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내 안의 어린아이를 너를 통해 만난다.

by 다시 자라는 어른

1. 잊고 지냈던 시간의 습격

거실 바닥에 흩어진 알록달록한 블록들, 벽지 모퉁이에 몰래 그려놓은 서툰 낙서. 아이가 만든 무질서한 풍경 속에서 나는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서른 넘은 어른의 눈에는 그저 '치워야 할 일감'에 불과한 것들이, 아이의 눈에는 거대한 성이 되고 비밀스러운 지도가 된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를 듣다 보면, 기억의 저편 아래 가라앉아 있던 먼지 쌓인 상자 하나가 떠오른다. 그 안에는 아주 오래전, 내가 세상을 향해 가졌던 경이로움과 작은 상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동시에 잊고 지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



2. 닮아있는 결핍과 마주하다

아이가 사소한 일로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거나, 혼날까 봐 눈치를 보며 내 옷자락을 만지작거릴 때가 있다. 그때 내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은 단순히 부모로서의 안쓰러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당혹감이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아이에게 건네는 이 한마디는 사실 수십 년 전, 누군가에게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울어도 네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목소리. 나는 아이를 달래며 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여전히 겁 많은 어린 나를 함께 달래고 있었다.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곧 나의 과거를 치유하는 손길이 된다.



3. 너는 나의 과거이자, 치유의 기회

아이는 나의 가장 닮은 꼴이면서도,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걷는 존재다. 내가 부모에게 받지 못해 아쉬웠던 것들, 혹은 너무 과해서 버거웠던 기억들을 반추하며 나는 매순간 선택한다. 나의 부모가 내게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내가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긴 여정이기도 하다.



아이가 작은 손으로 내 뺨을 만지며 "사랑해"라고 속삭일 때, 내 안의 어린아이는 비로소 환하게 웃는다. 내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이 일방향적인 시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이가 내미는 순수한 손길이 내 안의 오래된 결핍을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4. 함께 자라는 두 아이

이제 나는 안다. 육아란 단순히 한 생명을 키워내는 고된 노동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손을 잡고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동행이라는 것을.



내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 위로, 낡은 사진첩 속 나의 어린 모습이 겹쳐진다. 너를 통해 나는 나의 잃어버린 계절을 되찾고, 그때는 미처 다 자라지 못했던 내 마음의 키를 한 뼘 더 키운다.



고맙다, 나의 아이야. 네가 내게 와주었기에 나는 비로소 나의 어린 시절과 화해하고,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는 오늘밤도 한 이불 속에서 나란히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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