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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Oct 20. 2017

나를 사랑하지 않던 나에게

27살, 시련이 내게 준 목소리와 그후의 십년.

2007년, 갑자기 등 한가운데 흉추가 부러졌다. 다만, 이유를 딱히 알수 없다고 했다. 그게 나를 이렇게 오래도록 힘들게 할줄, 그때는 몰랐다.




쉬는 날이라 직장 동료들을 불러 같이 음식을 해 먹으면서 쉬던 때로 기억한다. 한가롭게 TV를 보고 누워 있다가 일어서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욱"하는 소리를 내뱉고, 점점 어깨가 굳어가는 느낌이 들고 상반신이 저릿저릿하면서 식은 땀이 났다.


'왜지? 이런 이상한 느낌은?'


설마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에이.. 뭐 별일 있겠어?'라는 마음의 속삭임을 믿고 싶었다. 집에 놀러왔던 방송국 동료들 중 차가 있던 작가 누나가 근처 할인점에 들를 일이 있다고 하셔서 별 생각없이 따라나섰는데, 두세 시간 쇼핑을 따라 다니다 보니, 결국 거의 한쪽 팔을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버렸다.


"누나, 그냥 담이 든 걸로만 생각했는데 저 아무래도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전 병원에 좀 가볼게요".

"그래? 어떡하니. 알았어. 그럼 내가 데려다 줄게".


"선생님, 혹시 무슨 일인가요?"

"음.. 혹시 이전부터 어디가 좀 아프다던가, 증상이 있었다던가 하는 게 있으면 전부 말해보세요".

"어..잘은 모르겠지만, 한달 전쯤부터 발이 좀 전기 오듯이 저리다는 느낌이 있었긴 하고...제가 프리랜서로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는데, 평소에 좀 무리를 하긴 해요. 바빠서 잠을 잘 못자구요. 생방송 프로그램 작가로 일하고 있어서 하루에 6-7시간을 꼬박 한 자리에 앉아 원고를 쓰곤 하는데, 그러면 등이나 어깨가 항상 피곤하긴 하죠. 근데...무슨 일인가요?"

"자, 여기 엑스레이 보여요?"


믿기 힘들었다. 말인 즉슨, 등 한가운데의 흉추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서서히. 아마도 6개월 정도는 진행된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마치 세워 두었던 콜라캔을 발로 짓밟은 것처럼 등 한가운데 뼈가 주저 앉아 있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본인도 처음 보는 사례인지라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입원하세요".

"선생님, 저 그런데 집이 꽤 멀고 지금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혹시 집에 가서 쉬고 내일 와도 될까요?"

"지금 무슨 소리에요? 잘못 움직이다가 신경을 건드리면 못 걸을 수도 있어요. 지금 당장 입원하시고 보호자 부르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때 27살이었다. 시쳇말로 '철근을 씹어 먹어도 모자랄 나이의 청년'.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고, 꿈도 많은데. 대체 왜 내게. 라디오 PD가 꿈이었던지라 한창 방송작가로 내 인생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일을 하고 있던 때, 갑자기 찾아온 원인을 알 수 없었던 흉추 골절. 뼈가 거의 80%가 찌그러져 버린 상황이라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신경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그냥 안정을 취하면서 뼈를 그대로 굳혀야 할 수밖에 없다는 말.


병실을 찾은 물리치료사는 '누구랑 심하게 싸워서 발에 차이거나 맞은 적 있는지'를 물었고, 아니라는 나의 대답에 '그럼 혹시 등산이라도 가서 절벽 같은 곳에서 떨어지고 온 것인지'를 이어 물었다. 아마도 '잘못 움직이면 앞으로 하반신을 못 쓰게 될거라'는 그의 말에 침대맡을 지키시던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져내린 것 같았다.


"선생님, 우리 아들이 아직 어떻게 된 것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은 안정을 취하면 될거라고 하셨는데, 겁이 잔뜩나있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꼭 그렇게 얘기하실 필요가 있나요? 환자만 더 불안해지게". 어머니는 애써 서러움을 삼키고 있었다.


"아,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대체 가당키나 한 말인지.


병문안을 온 교회 분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형제를 사랑하시면, 더 굳건해 지라고 이런 시련을 주셨는가'라는 말을 했던 순간, 내 귀를 의심했더랬다.


'왜? 내가 무얼 잘못했는데? 대체 이 시련으로 내가 뭘 배워야 하는거지?'


