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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Feb 17. 2022

피부색과 안전

팬데믹과 치안, 그리고 혐오범죄

"뉴스 봤어? 어우, 너무 끔찍해..."

잠결에 들리는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떨리는 것 같았다. 

"뭐? 응? 뭔데 그래...?"

이제 막 자기가 흔들어 깨우는 통에 간신히 눈을 뜨는 중인데, 꿈속에서 조간신문을 미리 보는 능력 따위는 없는 내게 급히 알려주려는 뉴스가 도대체 뭘까? 올림픽에서 깜짝 메달이라도 땄나? 아냐, 그건 끔찍한 일이 아니잖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나? 전쟁만큼 끔찍한 건 물론 없겠지만, 지금 아내는 지구 반대편의 전쟁보다 눈앞에서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란 듯한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아내는 아침형 인간의 대표다. 먹이를 먼저 먹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던 '일찍 일어나는 새'들은 부지런함, 성실함 같은 미덕을 한데 모아 아침형 인간의 성품과 연결했다. 아침형 인간은 그렇게 모두가 칭송하는 현대사회의 모범으로 거듭났고, 한 발 더 나아가 기적을 만드는 연금술사 자리까지 넘봤다. 요즘은 열풍이 다소 수그러든 듯하지만, 너도나도 '미라클 모닝'에 도전하던 게 얼마 전의 일이다. "미모 00일째" 챌린지를 오랫동안 이어간 사람을 적어도 내 주변에선 보지 못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내 주변 사람들이니까 아무래도 나처럼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미모'보단 '미모사(칵테일)'가 더 좋은 이들밖에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새벽별 보며 일어나서 독서도 하고 명상도 하고 요가도 해봤지만, 기대했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실 주당 52시간 노동이 도입된 뒤에도 여전히 많이 일하는 한국인들은 내가 볼 땐 이미 기적을 살고 있다. 잠도 잘 못 자면서 열심히 일만 하던 사람들이 부족한 잠을 더 줄여가며 무언가를 더 하겠다는 캠페인에 뛰어드는 모습은 내 눈에는 경이롭다기보다 좀 기이할 정도였다. 

나는 대표적인 올빼미족이다. 신데렐라가 발을 동동 구르는 통금 시간이 지나야 머리도 잘 돌아가고 글도 잘 써지고 생산성이 쑥쑥 오르는 나의 프라임 타임이 찾아온다. 새벽별은 나도 종종 본다. 일이 잘 되거나, 할 일이 많은 날엔 4시 넘어서까지 무언가를 하곤 한다. 그러다 창밖을 볼 때 보이는 별이 새벽별이지 뭐 별거 있나. 기득권층 행세를 하는 아침형 인간들은 올빼미족에 자신과 대비되는 온갖 부정적인 덕목들을 덕지덕지 붙여놓았다. 늦잠, 게으름, 비효율, 낮은 생산성, '약속을 잘 안 지키는' 따위의 이미지는 태평양을 떠돌아다니다 바다거북의 몸통이나 갈매기의 날개를 옭아맨 폐그물처럼 올빼미족을 짓누른다. (이에 저항하는 반가운 기사도 있었다.)

아침형 인간은 올빼미족 위에 군림하려 할지 모르지만, 아내는 내 일상의 주기를 늘 존중하고 지켜주는 편이다. 늦잠이든 낮잠이든 잘 자야 밤에 쌩쌩하게 일할 수 있는 나를 위해 아침에는 웬만하면 곤히 자는 나를 안 깨우는 아내다. 그런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깨웠으니, 어지간히 끔찍한 일이 있었나 보다.


지난 일요일 맨하탄 남쪽 차이나타운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는 35살 여성이었는데, 크리스티나 유나 리라는 이름의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범인은 아사미드 내쉬라는 이름의 25살 흑인 남성으로, 현장에서 검거됐다. 범인은 고인과 서로 모르는 사이였으며, 마지막 주소지가 맨하탄의 한 노숙인 보호시설로 돼 있는 노숙인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범인이 피해자를 미행한 뒤 피해자 집까지 몰래 따라 들어간 다음 피해자를 성폭행하려다가 저항하는 피해자를 칼로 수십 차례 찔러 살해했다. 법원은 계속해서 범행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범인에게 보석으로 풀려날 수 없는 구속을 명했고, 검찰은 범인에게 최대 25년 징역형을 구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뉴스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아내가 왜 나를 깨웠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살인사건이 무섭고 끔찍하지만, 이번 사건은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더욱 끔찍하게 다가왔다. 

