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생, 외국인과 교포, 어른과 어린이
요즘 학원 문을 열면 긴장감이 홱 끼친다. 힙합이며 재즈 같은 것을 배우기 위해 학생들로 바글대던 룸에서는 평소와 달리 무서워 보이는 선생님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가운데, 한없이 긴장해 서 있는 학생의 뒷모습이 보이고, 뭔가 문답을 주고받은 뒤 제출한 CD를 틀고 준비한 춤을 선보인다. 평소에도 '월말평가' 때면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지만, 모의 면접과 모의 실기시험이니만큼 공기의 질이 달랐다. 비좁은 복도에서 대기하는 아이들은 이어폰을 끼고 수없이 연습한 안무를 최종 점검했다.
<실용무용과> 입시는 수능과 관계없이 선발하기 때문에 훨씬 일찍 시작한다. 대부분 10월에 실기를 치르는데 심지어 9월에 선발하는 곳도 있다. 대학교 실용무용과 계열은 정통 학문이 아니라 평생교육원이나 학점은행제로 선발한다. 포토그래퍼인 나도 학점은행제 출신이다. 4년제 대학 인문대를 나와 사회생활을 하다가 늦깎이로 학점은행제 사진학과를 다시 다녔다. 그래서 학점은행제 관리가 '의외로' 빡빡하고 얼마나 엄격하게 관리되는지 안다. 혹시나 학점은행제를 우습게 볼까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오랜 연구를 통한 정식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한 실용 계열이어서 그렇지, 전공자들의 진지함은 일반 학제 대학생과 다를 것이 없다.
댄스학원의 중심은 아무래도 춤으로 진로를 결심하고 입시를 준비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취미반(미래를 결정하기 전에 일단 소질이 있나 확인해보려는 아이들, 순수 취미인 아이들, 20대 이상의 성인이나 어린이들) 숫자를 다 합치면 입시준비생보다 많다. 하지만 입시(오디션) 준비생들은 진지하게 오래 다니면서 고액의 수강료를 내고, 그들의 예고 및 대학 진학 실적이나 연예기획사 연습생으로 뽑혀 들어가 데뷔한 실적이 댄스학원의 명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이라 중심축은 그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입시는 실기 70%, 면접(인성, 태도, 전공이해도 평가) 30% 전후라서 학교 성적은 안 들어가기 때문에 열심히 춤에만 올인한다. 성실성을 보여주는 학교 출석은 중요하지만 국영수 같은 공부는 내려놓았다고 보면 된다.
이런 정황이면, '꼰대'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헛바람만 들어서!'
'부모 속 썩이면서 놀기만 하다가 갈 대학이 없으니까 그런 걸로 간다고 하는구나!'
'성공하는 아이돌은 극소수인데 너도나도 달려들어서...'
'순 날라리들이라 나쁜 물이나 들 거야.'
짙은 화장과 피어싱, 염색, 한껏 멋 부린 힙합 패션을 한 청소년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오 노.
내가 학원에서 본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일반 중고등학생들보다 더 소박했다. 요즘 여학생들 다 하는 메이크업도 거의 안 한다. 평범한 티셔츠에 트레이닝팬츠 차림, 성격들도 대체로 내성적이고 자기들끼리 탈의실 같은데 있어도 욕설을 들은 적이 없다. 평범한 중고딩 서넛이 탄 버스에서는 항상 들을 수 있던 그 흔한 요즘 애들 욕설을. 실기시험 볼 때 화장, 염색, 타투 등이 엄격히 금지된다던데, 그것이 영향을 끼친 것일까?
또한 정말 진지하게 '춤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다. 학교 수업시간에는 딴짓을 할 수 있지만 매 순간 몸을 움직여야 하는 춤과 음악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집중하지 못하면 바로 멈춰설 수밖에 없다. 어정쩡한 동작은 거울로 통유리 창으로 모두에게 보인다. 열심일 수밖에 없다. 이른바 '공부는 1도 안 하는 날라리'들은 학원에 등록만 하고 안 나오는 거지, 학원에 모습을 드러낸 아이들은 다들 진지하고 성실하다.
