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라보는 거에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내가 지금 사는 이 순간을 좋아하고 있는가에 대해 답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울 거라 확신하는 이유는 이는 물음에 대한 정답을 내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고
알려고 할수록 침묵하게 된다.
동기 부여에 대해 묻고 물어볼수록
스스로를 너무 모르겠음을 깨닫다가,
그냥이라는 말을 뱉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그냥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 중 일부는
아 저 사람은 딱히 별 생각을 안 하고 사는구나 싶을 수도 있고,
어떻게 아무 이유가 없을 수 있냐며 이해하기 힘들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냥이라는 선언은
본인을 파헤치려고 노력해 보다가
그렇게 파헤쳐서 어떤 결과물이 나올 수 있더라도,
그 결과가 그리 궁금하지 않고
그 결과가 행동방식에 큰 영향을 줄 거 같지 않아서
그대로 둔 상태를 선언하는 것에 가깝다.
-나 자신을 알고자 하는 본능적인 노력
끊임없이 본인을 알려고 할 것이나, 알 것 같다는 몇 번의 착각과 희망을 지나, 이는 죽을 때까지 실패로 끝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본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기는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기에 생각을 멈추지 않는 이상 본인을 알고자 하는 시도는 멈출 수가 없다.
- 복잡한 문제 풀기의 연속인 나날들
문제를 풀고 있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도 나이고, 문제를 채점하는 (과거를 되짚어보는) 사람도 나인데, 문제가 올바르게 적혀있는지도, 정답이 올바르게 나와있는지도 모르는 시험 문제를 풀고 채점하는 것이 매일매일의 일상이다. 채점지에 적혀있는 정답이 정답이 맞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이 없어서 우리는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한다. 다른 사람에게, 사회에게 진짜 정답이 적혀있는 답안지를 달라고 보채기도 하고, 귀를 닫고 내가 가진 채점지가 진짜 정답이라고 믿어버리기도 한다.
여기서, 본인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에는 개인적인 나를 전제하고 있으며, 올바른 답을 내고자 하는 자세에는 사회적인 나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신기하게도 나라는 사람은 하나의 개인이지만, 한 개인이 개인적으로 기능하는 나와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나를 동시에 떠올릴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나는 서로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개인적인 나는 내가 존재하기에 지닌 속성에 대한 자아, 사회적인 나는 사회적으로 의미를 부여받은 자아라고 정의하겠다. 나는 뭘까를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고민을 해도 이는 사회적인 나를 빼고 고민하려고 한 시도이기에, 일상을 살아가며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좋았을까를 검토할 때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시도이다. 오히려 어떻게 행동해야 좋았을까 에는 대부분이 현실적인 선택이자 사회적으로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근데, 나는 뭘까를 끊임없이 고민을 해도 사회에서 내가 한 행동과 이에 대한 결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에, 이를 모두 제외한 상태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때, 개인적인 나, 사회적인 나를 각각 개별적으로 명확하게 파악하는 데 성공한다면 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회적인 나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시도로 만들어진 나인데,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방식에는 최적화된 방식이 있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이렇게 사회적인 내가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정답에 향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모습이라면 나라는 특수성이 없어 보인다. 반대로 개인적인 나를 정의 내리고자 사회적인 요소를 모두 지워낸 본연의 나를 떠올린다면 무엇이 남는가 싶다. 그러면 존재하고 있는 나만이 남게 되는데, 이는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싶다. 다르게 말하면, 개인적인 나만을 정의 내리거나 사회적인 나만을 정의 내리려고 하면, 나라는 특수성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사회에서 나라는 사람이 특수하게 정의 내려지려면 두 상태는 혼재된 상태로 가만히 있어야 한다.