억울하고 분했다. 왜 나인지,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짜로 사랑한다면 이런 일을 겪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던 그 한마디를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가슴 한켠이 저릿저릿하다. 너무 사랑하는 아들에게 준, 이유 모를 형벌이라.




부러진 뼈를 굳히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6개월을 집에 누워있었다. 숱한 MRI 촬영과 검사에도 결국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짙은 '두려움의 그늘'은 쉽사리 걷힐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평생 무거운 것을 들지 말것. 무리한 운동을 하지 말것. 움직일 때마다 앞으로 항상 조심할 것. 병원에 계속 들러 추적 검사를 받을 것 등등'. 향후 대응법은 있지만 사전 예방책은 없던, 한창 나이의 청년에게 내려진 가혹한 처방.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인간에게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무지', 즉 '알지 못함'일진대, 그렇게 찾아온 공포감 때문에 나는 끝없이 무너져내렸다. 이유를 알아야 더 심해지지 않게 하면서 조심할텐데, '도대체 왜?'라는 질문만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무지의 공포는 나를 극심하게 옭아맸다.


27살. 실수로 떨어뜨린 볼펜을 줍는 것도 까마득한 난제가 되고, 바로 앉아서 양말 한켤레를 신는 것도 막연한 두려움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버스를 타고 가다 자동차 방지턱을 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쿵'하고 내려 앉곤 했다. 한창때의 사내놈에게 '무거운 물건 좀 대신 들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는 것만큼 어려운 수수께끼도 없었다. 설령 누군가와 부딪힐 수 있을 만한 운동엔 모두 눈을 돌렸다. 실수로 다시 넘어지기라도 하면 또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싶고, 한창 나이에 좋아라들한다는 번지 점프, 수상 레져 스포츠 같은 것들은 앞으로 내 인생에 없는 걸로 여기는게 마음 편했다. 시도 때도 없이 식은 땀이 났고, 숨이 막혀오고, 죽을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10년을 앓게 된 공황장애의 시작.




그랬다.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등록금을 벌어가며 학교에 다녔던 시절, 라디오 PD가 꿈이었던 그때 나는 정말이지 미친듯이 나를 혹사시켰다. 과외나 아르바이트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프리랜서로 했던 라디오 조연출, 작가 시절, 학교를 다니며 이 모든 것들을 해내는 것이 내 자랑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8시에 있는 생방송을 해치우고, 다음날 방송 제작 회의가 끝나는 오전 10시반이 되면 밥도 거르고 학교에 부랴부랴 뛰어갔다. 학점을 채우기 위해 거의 매일 3교시부터 8교시까지 수업을 연속으로 듣고, 저녁을 대충 때우고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노트북을 펴들고 원고를 썼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서 졸다가 무릎을 꿇고 주저 앉은 적도 많고, 옆에 앉은 사람에게 고개를 연신 쳐박으며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졸아대냐'며 핀잔을 들은 적도 많다. 그렇게 두어시간쯤 걸려 집에 도착하면 앉은뱅이 책상을 펴고 앉아, 새벽 두세시까지 원고를 쓰고 다시 새벽 5시에 방송국에 출근하는 걸 되풀이했다. 꼬박 거의 2년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안 그러면 내 인생의 수레바퀴가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불안이 이끄는 인생'.


다만, 내 꿈을 위해 즐거운 일을 하며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 행운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만도 축복이라 생각했다. 항상 종종 걸음으로 뛰어다니며 밥을 거르고 잠을 못자도, 친구들보다 바쁘게 사는 것이 다행이고 자랑인것 같았다. 즐거운 일을 할수만 있다면 쉽사리 풀리지 않는 피곤함 정도는 영광의 상처처럼 여길 수 있다고 믿었다.


항상 온몸이 뭉친 것처럼 뻐근했고 고단했다. 매일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만큼 피곤하고 충분히 못 자곤 하니 '담이라도 들었나보다'라고 생각했다. 그저 열심히 사는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게 종국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여겼다. 내가 내 공부하자고, 먹고 살자고 이렇게까지 하는데 이런 시련을 겪는다는 것을 상상할 순 없었다. 아니, 이런 시련은 내 인생에 없었어야만 했다.