먼저 기사에서 본 피해자의 사진에 자꾸 눈이 갔다. 외모에 어떤 특징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너무나 평범해서였다. 내 친구 중에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을 것 같은 평범한 한국사람 얼굴이었다. 생김새가 너무 익숙해서 내가 아는 사람이 참변을 당한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아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두 번째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장 보러 가는 홀푸즈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동네를 얼마나 넓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동네"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아닌 곳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범인이 잠시 머물렀다는 노숙인 보호시설도, 피해자가 살던 아파트도 늘 지나다니는 거리의 끝자락에 있다. 끝이라고 해봤자 맨하탄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긴 거리도 아니다. 한 몇 km나 될까? 예전에 부모님이 뉴욕에 놀러 오셨을 때 집이 좁아서 집 근처 호텔을 잡아드린 적이 있다. 참변이 난 곳은 그 호텔 바로 근처였다.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악마가 내 일상의 공간을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린다. 


"어이쿠, 미국이 얼마나 넓은데, 여기는 괜찮아. 걱정 마셔."

가족과 전화하거나 친구들이랑 카톡 주고받을 때마다 저 말 참 많이 한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땐 더했다. 미국에 산불 크게 났던데, 비 많이 온다던데, 폭염이라는데 괜찮냐는 걱정부터 어디서 총기 사고 났다던데 조심하라는 말까지. 마음은 고맙지만, 내 삶에 미치는 영향으로 치면 한국 안방에서 '세상은 지금' 뉴스를 접하는 거나 다름없다. 실제로 TV가 있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가한 시간에 방영하는 미국 공중파 TV 뉴스의 '세상은 지금' 같은 코너를 보면 다른 나라가 아니라 다른 주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내 기준에선 다른 주라도 엄연히 같은 나라인데, 연방 국가에서는 국내외를 가르는 기준이 다른가보다.

(조금 딴 얘긴데, 미국에선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뉴스가 되지도 않는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19년에 미국인 15,448명이 총기에 목숨을 잃었다. 매일 40명 넘게 총 때문에 죽는 나라다. 총기 얘기는 아메리카노에서도 언젠가 꼭 해볼 생각인데, 어제 브런치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미국이 아니라 뉴욕으로 좁혀도 마찬가지다. 뉴욕은 도시 이름이자 주 이름이기도 하다. 뉴욕주 면적은 남한 면적의 약 1.4배다. 우리집에서 뉴욕주 최북단인 캐나다 국경까지 가려면 차로 5시간이 걸린다. (내가 운전하면 6시간.) 그렇게 땅덩이 큰 나라에 사니까 어디서 무슨 일이 났다고 해도 명실상부 '남의 나라' 얘기였다.

그런데 지난달에 아시아계 여성이 지하철역에서 선로에 떠밀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맨하탄 한가운데 있는 타임스퀘어 역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 동네에서 또 아시아계 여성이 살해당했다. 

"우리 동네 아냐. 여기는 괜찮아."라고 할 수 없어졌는데, 다행히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뉴스를 못 본 건지 말이 없다. 모르고 지나가면 좋겠다. 이번에는 짐짓 괜찮은 척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할 자신이 없다. 가족들이 어설픈 연기를 금방 눈치챌 것만 같다.


며칠 전엔 차이나타운에 새로 생긴 와인 가게에 다녀왔다. 느지막한 오후에 아내와 함께 산책할 겸 집을 나섰는데, 와인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했다. 6시가 좀 넘었으려나.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반대편에서 남자 한 명이 갈지자로 휘적휘적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큰 길가에 널찍한 횡단보도여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나가려던 차에, 그 사람은 갑자기 홱 방향을 틀었다. 그러더니 팔을 붕붕 돌리고 동작을 크게 취하며 내쪽으로 곧장 다가왔다. 마치 나랑 일부러 몸을 부딪치기라도 할 심산인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에 취해 있던 것 같다.) 다행히 부딪치지 않고 간신히 몸을 피했다. 키가 큰 남자는 다시 휘적휘적 갈 길을 갔다.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괜한 시비에 휘말리기라도 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또 하루는 아내가 미드타운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다. 걸어가기엔 조금 먼 곳이라 지하철을 타야 했다. 뉴욕 지하철은 정말 인프라에 투자를 안 하면 대중교통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여과 없이 보여주는 표상과도 같다. 묘사하려고 떠올리는 것조차 싫을 만큼 더럽고 지저분하다. 열차 시간표는 어딘가 적혀있을 텐데 안 봐도 된다. 어차피 제멋대로 아무 때나 왔다 가고 와야 할 땐 안 오니까. 무엇보다 안전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 마지막 보루도 지난달에 일어난 혐오범죄로 무너지고 말았다. 

