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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Apr 13. 2022

일상이 전쟁

총기에 무뎌진 미국의 삶

오늘은 일 년에 두 번 있는 치과 가는 날이다.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갈 때는 아픈 것도 힘들지만, 돈이 얼마나 나올지 덜컥 겁부터 나는데, 오늘은 아파서 가는 건 아니고 스케일링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치과 의사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치아에 붙은 치석을 제거하는 시술을 부르는 스케일링은 생선 가게에서 비늘을 벗겨달라고 주문할 때 쓰는 영어 단어 "scale"과 같은 용례인 듯하다. 그런데 스케일링이란 말이 잘 안 쓰는 영어인지, 아니면 콩글리시인지, 아니면 뉴욕에서만 안 쓰는 건지 치과에선 늘 "hygiene"이나 "cleaning"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가뜩이나 비싼 보험료에 더해 치과 보험료도 따로 내니, 스케일링은 안 받으면 손해라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챙겨 받는다. 

우리는 NYU에 있는 다른 한국인 교수님이 소개해주신 치과를 다닌다. 왕 친절하고 매우 알아듣기 쉽게 설명도 잘해주시는 한국인 의사 선생님이 있어서 금방 단골이 된 치과다. 치과 가는 걸 좋아하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환자는 아마 없을 거다. 우리도 당연히 치통 때문에 치과에 갈 일은 평생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때로는 가야만 하는 치과에 기분을 좋게 해주는 분이 계셔서 참 다행이다. 의사와 모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편안함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면, 이 또한 뉴욕이니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치과 가는 길에 한국에 있는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뉴욕 지하철에서 총기 난사 난 것 같던데, 조심해..."

맙소사. 치과에 늦어서 잰걸음으로 걸어가면서 다급히 뉴스를 찾아보니 강 건너 브루클린 선셋 파크라는 동네 지하철역에서 오늘 아침 8시 반, 한창 붐비는 출근 시간에 누군가 총기를 난사했다.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부상자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일단 확인된 부상자는 16명. 다섯 명은 크게 다쳤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는 상태라고 경찰은 밝혔다.

구글맵을 열어보니 사건이 일어난 곳을 지도에 표시해뒀다. New York이란 굵은 글씨가 쓰여 있는 곳이 맨하탄이다.


미국에 온 지 햇수로 12년째다. 처음 살았던 캠브리지는 매사추세츠주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총기 규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라는 점에서 매우 예외적인 곳이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대부분 나라와 비교하면 여전히 총기를 사거나 소지할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사추세츠에서는 총기 사고나 총기 난사 사건이 극히 드문 편이었다. 이어 각각 2년씩 살았던 샬롯츠빌(버지니아주), 내쉬빌(테네시주)은 총기 규제가 딱히 없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총기로 인한 사건, 사고 소식은 다행히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뉴욕에 오고 나선, 특히 팬데믹 이후 치안이 불안정해진 뒤로는 강력 범죄가 잇따라 일어났고, 이번엔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사실 강만 건너면 바로 나오는 동네, 지하철로 역 서너 개만 가면 내리는 곳에서 난 사고라서 더 놀랐을 뿐, 미국에서 총기 사고는 정말 흔한 일이다. 뉴스로 아예 보도되지 않는 사고도 비일비재하다.

100일이 조금 더 지난 올 한 해 동안 총기로 누군가 목숨을 잃은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빨간 점을 찍었더니, 저렇게 됐다.

위의 지도는 총기 사고 아카이브라는 웹사이트에서 그린 지도다. 가장 최근 통계가 2019년 자료인데, 미국에서 1년 동안 39,389명이 총기로 목숨을 잃었다. 벌써 수십 번째 읽고, 수백 번은 들은 이야기일 테니 숫자에 이골이 날 법도 하지만, 여전히 저 숫자를 볼 때마다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다시 부릅뜨게 된다. 다섯 자리가 맞나 싶어서 앞에서 한 번, 뒤에서 다시 한 번 세본다. 일십백천만... 정말 이게 말이 되나? 1년이 365일이니까 하루에 110명 가까이 총기로 목숨을 잃는다는 소리다. 미국 인구가 많다고 해도 우리나라 인구의 6.5배인데, 인구 10만 명당 총기로 인한 사망자 수는 우리나라보다 100배 더 많다. 13분에 한 명씩 사람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총에 맞는다고 사람이 다 죽는 건 아니니까 사망자가 아니라 부상자를 포함하면 사실상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어딘가에선 누군가 한 명은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뉴욕타임스나 아무런 뉴스 웹사이트 들어가서 페이지 전체를 대상으로 검색하기 버튼을 누르고 'gun', 'gunshot' 같은 단어를 쳐보면 아무 결과도 안 나오는 날은 거의 없다. 팬데믹이 덮치자 미국인들은 마스크보다 총기를 먼저 사들였다. 과학을 믿는 사람도 백신은 백신대로 맞고 총은 총대로 샀다. 가짜뉴스를 믿는 사람은 백신 접종을 거부하며 정부가 또는 빌 게이츠가 자신에게 생체실험을 하려고 하니 가족을 지켜야 한다며 총을 샀다. 

