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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아 Sep 20. 2019

<4화>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몸이 아니라 뇌에서 쥐가 나는구나

드디어 1회 무료체험 수업이 시작됐다. 선생님은 44 사이즈도 안 돼 보이는 늘씬한 몸매에 허리까지 치렁치렁한 긴 머리의 매력적인 20대 여자 선생님이었다. 잘록한 허리가 드러나는 딱 붙는 크롭탑 상의에 넉넉한 트레이닝팬츠, 엄청나게 큰 링 귀걸이... 힙합 느낌의 멋스러움이 흘러넘쳤다. 


"오늘은 카드(KARD)의 밤밤(Bomb Bomb)을 할 거예요. 카드 아시는 분?"

중 2 여학생과 20대 남자, 20대 여자 회사원. 나 빼고 셋 밖에 안 되는 수강생들은 '엥?' 하는 표정이었다. 


앗, 나는 아는데!

"저... 저요. 혼성 그룹이잖아요? 해외에서 인기 많은..." 


'카드'는 남자 둘, 여자 둘로 이루어진 4인조 혼성 그룹이다. 걸그룹, 보이그룹으로 딱 나뉘어 있는 케이팝 컬처에서 아이돌로서는 유일한 혼성그룹이다.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이 그룹을 아는 건, 내가 열혈 아미(방탄소년단 팬덤)이기 때문이다. 해외발 BTS 관련 뉴스를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 빌보드 뉴스 같은 데서 이 그룹을 방탄을 이을 실력 있는 케이팝 그룹 중 하나로 꼽은 데다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에서 특히 인기가 어마어마하다고 해서 도대체 누구길래, 하면서 찾아본 적이 있다.   


앗싸. 번지수를 잘못 찾아 들어온 눈치 없는 아줌마는 아니라는 증거를 살짝 보여줬다! 스스로 자격지심에 '나 그렇게 경우 없는 아줌마는 아니에요' 하는 마음이었는데, 출발이 좋다.


수업이 시작되니 제일 먼저 몸 풀기를 한다. 그것도 60분 수업에 1/3인 20분이나 투자해 골고루 정성껏. 이건 필라테스 수업에서 매일같이 하던 동작들인데? 나는 2년에 걸쳐 주 3회 이상 필라테스를 꾸준히 하고 있었는 데다 그 센터에서는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는 에이스다. 젊은 수강생들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힘들어하는 동작도 선생님이 설정한 개수만큼 못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앗싸 2. 다시 한번 내가 수업을 따라갈 수 없는 몸 상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왜? 왜? 왜?

바로 선생님이 눈앞에서 보여준 동작이, 몇 초만에 머리에서 휘발돼 버리는 건데?

조금 전에 반복해 익힌 동작 세 개를 앞서 익힌 동작 세 개에 이어봤을 뿐인데, 왜 앞서 익힌 동작이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충분히 반복 연습했으니 음악에 맞춰 똑같이 그 동작을 하면 되는데 왜 다시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건데?


초집중하고 있는데도 동작들은 체에 받힌 가루처럼 스르륵스르륵 머릿속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사라지려 하는 동작을 붙드느라 머리에서 쥐가 났다. 머리에서 자, 왼팔은 이렇게, 오른팔은 이렇게, 이때 오른 다리는 여기에, 왼 다리는 저기에... 하면서 명령을 보내는 와중에 박자는 이미 저-만치 지나갔다. 이어지는 진도에 RAM이 부족한 뇌가 과열되고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내 머리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환영이 보였다.  


예상한 것이어서 절망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한 동작 한 동작 사이에 버퍼링이 걸려서 그렇지, 중간에 멍하니 서 있거나 혼자 허수아비같이 어버버한 동작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수강생들도 각자 안무 익히기에 바빠 나 따위에 시선을 줄 여유도 없었다. 다만 나 스스로, 방금 전에 집중해서 보고 여러 번 따라한 동작을 깜짝할 새에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어이가 없고 열불 터졌을 뿐이다. 


K-pop 댄스를 처음 배워보는 것도 아니었다. 4년 전 헬스장 G.X(단체 운동) 프로그램으로도, 더 전에 구청 문화센터에서도 몇 개월씩 배운 적이 있다. 그런데 몇 년 새 차원이 달라졌다. K-pop의 비트는 훨씬 빨라졌고, 안무는 훨씬 더 복잡해졌다. 물론,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화센터 취미 클래스와, 전공 희망자들이 득시글한 댄스 학원에서 요구하는 수준도 다를 것이다. 


"괜찮은데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수업 말미에 선생님이 전체를 돌아보면서 흡족해했다. 나를 집어서 얘기한 것이 아니라 그냥 수강생 네 명이 얼추 그날 분량의 안무를 잘 따라왔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 말은 나를 겨냥해 '걱정한 것 치고는 잘 따라왔다'는 말로 들렸다. 나는 한껏 업돼서, 바로 3개월 등록을 마치고 집으로 날 듯이 돌아왔다. 


하지만 다음 수업에서, 우려하던 바가 현실이 되었다. 지난 시간 배운 것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뮤비와 무대 영상을 몇 번 보고 왔는데, 춤 동작은 너무나 빠르게 휘리리 지나가고 카메라 앵글도 자꾸 바뀌어서 도움이 되질 않았다. 나는 더욱더 심하게 버퍼링이 걸렸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기억 위에 올려놓지도 못한 채 소화시키지 못할 새로운 동작들이 꾸역꾸역 얹혔다. 나는 입술이 말라서 자꾸 침을 묻히고 중간중간 숨을 몰아 쉬었다. 뇌가 내 사지에 온갖 명령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숨 쉬라는 명령을 내릴 새가 없었나 보다. 


안 되겠다 싶었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그날 배운 안무를 깡그리 지워버리기 전에 잽싸게 기록해 두어야 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안무 노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기억을 되살려 '졸라맨'으로 그림을 그렸다..... 크....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방식인가. 사실 나는 초반에 이게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걸 깨닫지도 못했다. 유튜브에 일반인이 안무를 따라 출 수 있도록 <안무연습 거울모드>(안무연습 영상을 좌우 반전시켜 놓아야 보이는 대로 따라 할 수 있어서 익히기 쉽다.)가 있으며, 느린 배속으로 설정해 놓고 연습하면 된다는 딸의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요즘 아이들은 춤을 특별히 안 배워도, 그런 건 상식적으로 다 아는가 보다.   

너무 웃기면서 짠한 내 첫 안무 노트. 끙끙 앓으며 애쓴 티가 역력하다. 

세븐틴의 <Home>, 블랙핑크의 <Kill This Love>... 한 주 한 주 최신 인기곡 안무를 배우는 것이 너무 재밌고, 길거리에서 그 노래들이 들리면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리듬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 불안감과 부담감이 매일 나를 압박했다. 앞으로 주 3회, 거의 격일로 새로운 몸동작을 배우고 외워야 한다. 얼마만큼 배워야 좀 편안하게 따라 하고, 다른 일 하면서도 안무 까먹을까 안절부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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