희한하게 취미반을 찾는 20대 남녀들도 유사한 성격이 나타난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성인이고 한참 멋 부릴 때인데, 그리고 온몸으로 과감히 표현해야 하는데, 스타일이 정말 평범하다. 그저 레깅스에(참고로 10대 아이들은 레깅스를 안 입는다.) 티셔츠를 입고, 한 듯 안 한 듯 평범한 메이크업과 작은 액세서리를 한다.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래도 대부분 회사원들이라 퇴근하고 옷만 갈아입어서 그런 것 같다. 성격도 대부분 조용해서 선생님이 뭘 물어도 시원스레 답하지 않거나 작게 얼버무리기 일쑤다. 활기찬 성격의 사람이 들어와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러다 보니 함께 조용해지곤 한다. 어쩜 20대 이상의 진짜 끼 있는 친구들은 학원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 동아리를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연습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선생님들(20대~30대 초반)만 패셔너블한 모습을 하고 있다. 큰 액세서리나 모자, 딱 붙는 배꼽티나 빅사이즈 힙합 패션, 진한 메이크업 같은 것 말이다. 사실 선생님들은 그래줘야 한다. 패션과 메이크업에서 우러나오는 '간지'까지가 춤을 완성하는 것이니까.
내가 있는 <K-pop 댄스> 반에는 6월쯤부터 외국인이나 재외 한국인들이 나타났다. 케이팝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케이팝에 푹 빠진 해외의 젊은이들이 방학이나 휴가를 맞아 한국을 찾아 춤을 배우는 것이다.
스타 안무가 리아킴의 '원 밀리언 댄스 스튜디오(1 million dance studio)'는 특히 유명하다. 말하자면 댄스계의 국기원 같은 곳이다. 전 세계 태권도인들이 종주국 한국의 본산에서 한번 수련해보는 이 꿈이듯이, 한국의 댄스학원, 특히 유튜브 구독자가 1790만 명에 이르는 이 학원에서 춤춰 보는 것이 수많은 외국 댄서 지망생들의 소원인 모양이다. 우리 학원에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몇몇이 들어왔다.
춤은 몸짓 언어니까 선생님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선생님이 그 외국인의 이력이 궁금하면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해서 학생을 통해 물어보곤 한다. 나는 그냥 있는다. 내가 안 나서도, 영어는 나설 아이들이 많다.
한 번은 20대 후반의 중국 처자가 들어왔는데,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해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 선생님이 "중국어 할 줄 아시는 분?" 할 때 나는 나서지 않았는데, 잠깐 숨 돌리는 시간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중국어로 마구 질문을 하고 말았다. 가만히 있던 아줌마가 갑자기 중국어를 쏟아내자 중딩들이 "나 지금 팔에 소름 돋았어!" 하며 놀랐다.
그때쯤에 중드를 너무 많이 보았나 보다. 겁도 없이 막 중국어를 내뱉다니. 하지만 나의 중국어는 '훌륭한 성조와 인토네이션과 발음' 때문에 오히려 경을 치곤 한다. 내가 중국어를 잘하는 줄 알고 길고 빠른 답변이 돌아왔고, 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뭐 잘못 통역한들 누가 알리. 대충 짐작해서 그럴듯하게 통역해주었다.
8월 중순이 지나 외국인과 교포, 해외 유학생들이 돌아가야 되는 때가 왔다. 청하의 <Snapping> 안무 마지막 날이었다. 미국 교포 여대생은 그날이 마지막 수업이라 했다. 한국말은 잘하는 편이었지만 한국식 영어 발음은 잘 못 알아들어서, 내가 가끔 다시 발음해 알려주던 학생이었다(에헴!).
이 노래의 "Snapping snapping 애써 눈을 가리고" 부분은 오른손으로 눈 앞을 가리면서 왼쪽을 바라보았다가 손을 오른쪽으로 털면서 시선은 앞쪽을 보는 안무다. 초짜인 나는 아직 내 동작에 신경 쓰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추는지 볼 겨를이 전혀 없었지만, 안무 자체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게 돼 있어서 바로 옆에 있는 그 친구를 보게 되었다. 근데 이 친구, 마지막 수업이 얼마나 아쉬웠던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추고 있었다. 뭔가 뜨거운 느낌이 올라와서 나도 덩달아 열심히 추었다.
K-pop 댄스에 빠진 외국인들에겐 한국의 댄스학원에 다니는 것은 정말 이루기 힘든 꿈같은 일이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닐 수 있는 우리들과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그 여학생이 미국으로 돌아간 지 두 달이 되어 가는데 여전히 <Snapping> 노래를 들으면 그녀가 떠오르고, 언제든지 케이팝 댄스를 배울 수 있는 나의 행운을 소중히 여기려고 다짐한다.