마치, 입자의 위치 (개인적인 나)와 운동량 (사회적인 나) 중에 한 값을 측정(정의)하고자 할 때 다른 값의 편차가 매우 커지게 되어 결국 입자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게 되는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와 비슷한 상황이다. 결국 혼재된 상태로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지내야 하는 것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럼 두 종류의 자아가 혼재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 뭘까. 올바른 선택을 하려는 태도에는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전략을 따르는 태도에 있고, 개인적인 나에 충실한 방식으로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끌리는 대로 행동해 보는 방식이 있다. 위 불확정성 원리에 비유하여 다시 보면, 일단 사회에서 하는 행동이기에 주변을 아예 신경 쓰지 않은 행동이 없다는 점에서 개인적 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상태인 것이며, 아무리 사회적으로 정의된 전략이 있다 해도 이를 수행하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나를 뺀 사회적인 나만을 정의하기 힘든 상태이다. 이때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은 당연히 개인적인 나와 사회적 나 사이에서 원만한 합의를 보는 것이다. 원만한 합의에 정해진 진리는 없겠으나, 혼자 사유할 때는 사회와 그나마 단절되어 개인적인 나를 꺼내볼 수 있다는 점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사회적인 나를 꺼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둘 사이의 빈도를 잘 조절하면 대략적으로 개인적인 나와 사회적인 나 사이에서 균형을 도모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있을 때는 개인적인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집단에서 사회적인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항적으로 그 반대를 떠올릴 때가 많다.
먼저, 집단에서 수다 떠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포함하여 말을 할 때 우리는 인과성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하나, 이야기의 핵심적인 본질은 감정과 선호에 맞닿아 있다. 우린 감정을 감정으로서 전달하기 어렵기에 우리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를 뒤받침해줄 다른 이야기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얼마나 논리적이고 짜임새 있는가에 따라 공감을 해주는 정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이미 기대를 하고 있으며, 결국 매우 이성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의 핵심은 나의 마음에 공감해 달라는 순수한 감정적 호소일 것이다. 이렇게 마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라며 사회적인 나를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우린 각자의 감정과 선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반대로 혼자 스스로에 대해 사유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개인적인 나에 대해 생각하며 나라는 사람의 특수성에 대해 말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어 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소개를 순전히 사회와 독립된 나로 적어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을 실감하고 힘 빠지거나 끝까지 아니라고 우겨본다.
이렇게 모순된 혼재된 삶을 살고 있음에 이를 단순히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은 듯 살기에는 강한 자기혐오에 빠질 수도, 무력감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무모한 도전이랍시고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 마냥 외치는 단어가 바로 "그냥"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공간에서도 혼재되어 있는 "나"가 있고, 개인적 공간에서도 혼재되어 있는 "나"가 있을 때, 최고의 균형을 이루는 단어는 "그냥"이다. 순전히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외칠 필요도 없이, 사회가 추구하는 모습으로 비치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그 애매한 중간 상태로 남아있고 싶은 반항으로 "그냥"이라 외친다. 어쩌면 가장 진실된 태도로 삶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냥이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개인과 사회적 자아의 합치를 이룬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냥이라는 선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하고 정확히는 모르겠으니 null 상태로 표시하겠다는 것과 유사하다. (컴퓨터에서 데이터를 접근하고 작성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종류를 선언했으나, 실제 데이터가 작성되진 않은 상태를 null, 즉 모르는 상태라고 하고 null인 상태임을 표시해 둔다.) null이라고 별도로 표시를 해둔 순간 모르겠다는 표식이기는 하나, 뭔가 완료된 안정한 상태처럼 느껴지면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도중이기 때문에 모든 물음에 그냥이라고 답하면서 끝까지 지내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은 생각을 잠깐 쉬겠다는 표시에 더 적합한 표현이다.
이를 쉼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나에 대한 사유와 사회적인 나에 대한 사유를 모두 멈춘다는 것은 기능하는 나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나에 집중하겠다는 새로운 차원으로의 여행과도 같기 때문이다. 무생물도 생물과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듯이 모든 기능을 끈 상태에도,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함은 전제되어 있다. 생명의 탄생에 그 생명을 향한 목적과 기능이 있지 않았듯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기능론이 아무 의미가 없다. 왜 하냐는 질문에 그냥 한다는 말을 하면, 왜 하냐는 질문에서 "왜"는 기능론적인 관점이었는데 대답이 존재론적으로 온 것이라 여기서 더 할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렇게 모든 기능론적인 질문들과 이야기들로부터 도피할 수 있으며, 존재한다는 생명 그 자체를 실감하고 느끼며 여행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하루하루 여러 모습으로 기능하다가 진정한 쉼을 청하고 싶을 때 존재한다는 점에 집중하며 그냥 잠시 쉼을 청한다.
결론적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개인적인 자아와 사회적인 자아가 혼재되어 있는 상태를 온전히 분리하려는 노력을 그만둔 채, 두 자아 간의 균형을 위해 노력하다 벅찰 때는 살아있음을 만끽하며 그냥 산다고 자신 있게 외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