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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아 Nov 18. 2019

<9화> 아 약 올라, 약 올라!!

이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기란 정말

K-POP 댄스 수업을 주 3회씩 꼬박꼬박 들은 지 4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있지(ITZY)<아이씨(ICY)>를 배우는 주였다. 있지(ITZY)는 걸그룹 명가 JYP가 트와이스를 잇는 야심작으로 내놓은 특급 신인 걸그룹이다. 중독성 있는 화려한 음악과 매력 있는 음색, 완벽한 퍼포먼스, 너무도 아름다운 비주얼과 패션으로 중무장한 이 아이들은 데뷔 첫 주에 <달라달라>라는 곡으로 음방(음악방송) 1위를 거머쥐었다. 올해 각종 연말 시상식 여자 신인상 부문에 적수가 없다. 한여름에 나온 <ICY>도 음방 12관왕을 휩쓸 정도로 정말 대단했다. 


그래서,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서 잘 추고 싶었다. 왕년에 공부깨나 해봤던 나는 '열심히 외우고 반복연습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하며 순진무구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런데 어쩜 그리 동작들이 휙 지나가 버리는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안무연습 영상을 보아도 따라 하긴커녕 그냥 눈 깜박이는 새 허탈하게 휘리릭! 동작이 흘러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선생님이 반복해서 동작을 보여줘도 내 사지는 따로 놀았다. 아, 이건 진짜 내가 평생 취해보지 않았던 온갖 포즈의 총집합이네. 그런데다 그 생소한 포즈들의 전환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이다.  


유튜브 재생속도를 조절해 보았다.

0.75배속 : 아.... 이거 원래 속도 아니었어? 

0.5배속 : 음, 따라 할 만 해. 근데 여전히 동작 전환할 때 사지가 꼬여! 이 동작 다음에 어느 발에 힘이 들어가고, 그동안 팔은 어디다 둬야 하는 거야? 여전히 중간에 허둥댔다.

그러면 남은 옵션은 하나뿐이다.


0.25배속. 이 속도로 해놓고 시청해본 적이 있는가. "우~~오~~~어~~우~~와아아~~ㅇㅇㅇ앙" 하는, 노래라고는 할 수 없는 괴음성이 이어진다. 테이프였다면(오, 나는 역시 40대) 늘어져서 망가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하고도 걱정스러운 소리. 그 괴음향에 맞춰 슬로 모션으로 버둥거리는 나. 문 걸어 잠그고 혼자 해서 그렇지, 누가 그 광경을 봤다면 그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절망적이었다. 여전히 뭔가 안된다. 있지처럼 손끝까지 파워풀하면서! 동작의 세부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면서! 상큼한 표정과 느낌을 살리고 싶은데. 도대체가 나한텐 너무 어렵다.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0.25배속도 안된다고?? 그렇다면 아예 스틸 사진이다!


<4화>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편에서 졸라맨 안무 노트를 소개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일찌감치 그만두었다. 고딩 때 추었던 탈춤 안무를 기록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케이팝은 절대 그 수준이 아니었다. 손가락의 모양, 팔꿈치의 각도, 시선의 방향, 미세한 허리의 뒤틀림, 어깨의 웨이브 방향... 그걸 졸라맨으로 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화면캡쳐>를 하기로 했다. 


유튜브 영상을 0.25배속으로 돌린 뒤 동작 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화면캡쳐를 해 저장했다. 약 1분 분량인 1절에 큰 동작구분만도 35개(세부 동작까지 따지면 매 초마다 다른 동작이 있음)에 달했다. 그걸 A4 한 장에 다닥다닥 붙여 넣은 프린트를 전신거울 옆에 붙여놓고, 막힐 때마다 그 부분 안무의 정확한 동작을 확인했다. 눈물겹지 않은가?!


그래서 결론은?

- 일주일은 너무 짧았다. 

- 4개월 차 아줌마는 너무 어리숙했다. 

- 하필 잘하고 싶었던 곡은 감히 내가 덤빌 수준의 곡이 아니었다. 

'안무를 디테일까지 숙지하기 위해서' 느리게 재생하고 연습했지만, 결국 정속으로 틀면 뇌와 몸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금요일 저녁 3일 차 마지막 수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중간중간 박자를 놓치고 몇 동작은 어버버 했으며 몇 개는 그새 까먹어서 미리 대비 못하다가 선생님 동작을 황급히 따라했다.


나는 겸허히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래 아직은 아닌 거야. 그냥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가득하다고 해도,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리고 내가 매일 몇 시간씩 연습한 것도 아니잖아? 몇 시간씩 연습하는 것도 어느 정도 혼자 출 수 있는 수준이어야지, 초보일 때는 몸개그를 몇 시간씩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음처럼 연습을 오래 할 수 없다.


나의 연습 방법은 이후 또 업그레이드됐다. 유튜브로 원 가수의 영상도 따라 하지만, 주로 다음 팟플레이어로 선생님의 시범 영상을 틀어놓고 속도를 조금씩 올려가며 연습한다. 선생님이 추는 모습을 폰으로 영상녹화해두었다가 PC로 옮겨서 팟플레이어로 재생하는 것이다. 원래는 다른 동영상 플레이어를 쓰고 있었는데 쓰는데 불편함이 많았다. 이 동영상 플레이어는 가벼우면서도 편리한 옵션들이 많은데, 특히 재생속도를 단축키로 0.1배속씩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처음 0.3배속으로 시작해서 잘 되면 0.1배속씩 점차 속도를 높여가며 반복하는 것이다. 구간반복 설정도 간단해서,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 구간만 무한반복해 보기도 한다.


8개월 차가 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ICY 영상을 보곤 내심 놀랐다. 이거 정속 맞지? 동작이 하나하나 다 보이네? 내가 0.75배속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니지? 싶을 정도다. 그래도 다시 커버하려면 0.3배속부터 연습을 새로 시작해야겠지만, 그렇게까지 어려운 안무는 아니었었네, 오만방자한 생각이 드는 것 보니까 몇 개월 새 조금 늘었나 보다. 앗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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