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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Dec 03. 2018

평균과 보통

남들처럼, 남들만큼, 남들보다 잘 사는게 그렇게 중요한가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연봉',

'한국인 1년 해외여행 횟수'

'우리나라 사람들, 동남아 여행시 쓰는 금액 ***원'

하루에도 몇번씩 보게 되는 뉴스 기사들이고, 그 밑엔 어김없이 '나는 평균도 아닌가보다.', '도대체 기레기는 어디서 이 숫자를 가져왔나', '남의 나라 이야기', '나한테는 해당이 되는게 하나도 없네, 죽어야 하나', '이번 생은 망했다' 등, 뻔히 예상되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린다.



평균값을 훨씬 상회하기 때문에 나는 행복할 수 있는가. 평균에 가깝지 못해, 평균보다 한참 떨어지기 때문에 나는 불행한 사람인가.

낚시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밥을 먹던 캄보디아 아이. 의젓하고 예쁜 이 아이의 등 뒤에서라도, 전세계 평균 GDP도 안되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며 함부로 불행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아프리카 애들 생각해봐라. 며칠동안 밥 한끼도 제대로 못 먹지 않니?"

"동남아시아 어디 산골 애들은 4-5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다닌대."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 나는 나보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하고 비교해서 행복을 느끼고 싶진 않아. 나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태어났고, 며칠동안 밥한끼 못 먹는 환경에서 사는 아이가 아니야. 아직 성인이 아닌 내가 정말 며칠 동안 밥 한끼도 못 먹는다면 그건 우리 집, 우리 사회 시스템의 문제잖아. 그리고 학교가 이렇게 널린 수도권에 살면서, 매일 4-5시간 안 걸어다닌다고 상대적으로 행복할 건 뭐야?"


때때로 아빠랑 충돌이 있거나 큰 서운함, 실망감을 느낄때마다 엄마는 또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도 니 아빠는 정말 나은 거야. 너희를 때리진 않잖아? 니네한테 상스럽게 욕을 하지도 않고. 술담배도 끊었지 않니?"

"그저께 저 앞동 아저씨는 밤새 가족들을 다 때려서 이웃 주민들이 신고도 하고 한밤중에 경찰이 왔었대. 우리집은 그런 일은 없지 않니?"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엄마. 난 별 이유없이 그런 대우를 당하고 싶지도 않고, 나중에 내 자식을 때리거나 상스럽게 욕을 해대고 싶지도 않아. 만약 아빠가 엄마가 생각하는 모든 나쁜 짓을 다 하는 사람이라면, 난 그땐 누구랑 비교해서 '이 정도면 괜찮다'고 위안 받아야 되는 거야? 아빠가 마냥 건강하다고 좋아해야 해? 아님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좋아해야 해? 내 입맛에 맞는 비교 대상을 찾지 못하는 이상, 그런건 끝도 없는 얘기야"




세상이 말하는 '평균이라는 것'이, 정말 나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나아가, 삶의 모든 것이 평균 이상인 사람이 있을까?


모든걸 평균으로 비교하자면, 마른 사람은 살이 안 쪄서 짜증, 살찐 사람은 살이 안 빠져서 짜증, 키 작은 사람은 키 작은대로, 키가 너무 커서 불편한 사람은 큰대로 불편하다. 평균인 사람들도 더 날씬해지거나, 더 키카 크고 싶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아이가 많은 사람은 생활비 걱정에 짜증, 아이가 적은 사람은 남들 쉽게 갖는다는 아이도 더 못 가져 짜증, 연봉이 적은 사람은 오르지 않는 연봉을 생각하며 짜증, 차가 한 대인 사람은 차가 두 대인 사람들이 고속도로를 전세 내고 주차장을 독차지한다고 짜증, 모두가 짜증, 또 짜증일 뿐이다.

최근 몇달간 들었던 웃음소리 중, 가장 행복한 웃음소리를 가졌던 캄보디아의 해맑은 아이들.


나는 세상이 평균이라고 말하는 집값의 10분의 1도 가지지 못했다. 당연히 지금 내가 가진 집도 없다. 전세가 4-5억이니, 집값이 8-10억이니, 강남 한복판은 30-40억이 있어도 집을 사기 어렵다느니 하는 얘기들에 별로 관심이 없다. 반드시 내 집을 가져야 하나 라는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망할 집을 갖기 위해 수반되는 아등바등한 삶을 포기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세상이 평균이라고 말하는 내 나이의 연봉을 5분의 1도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나는 지금, 이렇다고 내세울 직업이 없다. 그치만 괜찮다. 즐거운 일들을 하며,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 이보다 10배의 연봉을 받았던 예전에도, 지금보다 더 행복하진 않았다.


나는 세상이 평균이라고 말하는 평균만큼 운동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운동을 잘하는 친구들이 농구 회동, 축구 모임에서 날 부르는 적은 한번도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심심하고 외롭다거나, 고독에 지쳐 불행을 느껴 본적은 없다. 나름 잘하는, 좋아하는 취미가 있고, 혼자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친구들을 영원히 못 만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세상이 평균이라고 하는 신차 구매 사이클에 별 관심이 없다. 내 차가 아직 꽤 쓸모 있기도 하거니와, 굳이 신차로 계속 차를 바꿔줘야 하는 욕구를 크게 못 느끼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30대 후반의 남자라면, ***장 직급 이상의 명함을 가져야 하고, ***브랜드의 외제차를 가져야 할까. *년에 한번씩은 차를 바꿔 줄 정도는 되어야 하나. 평균 이상의 동안 구형 모델을 계속 타는 건, 없어 보이고, 부끄럽고, 못나 보이는 일일까.


