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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Feb 13. 2019

10. 열심히 실패해야 하는 이유

실패가 주는 나만의 의미 찾기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의 일이다. 9일 동안 3천 킬로미터를 달려나가는 링로드 트립의 첫날. 눈앞에 펼쳐지는 낯선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지만, 초행길이라는 점, 구불구불한 산악 지형이 강과 계곡을 품고 이어지는 도로는 시작부터 왠지 나를 긴장시켰다.

화창한 하늘을 보며 달리던 즐거움도 잠시, 이내 어둑어둑해지면서 눈이 내렸다. "와, 눈이다"라고 반가워하기도 무섭게 와이퍼가 한껏 무겁게 느껴지고, 두텁게 쌓인 눈 때문에 자동차 핸들이 이리저리 돌아간다. 바퀴가 자꾸 밀려 한시도 방심할 수 없다. 상향등을 켰는데도 캄캄한 어둠빼곤 보이는게 없다. 시속은 10킬로로 떨어졌다. 앞뒤로 차가 한대도 없다. 우리가 혹시 사고라도 나면, 누가 우릴 구하러 올수 있을까. 아니, 사고가 났다는 걸 알기라도 할까.

어느새 도로와 도로가 아닌 곳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뒤덮였다. 큰일이 나고 말겠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옥죄어 왔다. 숨이 가빠지고, 미친듯이 식은 땀이 났다. 대체 어떤 상황인지, 앞에, 밑에, 뭐가 있는지 알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역설적으로 반짝이는 태산같은 눈더미는 두려움과 절망 그 자체였다.


'단 한순간이라도 미끄러지면 이대로 죽는다.'

그랬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길이 어딘지조차 식별이 안되는 상황에, 추위와 배고픔, 공포감, 아무도 없는 도로.. 이런 것들이 한데 뒤섞인 탓이다. 바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느낌에서 오는 '무지의 공포'였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은 얼마나 두려운가. 덩치를 가늠할 수 없는 개들이 깜깜한 밤 으르렁 대는 소리를 내고 있다면 얼마나 등골이 오싹한가. 당최 몇개일지 모르는 스산한 발자국이 밤길을 따라 나와 가까워진다면 또 어떤가.  



실체를 모르는 것은 두렵다. 너나할것 없이 예외는 없다. 안대로 눈을 가린 사람에게 젤리가 들어있는 상자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면, 말캉한 젤리가 손에 닿는 순간, 너나없이 비명을 지르고 뒤로 나자빠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대상에 대한 무지가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알수 없는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

"낭떠러지가 있으면 어떡하지"
"눈덮인 저쪽이 혹시 계곡이면 어떡하지"
"핸들을 잘못 꺾어 미끄러지다 절벽쪽으로 가면 어떡하지"

이것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우리가 '실패'를 마주하는 가혹하고 처연한 방식이다. 한번 미끄러지면, 죽는다. 가차 없이. 죽지 않는다는 걸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죽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죽을 상황인지 아무도 모르면서 그게 끝이라 여긴다. 끝. 마지막. 절망. 나락. 고통의 심연.  



실패란 누구에게나 반드시 따라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에 크게 겁을 먹고, 쉽게 좌절한다. 실패도 아닌 것들에 전전긍긍하거나 타인의 눈치를 보며 어디론가 숨고 싶어한다. 대체 왜 그런 걸까.

첫째, 애초에 삶에 실패를 허용하면 안된다 배웠고, 둘째, 그렇기에 죽을 힘을 다해 실패를 회피하려고만 했다. 셋째,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알고 있다 말하면서도, 실패를 부끄러워한다. 넷째, 작은 것들에도 실패라는 강박적 낙인을 찍는다. 다섯째, 내가 아닌 남들이 실패라 규정하는 것들에 의외로 쉽게 압도된다.

