃어버렸구나'.




문항당 200자, 300자 속에서 내 인생 모든 꼭지의 '인상적 요소'를 평가하는 '자소서'가 통과되고, 마치 '말 잘 듣고 별 탈 없을 사람만 고르고 골라 뽑은 건지' 의아하게 만들었던 인적성 검사를 거쳐, '아버지, 어머니가 마땅한 직업은 있으신 건지, 무엇을 하시는지'를 확인해야 통과시켜줄 것 같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야, 불운이었는지 행운이었는지 합격한 회사였다. 행운이라고 해야 맞겠다. 1만 2천대 1의 경쟁률이었다고 들었으니까.


그래, 정말이지 나는 운이 좋았다. 10개의 자소서를 쓰고 합격한 회사였으니까. '취준생' 기간에 하필이면 유독 병약했기 때문에 10번째 자소서를 쓰다가 응급실에 실려가는 바람에 더 쓸 수도 없었으니까.


응급실을 나와 어둑해진 길을 터벅터벅 앞서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니 눈물이 났다.

'엄마, 나 혹시 취업 못해도 내 앞가림 잘 하면서 엄마 걱정 안 하게 잘 먹고살게. 나 정말 이런 거 그만하고 싶어'.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좋지 않았던 집안 형편에 어머니가 느꼈을 당혹감을 미처 헤아릴 길이 없다. 자식에 대한 걱정을 보여야 할지, 불현듯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나를 타일러야 할지, 무거운 납덩이같은 그 선택을 어머니는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래, 나는 여러모로,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 무렵, 취업을 위해 자소서를 100개, 150개 썼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간간이 들려왔다.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나와서 누군 되는데 나는 왜 안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친구들의 하소연도 이어지곤 했다. 결국 내 친구들은 어떻게 그 지난한 일들을 다 해내었을까. 각기 다른 회사마다 별별일 수밖에 없는 그 잘난 '핵심 가치'에 맞추어, 어떻게 150가지의 '다른 나'를 만들어냈을까. 오죽하면 끝없는 스토리텔링에 지치고 지쳐 '복붙' 때문에 떨어지는 취준생들도 있었을까. 과연 그게 진심이 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정말 원래부터 이 회사를 위해 태어나고, 나를 부단히 갈고닦으며 살아온 사람일까. 그 누가 어떻게 설명해도 진심이 될 수 없는 그 자소서라는 것이 과연 나의 모든 것을 대변해 줄 수 있을까. 진심이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진심이 아니게 되는 그 자소서가 대체 무엇이길래, '150가지의 훌륭한 나'를 단번에 '150가지 모습의 실패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까.



사직서를 내기 전날 밤, 새벽 3시까지 고민에 고민을 하다 어머니를 조용히 깨웠다.


"엄마 미안해. 내가 너무 불행하고 스스로가 불쌍해서 더 이상은 못할 것 같아".

"......."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는 딱 한마디를 던지시고, 다시 잠을 청하셨다.


"아이고...... 얼마나 힘들었겠니......".




회사를 그만둔 다음 날, 나를 괴롭혔던 지독한 두통과 공황장애 증상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직할 회사를 구하지 않고 덜컥 회사를 그만두어버린 나를 두고 이야기가 많아졌다. 그래도 행복했다. 결국 '내가 행복하게 살고 봐야 되겠다'는 생각의 끝에는, '그 누구들의 얘기보다, 그 회사의 출입증보다, 안정적인 월급보다' 더 중요한 '나'의 인생이란 것이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나는 너무도 역설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이 되었더랬다.




천운이었는지 합격했던 나의 첫 직장을,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만두고 사직서를 제출하던 날, 처음으로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보면 소름 끼치고, 서슬 퍼런 자각이었다. 탈탈 소진된 연료를 채우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고, 여기저기 흠집난 몸체를 복구하는데 깨나 시간이 걸렸다. 냉각수를 갈고, 윤활유를 교체하고, 갈 곳을 환히 비추어줄 헤드라이트 전구를 다시 끼워 넣고 나서야, 다시 '마음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를 위한 선택을 하고, 내가 책임을 지는 삶을 살자. 오롯이 내가 원하고 즐거운 것에 나의 고민을 할애하자. 나 홀로 탑승한 내 인생이란 차 안에서, 운전대를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꺾을지, 지칠 때 한적한 곳에 들러 쉬어 갈지 말지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니까'.


다시 시동을 걸어 달려볼 준비가 되었을 때 고민 끝에 선택한 두 번째 직장에서 5년을 지내고, 또 다른 스타트업에서 1년을 보낸 뒤, 이제 나는 외국에서 일하고 있다. 때로 위태롭고, 때로 불안하지만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다.

 



지나고 보면, 혼자 운전대에 앉아 인생의 시동을 걸고, 액셀을 지그시 밟았다가, 차선을 바꾸고, 표지판을 확인하며 지시등을 켜는 것도 오로지 내 몫이었다. 달리고 달리다 보면 비포장도로도, 고속도로도, 해안도로도 나오더랬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 창문을 스윽 내려 손끝의 바람을 느끼는 여유가 있었던 때도 있었고, 어둠이 짙게 내깔린 길에서 비상등과 헤드라이트를 켜고도, 갑작스레 낭떠러지로 홀홀 떨어지는 게 아닌가 두려운 적도 있었다.


