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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테리언니 백예진 Jul 19. 2024

사업 12년 차에 건축도시대학원을 가다



첫 건축 프로젝트인 ‘설원재’를 짓는 일 년여 동안, 토지 매입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들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글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배웠다. 준공 이후 설원재가 잡지와 방송 등 여러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고 주목받게 되자 감사하게도 이를 발판으로 다른 건축 프로젝트도 하나둘씩 맡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하나씩 완수해 낼 때마다 실내 공간 디자인만 했을 적엔 미처 알지 못했던 조경과 건축 지식들이 내 몸 안에 잔근육처럼 쌓여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일을 하면 할수록, 건축이라는 세계를 조금씩 더 알게 될수록 체계적인 학제 시스템 아래서 동료, 교수님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연구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내가 부딪치며 습득해 온 방식과 방향이 과연 옳은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수백 건의 프로젝트를 거쳐 온 사업 12년 차.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치가 발하는 좋은 공간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선사하고 싶은 내 꿈을 이루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지, 무엇을 통해 발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지금이라면 공부도, 사업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양면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대학원에 대한 갈망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쭉, 대학원 진학에 대한 희망을 마음속 어느 한편에 품고 살았다. 학부를 마치고도 아직 내 호기심이 충분히 채워지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고 보다 심도 있는 배움에 목말랐다. 그러나 학부 졸업 당시 현실적으로 당장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대학원에 대한 꿈을 잠시 보류해야만 했다. 취업해서 3~4년 차가 되고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면 진학해야지, 하다가 느닷없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치르다 오랜 짝꿍과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과 출산을 거쳐 두 아이를 낳게 되었다. 