수능 시험을 망쳤다고 해서 인생 실패는 아니다.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못땄다고 해서 실패도 아니다. 20년 전 중간고사 윤리문제에 뭐가 나왔었건간에, 그런 것들은 어제, 오늘, 내일의 일들에 전혀 의미가없다. 울고 불고 난리쳤던 그 모든 일들이 이제는 기억에도 없다. 대체 그걸 누가 기억할까. 설령 그걸 누가 기억한다한들,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10년전 악바리 같이 공부하고 졸업한 대학교 학점이 얼마였는지 이제 아무도 묻지 않는다. 마치 내 평생의 남은 날들을 쥐어짜며 흔들어 버릴거 같았던 대학교 이름조차도 이제 그 누구도 묻지 않는다. 내 인생에 무엇보다 중요한 거라 여겼던 것들 모두, 이제 흐릿하다. 10년, 20년이 더 지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더 흐릿해 흔적조차 남지 않을지 모를 일이다.


과연 당신에게 실패란 무엇인가. 무엇이, 어떻게, 왜 어떤 이유로 실패인가? 이걸 잘 생각해야 한다. 남이 결정해 줄 일이 아니다. 실패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불필요하고 강박적인 우울, 좌절, 불안, 스트레스 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에게 '의미없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정작 우리의 진짜 문제는 자신에게 실패가 무슨 의미인지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패가 무엇인지 규정을 내려본 적이 별로 없다. 실패를 너무 확대해석하곤 한다. 굳이 실패가 아니어도 되는 것을 실패라 여긴다. 남이 실패라 말하는 것들에 이내 의기소침해지고 풀이 죽고 만다.  

그래서 음식 메뉴 하나 고르는게 너무 힘들고, 종일 헤매도 그럴대로 좋을 여행지에서, 어떤 길을 거쳐 어디로 가야 좋은건지 발을 떼지 못한다. 완벽을 바라는 사회, 남에게 들이대는 너무 높은 잣대에 숨막혀 하면서, 비난이 두려워 시도하려 들지 않는다.



안 먹어본 메뉴를 골라 생각보다 맛없는 음식을 먹게 된 것이 실패인가. 그것은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는 새로운 경험이다. 길을 잘못 들어 돌아가야 하는 게 실패인가. 그것은 색다른 풍경을 경험할 수 있는 모험이다. 세상 그 누가 매일 최고의 음식만 먹고 가장 빠른 길로 가장 멋진 풍경만 보고 살겠는가. 단언컨대, 그런 사람은 절대 없다.

독서를 결심하고 책을 읽다가 단 두장을 넘기고 지쳐 버린게 실패인가. 그냥 재미없는 책이라 여겨도 된다. 나와 궁합이 별로인 장르일수도, 그날따라 그 책을 읽을 분위기나 컨디션이 아니었을수도 있다. 반드시 수불석권으로 책을 몰아쳐 다 읽어내야만이 독서는 아니다. 오늘 두장, 내일 네장, 모레 세장을 읽는게 책을 아예 안 읽는거보단 낫다.

토핑이나 가니쉬에 와인 페어링까지 해야만 훌륭한 요리인가. 요리를 하다 좀 태워먹으면 그건 실패인가. 재료 손질만 해도 요리는 요리다. 줄넘기 2단 뛰기를 굳이 못해도 줄넘기는 줄넘기다. 걸리고 넘어지고 또 뛰는 그 과정을 순수하게 즐기는 게 낫다. 줄넘기에 세번 걸렸다고 해서 나는 줄넘기를 못하는 사람이란 낙인을 찍지 않아도 된다. 그건 나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다.

남이 안 봤다고 비난하는 영화를 언젠간 반드시 나도 봐야 하는가. 그래야만 나는 소위 말하는 '인싸'인가. 내 가치가 올라가기라도 하나. 그렇게 쫓기듯, 밀리듯, 눈치보듯 인싸가 되면 좋나. 그럼 뭐가 있기나 한가. 남이 가지 말라고 말하는 여행지에 갔던 건 과연 시간 낭비였을까. 먹어보지 않았다고 남이 무시하는 음식을, 내가 알러지가 있어도, 별로 궁금하지 않아도, 먹고 싶지 않아도 꼭 먹어야 하나. 그런 병신같은 소리는 집어치우는 것이 좋다. 동네 뒷산을 걸어도 내가 행복했던 산책이 좋은 산책이자, 좋은 여행이다.