단, 내가 달리고 싶을 때 달리고, 쉴 때 쉴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묘한 안정감과 행복감을 주었다. 물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운전대를 틀었지만, 한적하고 낯선 길을 달리며 고요함을 느끼기도, 빽빽한 도심지를 기어가는 것 마냥 답답함을 느낀 적도 있다. 주차할 곳이 없어 막막하기도 했고, 불쑥 타이어가 터져, 더 나아갈 동력을 잃고 '내 인생이란 차'가 '주저앉아 버린' 적도 있었더랬다. 높은 턱을 넘다가 상처를 입은 적도 부지기수였음을 인정한다. 다만, 이게 결국 내가 원했던 인생의 '드라이브'였다는 걸, 하루하루 살면서 배워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대한민국의 그림 속에 불안한 존재다. 허나 생각해 보면, 현재를 살고 있는 그 어떤 누구도 '불안하지 않다'라고 쉽게 외칠 수 있는 호락한 세상이던가. 때로는, 지금도 열심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버티고 이겨내어 순간을 살아내고 있는 자랑스러운 친구들과, 대한민국의 모든 '그네'들에 비해, 더 큰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다고 고백한다. 문득 어리석게도, 내게 주어지지도 않은 '잘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덕에 몸서리가 쳐질 때도 있다.



한 번은 내 지난 궤적을 잘 알고 있는 친한 형이, 함께 술을 하다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혁아, 왜 너는 주위 사람들에게 점점 더 설명이 많이 필요한 선택을 하고 있니?'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리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최 설명할 길도 딱히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도 믿는다. 내 인생이고, 내 길이고, 내 선택이다. 선택에 대한 자유가 내게 있고, 자유에 대한 책임도 내게 있고, 그것을 감당할 용기와 의지도 내게 있다면, 진흙밭을 굴러도, 개똥밭에 뒹굴어도 내 선택이었기에 오롯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어엿한 성인이 되어 '인생 면허'를 딴 모두의 의무라고 믿는다.


찬란하든지, 빛바래든지 그 어떤 것도 '인생'이다. 각각의 도화지는 그 크기가 다르고, 물감이 다르고, 붓이 다르다면, 그 종착에 있는 그림의 빛깔과 분위기도 응당 다를 밖에 없다. 그림이란 것이, 창작자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된다고 하여, 창작 의도와 본질, 그 가치와 위대함까지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 내 그림의 의미와 가치가 언제까지나 선하고, 바르고, 당당한 것이라면, 설령 타인의 해석들이 천차만별일지라도 최소한 떳떳한 창작자가 될 수 있지 않겠나.




'대한민국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이 아닌, 서툴고 느리더라도 행복한 완주를 선택하고 있는 수많은 청춘들에게 그네들의 목적지와 속력이 다르다고 하여 비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나 역시, 꾸준히 기름칠하고 갈고닦으며 내 의지대로 나아가는 '나만의 드라이브'가, 설사 진흙길을 구르더라도 다시 흙을 잘 털어내고 달릴 수만 있다면, 흡족하고 행복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최근에 의미심장하게 보았던 두 편의 영화 속 대사를 나누어 본다. 먼저, 얼마 전 개봉했던 [파리로 가는 길(Paris Can Wait)]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브륄레, 행복한가요?"

"글쎄요.. 전 뭐.. 남편이나 아이와 크게 문제도 없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잖아요. 정말 이 순간 행복한가요?"

"......."


덧붙여, 2008년 개봉했던 [버킷리스트]라는 영화에는 이런 장면도 등장한다. 명배우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함께 했던 수작이어서 몇 번을 다시 보게 된 영화 중 하나다.

 

"자네,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답해 보게나."

"무슨 질문인데?"

"첫째, 자네는 지금 기쁜가? 둘째, 자네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적이 있는가?"

"......"


이 질문을 던졌던 카터(모건 프리먼 분)는, 시한부 인생의 벗이었던 에드워드(잭 니콜슨 분)에게 이런 유언을 남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지금 당장, 자네 인생의 기쁨을 찾아가게나".


내 선택을 오롯이 책임지고 있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 적어도 누구도 미루어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선택을 책임지는 용기를 키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에게 당당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누구나 '용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각기 다른 방향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도 모두에게 있다. 단,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내 책임이며, 그 결과물이 나의 인생임을 인정하고 버텨낼 '용기'가 있다면, 여러 번 흔들리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그 어떤 누구도 '불안하지 않다'라고 쉽게 외칠 수 있는 호락한 세상이던가. 하루하루 나를 지켜내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내 마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타인의 잣대로 용기를 묻어두는 사람에게, 행복은 영원히 그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고생길이 훤해도, 비록 찬란하지 않아도,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다행히도 '하얗게 불타오르지 않고', 그 마음을 매만질 수 있는 수 있는 힘과 여지가 조금이라도 내게 남아 있는 덕일 게다. 다시 적어 본다면, 적어도 버텨낼 용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무기라고 감히 고백한다.


부디 이 마음이 오래 변치 않도록, 주도적으로 기쁨을 찾아가는 인생을 만들어 가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 마지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아끼다 엿됐다 내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