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의 멱살을 잡다
지난 이야기는 사실 무용담이기엔 '액션'이 부족했다. 내가 본 광경, 상황이 놀라웠던 것이지 내가 직접 나서서 한 행동이라고는 옆집 담장을 넘어 들어가 창문을 열어젖혔다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반지하 셋집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이야기는 버라이어티 액션 어드벤처가 맞다. 대지 55평의 아담한 단독주택에서 액션 활극이라니 ㅎ
밤 12시 전후였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아이들은 다 잠들고 2층 거실에서 호젓한 밤 시간을 즐기고 있었던 나에게 핸드폰 벨이 울렸다. 반지하 1호 아가씨다. 반지하 1호에는 20대 중반의 동갑내기 여성 둘이 전세로 살고 있었다.
세입자들의 전화는 반갑지 않다. 집주인한테 전화를 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보일러가 고장 났다, 물이 샌다, 옆방 개 짖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힘들다 같은 민원이 대부분이다. 보일러는 A/S를 부르면 전문가가 와서 뚝딱 고치니까 해결은 쉽지만 수리비 지출이 많았고, 개 짖는 소리는 나로서는 주의 주는 것이 다니까 품은 별로 안 들지만 개선되기 어려운 것이라 계속 신경이 쓰였고, 난방관이나 수도관 어디가 새는 것은 원인이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으면 공포였다. 전문가를 불러서 청진기로 이곳저곳을 탐지한 뒤 새는 부위를 벽이든 바닥이든 깨고 새 관으로 교체한 뒤 마감을 새로 해야 한다. 온갖 세간살이도 다 대피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어마어마한 품과 돈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급한 일 아니면 민원 전화는 보통 낮에 하는데, 무슨 일일까?
"밤늦게 죄송한데요, 저 혼자 있는데 아까부터 웬 술 취한 남자가 자기 집인 줄 알고 자꾸 문 열라고 두들겨서 무서워 죽겠어요. 좀 도와주세요."
당시 남편은 몇 개월간 필리핀에 장기출장을 가 있었고, 시부모님이 1층에 계셨지만 일찍 주무시기도 했고 깨어 있으시다고 해도 연로한 어른들까지 동원하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
이상할 정도로 분노 게이지가 순식간에 최고 레벨로 치솟았다. 한마디로 <분기탱천(憤氣撐天)>이었다. 나는 2층에서 실내 계단으로 쿵쾅쿵쾅 내려가 1층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가서, 셋집이 오종종 모여 있는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한강변의 쓸모없는 모래밭이었던 잠실이 도시로 조성되던 시기에 지어진 80년대 전형적 2층 단독주택인 우리 집은, 대문 정면에 1층 현관이 있고, 반지하 셋집들은 마당 오른쪽 구석으로 비좁은 골목을 지나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야 손바닥만 한 뒷마당과 함께 현관들이 나타난다.
과연 어떤 남자가 반지하 1호 앞에 있었다. 30대 중반쯤? 당시 내 나이 때와 비슷했다. 나는 달려간 기세 그대로 그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누구세요?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그 사람이 우물우물 뭐라고 말을 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미 고주망태가 돼 있어서 대화가 불가능했다.
"나가세요!!!!"
나는 그 남자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쳤다. 그가 뒷걸음질 치며 거의 쓰러질 뻔하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나가라고요!"
그가 중심을 잡으며 일어설 때마다 나는 계속 그의 가슴팍을 밀쳤다. 그때마다 그는 맥없이 뒤로 두세 걸음씩 밀려나며 대문으로 나가는 좁은 골목의 벽에 부딪혔다. 무슨 농구공 다루듯이, 나는 그를 여러 번 '튕겨서' 대문 앞까지 밀어냈다.
그는 전혀 반격하지 못했다.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대취해 있기도 했지만 나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탓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담도 없는 우리 집(담 한쪽을 없애고 주차공간으로 쓰도록 돼 있었다.)에서 길로 그를 몰아내 봤자 다시 들어올 것 같았고, 이제는 그가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진짜 집이 어딘데 엄한 데서 이렇게 헤매고 있는지.
"어디 살아요?"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물었다.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이 답하던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역시 상대편이 뭐라 뭐라 하는데 이 사람은 대화불능이다.
"전화 이리 줘요!"
처음부터 내 기세에 눌려 전혀 반항하지 못하던 이 남자는 순한 양처럼 나에게 폰을 내주었다.
"저기요, 이 분이 술이 많이 취하셨는데요, 저희 집이 자기 집인 줄 알고 들어왔는데 대화도 안되고..."
"거기가 어딥니까?"