물론 그러고도 대학원을 향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둘째 아이가 들어섰을 때부터 두 아이 다 초등학생이 되면 나도 대학원에 진학해서 함께 공부하는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때 다짐한 바대로 두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지금이야말로 도전해 볼 시점이었다. 오랜 시간 마음속에 두고 만지작거렸던 나와의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렇게,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의 늦깎이 석사생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특수대학원의 성격상 수업은 주 3일,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이루어졌다. 진학해 보니 일과 육아 병행만큼이나 일과 학업 병행의 난도가 만만치 않았다. 우선 변수가 많은 업계 특성상 수업 시간에 맞춰 헐레벌떡 달려가 수업을 듣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업 끝에는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하는 과제와 발표 미션이 한아름 주어졌다. 매주 학부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논문을 읽고 써야 했으며, 크리에이티브한 미감과 실용적 측면을 모두 고려한 작품을 완성해 동료 학생들과 교수님에게 소개해야 했다. 사업과 가사를 다 팽개치고 학업에만 올인한대도 결코 쉽지 않은 정도였다. 다량의 논문을 읽고 자료를 수집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보니 몸과 마음의 여유도 사라졌다. 대학원 진학을 향한 오랜 꿈이 무색하게도 첫 학기에 바로 휴학을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어렵게 느껴졌다. 내가 과연 5학기를 다 채우고 졸업을 할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하나. 학교 건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할 순 없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여건상 할 수 없었던 지난날에 비하면 정말이지 호강에 겨운 투정이었다. 가족들과 나 자신을 설득하며 선택한 일이니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힘들어도 꾸역꾸역 수업에 출석하고, 매일 밤 자기 전에 최소 2~3시간을 내어 과제를 하고, 주말에는 종일 과제를 했다. 그렇게 3학기를 보내자 어느덧 이 생활에 적응이 되었다. 또, 학교 건물에 발을 들이기까지가 어렵지 막상 강의실에서 들어서면 어느새 정신이 맑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동료 학생들의 작업을 보고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때면 우리나라에 너무나 멋지고 실력 좋은 디자이너들이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웠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학업을 지속하는 동료 학생들을 볼 때면 그들을 응원하는 마음과 함께 잠시 옅어졌던 동기가 다시금 부여되었고, 더 겸손한 태도를 지니고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키웠다. 지도 교수님과의 연구는 한 분야의 최고가 되려면 재능은 기본이고 뼈를 깎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직접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수님 덕에 공간을 분석하는 다양한 관점과 인식론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여태 유지해 온 사업의 미션, 철학, 또 공간관이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시야 역시 한층 넓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특히 즐겁게 들었던 강의를 꼽자면, 첫 번째는 Site(대지)를 정한 뒤 특정 주제를 택해서 건물 내외부를 전면 설계하는 스튜디오 수업이다. 사업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에는 한정적인 예산, 고객의 성향, 안정성, 지속성 등 고려할 요소와 제약 조건이 너무 많아서 당초 기획단에서 제안했던 과감한 디자인이 실측과 시공을 거듭할수록 평범해지는 게 다반사이다. 디자이너로서는 이게 늘 못내 아쉬운 지점인데, 이 수업에서만큼은 시도해 보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었다. 그즈음 관심을 두고 있던 조경학 강의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조경실무학원이나 농장 수업에서 들을 수 없었던 이론적 배경과 세계 여러 나라의 조경 관련 지식, 또 조경 시설 및 실제 시공 실무에 대한 공법들을 폭넓게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한편, 처음 입학했을 때는 공간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라는 것을 굳이 이야기하기가 겸연쩍어서 직업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패널로 출연한 방송과 유튜브를 우연히 본 동기들과 교수님들이 먼저 알아봐 주셔서 직업을 공개하게 되었는데, 이후로 내가 사업을 해 오며 취해온 방법론과 실무 경험을 자연스레 나누는 자리가 종종 주어졌다. 주택 설계 시 수영장 시설과 인피니티풀을 시공한 사례 등 내가 직접 현장에서 경험했던 내용들을 동기들과 교수님들이 귀 기울여 듣고 높이 사 주자 공부하는 것이 더 즐거워졌고, 내가 동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학교에서 보낸 3년의 연구 결과를 갈무리하는 논문 주제로 내가 택한 것은 병원 공간이었다. 공간이 사람에게 주는 힘인 ‘치유’와 아이들을 키우며 고민하게 된  ‘어린이’, 그리고 주거와 상공간을 거쳐 회사에서 새롭게 집중하게 된 공간 ‘병원’을 키워드로 대주제와 논문의 줄기를 구성했다. 타이틀은 <치유환경을 위한 어린이병원 공용 공간 계획에 관한 연구>. 내용인 즉, 기존의 지역 소아청소년과에서 해결할 수 없는 재활이나 여타 병력으로 오랜 기간 입원을 요하는 어린이들이 머무는 ‘어린이전문병원’은 일반 병원과 달리 어린이 환자들에게 집이자 놀이터이자 학습 공간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어린이전문병원이 절대적으로 소수이고, 그나마도 이러한 특수성이 고려되지 않고 설계된 병원들이 대다수이다. 이 점에 착안해 어린이의 생태적 감수성을 자극하면서도 병원이라는 제한적인 실내 공간에 적용 가능한 디자인 표현의 특성을 연구하는 이야기를 쓴 것이다. 수없이 체크리스트를 수정하고, 선행연구 사례들 분석을 거쳐 쓰고 고치기를 끝없이 반복한 논문의 마지막 줄을 드디어 끝마쳤던 날. 도무지 닿을 것 같이 않게 멀리 있던 졸업이라는 두 글자가 드디어 손끝에 닿는 것을 실감했다. 결국 포기 않고 완성했구나 싶어서 뿌듯하고 후련하고 시원섭섭했다. 



대학원 졸업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대표이자, 공간 디자이너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자 또 아내 역할을 하는 중에 또 한 번 넘은 커다란 산이었다. 나 자신의 한계를 계속해서 시험하고 뛰어넘은 도전의 나날들로 이뤄낸 3년은 숱한 학문적 배움뿐 아니라 인내와 끈기, 그리고 무엇보다 용기라는 큰 자산을 얻은 시간이 돼 주었다. 학위와 논문보다 더 중요한 자산을 손에 쥐고 졸업하던 날, 강의실 책상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한 톨의 부끄럼 없이 스스로를 맘껏 칭찬해 주었다. 내 안의 세계가 한 뼘 더 넓어진 날을 맘껏 기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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