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 끝나고 시작된 2학기 초, 나는 불 켜진 간판 사이로 보인 그 중국어 학원에 가서 초급 반을 등록했다. 난생 처음 아르바이트를 해서 옷을 사고도 용돈이 두둑했던 주머니. 나는 이끌리듯 들어가 등록을 하고, 매일 저녁 한 시간씩 중국어를 배웠다. 나의 나이 21살 가을, 딱 이맘 때.
대학교에서 교양 과목으로 1학기 때 배웠는데 참 재미있다고 느꼈었다. 성조에 따라 달라지는 뜻과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목소리의 발음들이 재미있다고 느끼던 찰나, 학교 중국어 교양 수업은 벌써 종강을 했던 참이었다. 내 주머니에 돈도 있으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용돈을 받는 번거로움도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즉흥적이고, 엉뚱하면서 때로는 배움에 목말라하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남자친구는 스키를 타는 체대생이였는데 겨울 방학때 훈련을 위해 강원도 멀리 떠났고 멀어진 틈에 나는 그 새를 못 기다리고 헤어지자고 통보를 했다. 그러고는 하루를 꼬박 울었다. 그리고 그 해에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했다. 죽은 듯이 조용히 중국어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대만 가수 주걸륜의 책과 포스터를 모으던 시절,
배우다 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 가는 길 횡단 보도 앞에 서서, 중국말로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다. 빨간 불이 켜져 있다 같은 말을 중국어로 혼자 떠들어댔다.
고등학교 때 10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했을 시절, 그 때는 내가 무엇에 흥미 있는 지도 잘 모른채 하기 싫은 수학과 과학책을 펴고 있었다. 한문과 제2외국어 일본어 수업, 대학교 초반에 배운 중국어 교양 과목만 100점을 받거나 A+을 받던 걸 생각하면 나는 그런 언어 배우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 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더 들여다 보았으면 알 수 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 시절엔 남들이 하는 대로 똑 같은 공부를 하며 야자 시간을 채웠다.
가끔씩 야자가 너무 하기 싫은 날, 선생님께 마법의 날이 왔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야자 시간을 탈출하기도 하면서 그 시기를 보냈다. 생리통으로 아프다고 거짓말을 둘러대는 내게 담임 선생님은 검사를 할 수 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며 집에 가라고 허락해 주시곤 하셨다.
초등학교 때 아빠는 화장실 한 켠에 천자문 책을 놓아 두셨다. 누룩해진 손에 잡힐 만한 직사각형 천자문 책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참 오래된 책이었는데, 아빠는 우리 삼 형제에게 화장실에서 그 책의 한자를 외우라고 하셨고, 셋 중에 나만 그 한자책을 종종 들여다 보았다. 그 덕분이였는지, 나는 언어 배우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중국어 학원에서 6개월 간 조선족 원장님에게 초급을 배웠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서 매일 한 시간씩 공부를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기본적인 문장의 문법들을 배우는 게 참 재미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배우는 내게, 5개월이 되었을 때 원장님은 중국어를 더 배워 보는게 어떻냐고 제안하셨다. 그리고 그 무렵 중국에 열흘 간 북경대학교 무역탐방, 신라방 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을 참여하게 되었고, 다녀오고 나서 다음 해 3월 1일 새벽 나는 중국으로 떠났다.
새벽 6시 터미널에서 나를 배웅해 주는 아빠도 무덤하게 나를 믿고 보내 주셨다. 눈물을 흘리거나 서로를 부둥켜 안지도 않았다. 차가운 공기에 코 끝이 찡하던 삼일절 아침, 나는 인천공항 가는 첫 차를 탔다.
겁없이 떠난 22살의 중국 생활, 친구들과 찰칵
모든 일의 시작은 아주 작은 행동에서였다.
우리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 공존하고 있고 그 앞에는 크고 작은 기회들이 있다. 그 길에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내가 그 때 횡단 보도에 서서 바라본 중국어 간판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중국인 곁에서 1년을 살 일도, 이후에 항공사 승무원이 되어 중국어 기내방송도 담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공사에 다니면서 혹은 어느 직장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큰 회사에 소속되어 살면서 나는 즉흥적이고 겁없이 도전하는 법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이 너무도 강하여, 이 세상의 길 위에 " 나" 라는 사람의 존재보다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존재가 나 자신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회사를 그만두고 소속이 없어지니, 세상에 발가벗은 몸으로 나온 기분이다. 이제 어느 소속도 필요없이, 세상에 보여줄 내 자신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