폰 안에서 역시 이 남자 또래의 목소리가 내 말을 자르며 급박하게 물었다.
내려앉았던 화가 다시 한번 솟구쳤다. 어디냐고? 뭐라고 얘기해야 되지? 서울? 잠실? 아니면 'OO 부동산 앞 골목 세 번째 집'? 이 남자가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왔는지 모르는데 어느 범위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나는 불친절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러는 그쪽은 어디신데요?"
다행히 그는 700-800m 밖에 안 떨어져 있는 술집 이름을 댔고, 이 동네 지리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OO 부동산 앞 골목'이라 설명해주었다. 바로 가겠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그 사람, 가방 들고 있나요? 갈색 서류가방인데요. 저도 그 사람 잘 몰라요. 그냥 술집에서 우연히 합석했는데, 제 가방을 자기 건 줄 알고 들고 갔어요. 거기에 내일 필요한 정말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거든요."
그래서 전화 속 남자 목소리가 그리 절박했고, 다짜고짜 어디냐고 물었던 거구나. 다행히 이 술 취한 남자는 나한테 멱살을 잡히고 수없이 밀쳐지면서도, 손에 서류가방을 꼭 쥐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자꾸만 꺾이는 다리를 세우며 간신히 서 있는 남자 옆을 지키고 서서 기다렸다. 2~3분 지났을까? 맹렬한 속도로 두 남자가 뛰어왔다. 그리고 나한테 인사할 틈도 없이 술 취한 남자로부터 서류가방을 나꿔챘다.
그들은 가방을 열고 내용물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멘탈이 돌아왔는지, 나에게 굽신굽신 감사인사를 인사했다.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이 서류 못 찾았으면 자기들은 정말 끝장났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들고 온 또 다른 서류가방은 정말 놀랍게도 똑같았다. 흔한 스타일이긴 했지만 검은색도 아니고 갈색인데.
이미 대문을 넘어 길로 내려선 상황에서 술 취한 남자는 침입자가 아니었고, 나도 기세 등등한 집주인이 아니었다. 뭐랄까, 우습게도 '임시 보호자' 같은 마음이 되어 어떻게 무사 귀가시킬 것인가 고민했고, 그래서 달려온 이들이 반가우면서도, 그들의 설명이 일리가 있는가 살폈다.
확실히 두 서류가방이 코미디처럼 같았고, 전속력으로 달려와 수없이 폴더 인사를 하면서 감사를 표하는 모양이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은 술 취한 남자의 귀가를 걱정하는 나에게, 어딘지 대강 안다면서 자신들이 책임지고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욕설 몇 마디, 꿀밤을 주고 엉덩이를 걷어차며 분을 푸는 모양새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술 취한 남자를 부축하면서 떠났고, 상황은 '흐뭇하게' 끝났다.
나는 이후 여러 번 그 당시를 복기해봤다. 처음 세입자 처녀의 전화를 받았을 때, 무엇이 날 그토록 화나게 했을까? 두려움, 주저, 회피... 이런 것이 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않았을까? 오래 생각해 낸 내 결론은 이렇다. '평화로운 밤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점'. 나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면서 사람들과 대거리하며 싸워본 적이 거의 없고, 또한 대부분의 소시민들이 그렇듯 가족한테는 성질을 부려도 바깥사람들에겐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퇴근해 집안일하고 아이들 재우고 얼마 안 되는 소중한 휴식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점이 나를 그리 분노케 한 것이었다.
그냥 119 신고를 했으면 어땠을까(그 방법은 그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경찰이 출동해서 데려가 술이 깰 때까지 파출소에 몇 시간 눕혀놨다가 그를 보냈겠지. 그랬으면 서류가방 남자들의 전화를 못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밤중에 경찰차 경광등 불빛 번쩍이며 출동한 경찰들이 우리 집을 드나드는 걸 보고 무슨 안 좋은 사건이 벌어졌나 수군댔을 것이다. 또 일단 경찰이 출동했으니 보고를 위해 나와 셋집 처녀 모두 이런저런 질문에 답하느라 번거로웠을 수도 있다.
하여튼 나는 이 해프닝 이후 보통은 남자 선배들이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약간의 허풍과 함께 하는 교훈(?)을 시전하고 있다.
비록 그가 고주망태여서 반격 불가 상태였다고 하지만, 여자 혼자 한창나이의 낯선 남자를 대거리해야 한다는 걸 의식하고 주저주저 접근했더라면 그는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이후 10여 년이 지났지만 학습한 걸 재실습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절대 사나운 사람이 아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아줌마'보다 상위 레벨을 차지하는 것이 '집주인 아줌마'라는 건 확실하다.
<반지하 시리즈 및 번외편 무용담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