나는 평균이란 나이에 결혼하거나 아이를 갖지도 못했다. 그래서 눈치가 보이거나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외롭지도, 우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나가며 눈에 띄는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 내 조카들은 정말 천사들 같다. 그치만 내 아이를 가져야 하나의 문제에선 아직 답을 못 내렸다. 그런 상태로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 내가 한 생명을 낳고 기를 정도의 좋은 그릇이 되나, 한 집안의 가장이 될 마음의 준비를 잘하고 있나, 그런 근원적인 고민을 아직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행복을 어디서 찾고 있나.


평균이 어떤 정답으로 간주되는 사회인지라, 그 평균대로 살지 못해 불행하다면, 평균 결혼연령에 결혼하지 못했고, 제때 아이를 갖지도 못했으니 나는 망한 인생인가. 누군가는 내 정자 걱정을 하고도 남을 나이가 됐는데. 그 정답대로라면 나는 이미 '한참 틀린 답'이라, 아마 '고독사'하지 않을까 매일 걱정해야 하고, 등이 간지러울 때마다 마누라가 내 등을 긁어 줄수도 없구나, 나이가 들어 돈을 못 버는데 자식들이 나에게 용돈을 주지 않으면 어쩌지, 누구네 김영감은 한달에 100만원을 받니, 박여사는 200만원을 받니하며, 박여사가 더 행복할 거라며 푸념을 늘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 것들에 집착하고 싶지 않다. 그 따위 것들 때문에 불행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냥 내 삶을 내가 원하는대로 이끌어가고 만들어나갈 방식에 집착하고 싶지, 평균의 삶에 못 미치기 때문에 구태여 나를 불행한 사람으로 억지로 몰고 가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평균이라는 기준에 집착해서 모두가 '나만 평균 이상이어야 한다면', 그렇게 올라가 버린 전체 평균에 부합되지 못한 사람은 또 다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하고, '너는 나보다 훨씬 못 났으니 널 보고 행복할게', '남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이게 뭐람?'의 트랩에 갇혀야 하는 걸까. 그러면 평균 위의 반은 언제나 행복하고 그 아래 반은 언제나 행복할 수  없는 건가? 평균 이하의 삶도 행복할 수 있고, 평균을 훌쩍 넘는 행복할 것만 같은 사람도 불행할 수 있다.


캄보디아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들. 이 아이들이 이런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며 놀아야 해서 불행할까. 나는 그걸 평가할 자격과 권리가 없다.


모든게 평균 이상인 사람은 진짜 행복할까? 그리고 모든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모든게 불행하기만 할까? 우리가 무언갈 보지 못하고 있는건 아닐까?


우리가 보고 있는 건 결국 가진 돈, 어떤 횟수, 산술적으로 뽑아 낸 숫자, 소유... 이런 것들인거라 그런게 아닐까? 그걸 비교만 하는게, 결국 24시간 잠들지 않는 불행 발전소 아닐까?




평균이라는 게 아예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앞서 쓴 것처럼 "어떤 값들의 집합의 적절한 특징을 나타내거나 요약하는 것"의 평균은, 그 속성으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평균에 '집착하는 태도', '평균에 비교해 행복을 재는 어리석은 방식'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 삶의 기준, 내 행복의 잣대, 내 아름다움의 속성들은 내 것이다. 게다가 나의 삶이, 세상이 말하는 온갖 '평균'에 미치지 못하거나, 어떤 것이 특별히 다르거나, 보통의 범주를 크게 벗어난다고 해서 크게 좋아하거나, 크게 낙담할 것도 없다.


애초에 삶이란 오디션, 콘테스트, 선발대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당신의 삶의 심사위원은 누구란 말인가. 누가 뽑았나. 평생 심사위원 앞에서 오들오들, 바들바들 떨면서 긴장하고 움츠러들어 살고 싶은가. 남의 눈치만, 남의 기준만 보면서.




평균에 못 미친다는 걸 '참조할' 숫자로 생각할 순 있지만, 그게 '나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될 수 없다. 평균이 아니라서 우울을 느끼고 살 가치가 없는게 맞다면, 평균보다 낮은 숫자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우울해야 하나, 정말 죽어야 하나. 평균에도 못 미치는 삶이라 살 가치가 없나. 그게 자신의 친구고 가족이라면 그런 말을 함부로 꺼내지도 못 할거면서, 왜 세상에서 제일 아끼고 사랑해야 할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고, 그런 잣대를 갖다 대는 건가.


충실히, 잘 살면 된다. 내 기준으로 내 나름대로. 뭘 비교만 하다가, 평생 우울감에 빠져 죽을 것인가. 죽을 때 유언으로 "옆집 김씨네 집이 훨씬 넓었다는게 내 평생 한이었다", "중학교 때 못살던 친구가 말년에 벤츠를 사서 속상해 죽을뻔 했다"라는 병신같은 소리를 하고 죽을건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서, 너를 아끼지 못해서, 좋아하는만큼 표현하지 못해서, 용기내지 못해서, 도전하지 못해서,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라는 목소리가, 이 장면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BGM 아닌가?


그렇다면 그 BGM으로 행복하고 충만한 음악을 선곡할 수 있도록,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 표현하고, 용기내고, 도전하는데에, 나를 사랑하는데에 집중하며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당신의 "My Life"라는 이름의 쥬크박스에 동전을 넣은 건 당신이다. 다른 사람이, 타인의 기준이, 그 빌어먹을 평균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태도가, 앞으로의 당신 인생 모든 순간에 '레퀴엠' 틀게 하는건 바보 같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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