나만의 실패를 스스로 규정하라. 우리 사회에 유난히 '결정장애', '선택장애'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마음 놓고 편하게 뭔가를 내 마음대로 결정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선택이 어려운 게 대체 왜 '장애'여야 하는가. 대안이 많으면 고르기 힘든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굳이 왜 '장애'라는 말까지 붙여야 하는가.

왜 꼭 '잘' 골라야 하는가. 왜 잘못 고르면 안되는가. 왜 선택에 실패하면 안되는가. 왜 눈치를 봐야 하는가. 왜 남에게 물어봐야 하는가. 왜 꼭 모든걸 타인에게 확인해야 하는가. 왜 그렇게 물어보고 또 확인하고, 주어진 길만 가야 하는가. 왜 남이 가라는 길로만 가야 하는가. 왜 대체 실패하면 안되는가. 왜 돌아가면 안되는가. 왜 쉬어가면 안되는가.

'그래도 된다'를 왜 남이 알려줘야 안심하는가. 왜 스스로 그러면 안되는가. 왜 스스로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가. 왜 '그래도 된다'고 스스로 다독거릴 수 없는가. 그래도 된다. 그래도 된다. 그래도 된다.  


실패하면 안되는 인생으로 알아서 그렇다. 두렵다. 막막하다. 실패해도 된다는 걸, 실패해도 사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실패해도 세상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는 걸, 그런대로 안전하다는 걸 느껴본 적이 없어서, 두려운 것이다. 실패가 막상 별거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만, 실패해도 괜찮다는 안심이 든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목소리가 아닌, 제대로 된 고민과 자기반성에서 피어나는 힘으로 인생을 밀고 나갈 수 있다.

지금 나만의 실패를 규정해보자. 그리고 실패라고 여기지 않아도 될것들에 더 이상 조급해하거나 연연하지 말자. 부끄러워도 말자. 그런 조급한 마음은 알게 모르게 서서히 내 마음에 금을 내면서, 언젠가 정말 중요한 순간, 내 발목을 잡고 만다. 깨진 향수병처럼 향기가 다 날아간 쓸모 없는 나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진짜 실패는 지금부터 오직 나만이 결정한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어서, 더 빨리, 더 많이 실패하자. 더 구르고 넘어져 맷집을 키우고 단단해질 힘을 갖자. 실패를 제대로 알고 괜히 두려워 말자.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안하는 삶보다 열심히 실패하는 게 더 좋은 삶이다. 까딱 잘못하면 나락으로 뒹굴고말거란 안절부절한 마음으로는 하루도, 한순간도 행복할 수 없다. 자신과 타인을 위한 좋은 마음도 품을수 없다. 그런 인생에 여유가 스며들지 못하는건 당연하다. 그렇게 여유가 스미지 않는 삶에선, 회복탄력성도 움트지 못한다.


열심히 실패해본 사람이 열심히 일어날 줄도 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더 많이 실패해 본 경험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스타트업에서 원하는 인재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해도 다시 방법을 찾고, 분연히 일어나는 사람, 그래서 결국 언젠가 문제를 해결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서 열심히 실패하자. 겁내지 말고 더욱 열심히 실패를 끌어안자. 우리 너무 자신에게 가혹하지 말자. 겁먹지 말고, 깨지고 부딪히고 알아가자. 고인 물처럼 그 자리에서 썩어가는 청춘보다, 바위든 이끼든 부딪혀 가며 쉴새없이 흘러가는 물이 더 살아있으므로.  


아이슬란드의 눈오던 링로드의 길, 그날, 절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이 녹은 뒤 다시 찾아가게 된 길은, 잡초가 듬성듬성 자라고, 동글동글한 자갈만 널려있던, 아주 완만하고 너른 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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