<3화>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40대 중반의 아줌마가 학원을 찾은 것에 너무 어이없어할까 봐 몹시 망설였다. 하지만 몇 달 다니고 보니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오히려 학원 측에서는 나 같은 이모 삼촌 엄마 아빠 나이가 등록하는 것을 대환영할 것이다. 왜냐고? 한두 번 왔다가 안 나타나거든. 마치 대대적인 할인 특가에 혹해서 헬스장 1년권을 끊고는 두어 번만에 영영 볼 수 없는 '회원님'을 헬스장에서 가장 좋아하듯 말이다.
가끔씩 30대 중반을 넘은 여성들이 우리 반을 '스쳐' 사라졌다. 어쩌면 내가 '50대 남자분도 있는 걸요!'란 말에 혹했듯이, 이번에는 내가 미끼로 쓰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40대 아주머니도 얼마나 잘 다니시는데요!" 하고.
무료체험을 한 번 해보고 간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정식 등록을 하고선 두세 번 왔다가 안 보이는 이들이 많아서 좀 의아했다. 나는 뭘 배우든 수강료가 아까워서 꾸역꾸역 출석하곤 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연령대가 있는 사람들은 선생님이 '춤을 춰 보신 적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다들 예전에 좀 해봤다거나 다른 춤을 오래 한 경력자들이었는데...(우리 선생님은 내가 들어갔을 때는 그런 질문을 안 했는데. 왤까. 그 질문을 하는 범위를 능가하는 나이여서 그랬나. )
짐작해보면 이렇다. 어른들에게 월 10만 원은 뭐, 좀 비싼 맛집에 한 번 갔던 셈 치고 잊을 수 있는 돈이다. '어쩌다 첫 수업 놓쳐 안무 앞부분을 놓쳤으니 이번 주는 제끼고 다음 주에 가자', '오늘은 새 곡 시작하는 날이고 시간도 되지만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느라 피로하니 부담스러워. 근데 오늘 안 가면 이번 주는 글렀으니 다음 주에'. '아이코, 오늘 중간부분 하는 날인데 모임 때문에 못 가네. 마무리 부분 배워봤자 중간부분 안무할 때 멍청하게 서 있어야 하니 의미없지. 다음 주로...' 이러다 한 달이 금방 지났을 것이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들이 사실은 내가 안 가는 요일로 바꿔 열정을 불태우고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강료를 그냥 헌납하고 갔다. 케이팝반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매 시간 새 안무를 잔뜩 외워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수강생이 자주 바뀐다. 문화센터의 각종 댄스반에서도 비슷한 안무 강박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몇 명씩 나눠서 선생님 없이 춰보게 한다거나 영상 촬영을 하면서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내가 이 클래스에 고정 멤버로 자리 잡은 것이 기특하기만 하다. 뇌 과열로 인해 눈 앞이 하얘지는 어려움과 부담감을 참아내며 '존버' 하는 새 어느덧 반년이나 지났고, 이제 나보다 고참은 한 명 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 고참이 자주 결석하는 관계로 선생님과 수업 내용에 대해서 망설임 없이 의견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이들뿐 아니라 어린 쪽이 등장한 적도 있다. 한번은 주의력결핍장애(ADHD)를 가진 것이 분명한 초딩 저학년 남자아이가 왔다. 그 아이의 엄마는 개다리춤을 쉴 새 없이 추어대는 아들이 정식 댄스 수업을 받으면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엄연히 어린이반이 따로 있는데 왜 우리 반에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몇 살이냐는 질문 같은 것에 절대 대답하는 법이 없었고 수업 중간에 드러눕거나 화장실 간다고 나가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해 우리를 당황시켰던 그 아이도, 네 번쯤 엄마에게 등 떠밀려 들어왔다가 더는 오지 않았다. 진짜 춤을 좋아하는 ADHD 아이였으면 효과가 있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어린이들의 장기인 개다리춤을 자주 춘다고 춤에 희망을 걸어보려 했던 것은 좀 성급한 판단이었던 것이다.
다양한 연령과 국적과 성별과 목표가 다른 사람들이 요즘 대중문화를 이끄는 춤을 배우기 위해 공존하는 곳, 그곳이 바로 이 시대 '댄스 학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