24시간 쉼없이, 아니지, 2년간 쉼없이 잔뜩 긴장했던 근육이 뼈를 잡아당겨 척추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마치 항시 몸을 많이 쓰는 운동선수들이 훈련 중에 발목이나 손목이 쉽게 부러지는 '피로골절'을 겪듯이, 긴장에 긴장만 반복하다가 단 한번도 이완되지 않았던 내 몸이, 지치고 지쳐서 내질렀던 '처절한 아우성'이라고 했다. 유연하게 흐늘거리는 대나무도, 오래도록 양쪽 끝에 고무줄을 묶어 놓으면 서서히 휘어지다 언젠가는 '댕강'하고 부러지듯, 내 몸 어딘가도 그렇게 부러진것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렇다. 나를 사랑했어야만 한다. 쉬게 해줬어야만 했다. 그렇게 혼자서 다 끌어안고 죽자고 애쓰지 않아도 살아나갈 수 있다고,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고, 정말 힘들면 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혹은 때로 실패해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여줄 줄 알았어야 했다.


정말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다. 너무 괴로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지치고 힘들었던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지 않았던 내게 되돌아온 형벌. 그때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다. 그냥 남들이 '대단하다'고 봐주는 '열정'과 '치열함' 속에 나를 가두고 나를 채찍질하는 철장 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다. 아무도 그 철장의 문을 잠그지 않았는데 내 스스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어리석은 죄. 그래, 어쩌면 정말 신께서 주신 선물일지도 모른다. '이제 제발 그만 내려 놓거라'하는 마지막, 절망의 메시지.


그때 내게 주어진 길이 '최선을 다해 치열하라'는 의무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 내가, 어쩌면 '내 스스로에게 준 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10년. 다행히 부러졌던 뼈는 오래 전에 굳었고, 그 세월만큼 마음은 좀더 단단해졌다. 이제는 이따금 좋아하는 운동도 크게 겁내지 않고 하고, 행여나 뼈가 다시 다칠까 걱정은 하지 않는다.



4,000일.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에 대한 인생의 뼈대를 곧추 세우는데 10년이 흘렀다. 너무 무리하지 않고 서서히 나아가는 법, 너무 애태우지 않고 뭉근히 기다리는 법. 너무 애쓰지 않고 적당히 포기하는 법. 그걸 처절하게 배우는 시간이 아마도 내겐 절실했던 것 같다. 열심히 달린만큼 쉬어가고, 비워낸 만큼 다시 채우고, 노력한만큼 보상을 줄 기회도 있어야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걸 제대로 깨닫는데 10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어찌 보면, 단 한번의 실패도 용인되지 않는 것 같은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실패와 절망을 겪으면서,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데 '값비싼 수업료를 낸 셈치자'고 나를 위로했던 시간. '나를 사랑하지 않던 나'에게 남은 메시지는, '내가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가르쳐 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끝없는 애정결핍'을 대체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 단순한 진리에 왜 우리는 너무 쉽게 눈을 감고 있는 걸까.



'쉼표'.


쉬어도 좋다. 내려 놓아도 좋다. 멈추어 물도 마시고, 땀도 닦으며, 하늘도 바라보자. 저무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고, 전혀 모르는 분야의 책도 읽어보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는 순간을 사랑해 보고, 한없이 늘어져 있는 시간도 즐겨보자.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가지 것들에도 관심을 가져보고, 때로는 모두 끊어내고 혼자있는 '멍때리는 시간'도 만끽해 보자. 정말이지, 그래도 된다. 어째서 우리는 '치열하게 사는 방법 밖'에 모른다는 걸 미덕으로 알고 달려왔을까.


인생은 절대로 전속력으로만 달릴 수 없기에. 무릎이 다치고, 발목이 꺾이고, 숨이 차오르면 더 이상 달릴 수 없기에. 마치 '쉼표'를 제때 찍지 않으면 엉망이 되고 한껏 어지러워지는 문장처럼, 나를 사랑하다는 메시지를 이제라도 내 마음 속에 천천히, 꾹꾹 눌러 쓰자. 끝없는 긴장과 절박함만 있는 삶은 언젠가 부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새겨야 한다.


내 인생의 다음 단락도, 그 다음 단락도 그 펜을 쥐고 있는 나만이 더 써나갈 수 있으므로. 인생의 마지막 단락을 쓸때쯤, '나를 사랑하는 게으른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서 쉬어 왔어도 '나는 마침내 여기에 왔다'는 마침표를 뿌듯이 찍을 수 있도록, 나를 온전히 사랑하며 쉬어 가자.


설사 엉망으로 써나가다가 이내 지워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그게 인생이다. 지우개로 지운다한들 자국은 남을 수 있어도, 그 흐릿한 흔적이 글 전체를 망치지는 않는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내 마음에 더 귀를 기울이자. 지친 마음을 위해 충분히 쉬어가자. 그게 내 인생에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이자 예의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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