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베이스인지 잠시 착각할 정도로 가끔은 연속으로 한국 비행을 다닐 때가 있다. 매주 짐을 싸서 8시간을 날아 한국에 도착하고는 미세먼지가 있다는 뉴스에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거리를 배회하며 한국에서의 35시간을 보낸다.
아침 비행일 때 30분 더 자겠다는 핑계로 아침밥 대신 브리핑 시간 전에 까먹던 초콜릿 2조각에 카푸치노. 한국 비행을 오니 호텔 앞 나주곰탕 집에서 든든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
한국을 떠나 살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치 없이도 잘 살던 나는, 한국 음식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고 내 나라 한국인임을 감사하는 마음이 단단해져 갔다.
이번 한국에서 아부다비로 돌아오는 비행기, 10시간을 날아 아부다비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번 비행도 잘 마쳤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갈 찰나, 손님들도 바삐 일어나 각자의 가방을 짊어진다. 누군가는 아부다비에, 누군가는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한 여정이 남아 있을 것이다. 손님들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감사한 마음을 얼굴에 담으려 노력한다.
손님들이 다 내린 후, 우리의 퇴근길.
3월의 마지막 한국 비행, 문 앞에 서서 손님들께 감사인사 (farewell)을 하고 있는데 면세품 가방, 배낭 가방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노란 상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맥심 믹스 커피 한 상자를 오른손에 고이 들고 내리는 아라빅 남자 손님이었다. 내가 웃으면서 맥심 상자를 가리키니 어찌나 행복한 웃음을 보이시던지. 흰 칸 두라를 온몸에 걸치고 커다란 노란색 맥심 커피 한 상자를 손에 든 그 아랍 남자는 유난히 신이 난 얼굴이었다.
여행을 갈 때,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주려고 고심해서 고르는 기념품,
그는 한국에서 맥심 커피를 집어 들고 달달하니 맛난 한국산 커피를 선 보일 생각에 기뻐했으리라. 카락 티나 아라빅 커피보다 맛있는 커피를 찾아왔노라고 가족들 앞에서 연실 자랑을 할 그 아라빅 아저씨의 모습을 상상한다.
미리 작성한 쇼핑 리스트의 미션을 완성한 그는, 자신의 나라에 도착한 기쁨 속에 문을 나가는 발걸음이 신나 보였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텅 빈 기내를 보는 내 맘이 따뜻해졌다.
아랍 에미레이츠에 살면서 유독 한국 비행을 하면 손님들이 나를 안쓰러워하며 또 격려의 말씀을 많이 하고 내리신다. 유니폼이 멋지다는 이야기부터, 자신의 친구가 승무원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아랍 항공사에 한국인이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운지 모른다는 말을 건네는 손님도 계셨다. 그럼에도. 엄마 또래의 한국 손님들은 딸 같이 보이는지 한국에서 일하지 왜 먼 이 사막까지 왔냐고, 힘들게 고생한다는 말씀도 종종 하시곤 하셨다.
그렇다, 그분들이 건네 주신 말씀들이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반듯하게 다려진 유니폼과 또각또각 구두 소리에 맞춰 굴러가는 회사 로고가 박힌 트롤리 가방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직업이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으로 상공 3만 피트 이상의 하늘을 나의 사무실로 여기고 보내는 시간은, 보이는 것 이상의 업에 대한 소명과 서비스 업에 대한 자신만의 단단한 뿌리가 자리 잡고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직업이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다 투덜거리며 몇 년도 되지 않아 비행을 그만둘 수 있을 확률이 크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새로운 거리에서 찍는 사진 한 장으로 한 개인을 대변할 수 없다. 깊이 있는 대화를 하고 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없이는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직업 한 줄로 판단할 수 없으리라.
남들 자는 새벽 1시에 보라색 립스틱을 바르고 건조함과 기압 차를 몸으로 막아내며 이리저리 다니는데 왜 힘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어서, 자신이 서비스업에서 지키고 싶은 단단한 무언가가 가슴에 있지 않으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강인한 서비스 정신과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 역시 필요한 직업이다.
그 고단했던 몸도, 손님들이 비행기에서 내리며 고마웠다고 건네는 인사와 맥심 아저씨 같은 손님들의 소박한 미소 속에 담긴 행복을 들여다보는 일은 비행 중간중간 맛보는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