내전을 치르고 있거나 범죄 조직이 기승을 부려 살인이 빈번한 몇몇 나라를 빼면 미국의 총기 사망률은 주요 선진국들 가운데 유달리 압도적으로 높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폭력적으로 빼앗는 행위가 매일 쉼 없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다. 어떤 의미에선 꼭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군사 작전을 벌이지 않아도 평소에도 늘 전쟁을 치르는 나라 같다.


MBA에서 들은 수업 중에 친구들과 한 토론 중에 기억에 남는 장면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기업 윤리 혹은 리더십에 관한 수업에서 어느 날 교수가 던진 질문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었던 것 같다. 질문은 간단했다.

"여러분이 원하는 기업에 다 취업할 수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고 해도 절대로 일하기 싫은 기업이 있나요? 윤리적으로 잘못된 기업이 있다면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생각할 수 있는 기업, 산업들이 쭉 나열됐다. 담배회사, 마약을 만들거나 유통하는 데 관여하는 회사, 중독을 문제 삼으며 게임회사를 언급한 친구도 있었고,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지나친 이윤을 챙기는 제약회사의 관행을 지적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너무 자명한 답이 하나 빠져 있었다. 아무도 총기나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만든 무기를 만드는 기업 얘기를 안 하는 거다. 손을 들고 말했다.

"저기 근데... 총기 회사, 군산 복합체도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다른 사람 목숨과 피를 먹고 번창하는 회사에선 오라고 해도 못 갈 것 같은데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적잖은 친구들이 '아 이거 미국 잘 모르는 친구가 또 여기 있었구먼.'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수정헌법 2조가 어쩌구, 자기와 가족을 지켜야 했던 미국 민병대의 역사가 저쩌구. 정부는 필요할 때 우리를 지켜줄 수 없기도 하고 무기를 소지하고 사용하는 건 시민의 자유에 속한다는 말이 생존주의자(survivalist)인 타라 웨스트오버의 아버지 입이 아니라 2015년,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20대 백인 남자 입에서 나왔다.


그때는 나도 지금보다 어렸고, 무엇보다 타라 웨스트오버의 통찰력 넘치는 인터뷰를 듣기 전이었다. 상대방에게 소리를 지르고 면박을 줘서는 그 사람을 절대로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득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모국어로 열변을 토해도 뜻이 전달될까 말까 한데 영어로는 도저히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정연히 펼치기 어렵기도 했다. 그래도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딱 하나만 미국 친구들이 알아줬음 하는 게 있었다. 미국이 특이하고 이상한 거라는 점이다. 이 세상 어딜 가도 아직 술, 담배도 못 사는 고등학생이, 전과자가, 정신질환으로 치료받은 병력이 있는 사람이 시장에서 잘 익은 사과나 알이 굵은 양파 고르듯, 또는 온라인에서 게임 아이템 사듯이 쉽게 자동소총과 기관총을 살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말고는 없다. 그리고 전쟁에서나 쓰일 대량살상무기를 일반 시민이 소지할 수 없는 대부분 나라에서는 당연히 총기로 인한 사망률이 훨씬 낮다. 적어도 그 사실만은 알아줬으면 했다. 나더러 "인근이 네가 미국을 몰라서 그래."라고 말하기 전에 당신이 미국 밖의 세상을 좀 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미국이란 나라가 250년 가까이 풀지 못한 문제를 영어도 서툰 외국인 학생이 수업 중의 15분 남짓한 토론을 통해 풀어냈을 리 없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쯤 지구방위사령관쯤 돼서 외계인과 맞서 인류를 이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감정만 상한 채로 수업이 끝나고 그해에 졸업을 했는데, 이듬해 내쉬빌에서 운전하면서 NPR 라디오를 듣다가 프랑스 파리에 사는 한 미국인의 인터뷰를 들었다. (그 사람 국적이 미국, 캐나다, 프랑스 중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2015년 11월에 파리 바타클랑(Bataclan) 극장에서 테러 공격이 일어나 100명 넘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 미국에 사는 한 친구가 빠리 위험해서 사람 살 데가 못 되니 미국에 와서 사는 게 어떻겠냐며 진심 어린 걱정과 조언을 했다고 한다. 라디오에 출연한 그 사람은 그 친구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위험하다고? [바타클랑 테러는] 끔찍한 일이긴 했지. 그런데 있잖아. 빠리에서는 월마트에서 총 못 사. 마트가 총 팔라고 있는 데가 아닌데 미국 마트에선 총 너무 쉽게 살 수 있잖아. 그래도 미국이 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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