가급적이면 안 타려고 하지만, 다른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아내는 집에 돌아올 때도 지하철을 탔다.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은 퇴근 시간과 겹쳐서 걱정이 덜 했지만, 돌아올 때는 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혹시나 몰라서 역까지 마중을 갔다. 출입구가 두 개인데, 하나는 약에 잔뜩 취한 것으로 보이는 노숙인이 막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은 흰자위를 잔뜩 드러낸 눈을 허공을 향해 치켜뜬 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욕을 하는 건지, 논쟁을 벌이는 건지 아무튼 망상, 환청, 환각 상태 중에 하나로 보였다. 한꺼번에 올 수 있는 증상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출구를 이용해 개찰구 앞까지 갔다. 다행히 사람이 제법 있어서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린 아내는 진이 빠져 보였다. 역 5개 정도를, 아마 10분 남짓 타고 왔을 텐데,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타고 온 듯한 표정이다. 마리화나 때문이었다. 

뉴욕시는 지난해 마리화나를 완전히 합법화했다. 이제 의료 목적이 아니라 기호식품으로서도 마리화나를 펴도 되고 3온스(약 85g)까지는 가지고 있어도 마약 소지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그 전에도 뉴욕에선 담배만큼 쉽게 마리화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지난여름, 주말이면 밤마다 워싱턴스퀘어 공원에 모인 파티 피플들이 피워대는 마리화나 냄새가 한 블록 떨어진 우리집까지 진동하곤 했다. 이제 큰 공원이나 사람이 모이는 데 가면 어디나 마리화나 가판이 죽 늘어서 있다. 지하철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열차 안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파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직접 시연이라도 한 건지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아내의 질린 듯한 표정을 보니 정말 있었나 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지하철인가? 시민의 안전은? 뉴욕 지하철은 시민을 위한 발이 아니다. 그냥 카오스 그 자체다.


뉴욕 거리는 점점 더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변하고 있다. 물론 뉴욕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대도시들이 다 그럴 테고, 뉴욕시는 그나마 총기 규제가 엄격한 편이니 다른 도시보다는 상황이 나을 거다. 텍사스주를 비롯해 공화당이 의회 다수당인 곳에서는 최근 몇 년간 총을 버젓이 꺼내 들고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잇따라 제정됐으니, 그에 비하면 뉴욕이 나은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에 오래 산 사람들은 예전에는 밤만 되면 밖에 다니기 위험했다면서 "요즘은 시절이 좋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여기도 점점 더 밤길을 걸을 때, 한적한 시간에 승객이 별로 없는 지하철을 탈 때 쉬이 마음 놓을 수 없는 동네가 됐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다양한 원인이 한데 어우러져 작용한 결과일 거다.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하는 가운데 코로나19 팬데믹이 세상을 덮쳤다. 노숙인들은 원래 부족했던 시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무고한 흑인 시민 조지 플로이드 씨가 경찰에 살해당한 뒤 경찰의 폭력과 구조적인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시위가 격화하면서 경찰의 돈줄(예산)을 끊어버리자는 "Defund the police" 구호가 곳곳에서 호응을 얻었다. "악마 같은 경찰을 심판해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 정치적으로 폭발력이 있는 외침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경찰의 예산을 하루아침에 삭감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경찰의 태업을 부추겨 가뜩이나 심각하던 치안 공백 문제를 더 키우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허술한 방역에 백신도 안 맞겠다는 경찰이 제법 되는 탓에 코로나19 걸리고 자가격리 중인 경찰이 너무 많아 인력이 부족해진 것도 문제였다.

집 근처 하우스턴 스트리트에 누군가 그린 조지 플로이드 추모 벽화.

같은 치안 공백이라도 모든 시민이 똑같이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아시안으로 미국에 살다 보니, 또 뉴욕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이제는 분명히 깨달았다. 나의 안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피부색이라는 것을. 미국에 살아보지 않았다면, 존재 만으로 누군가에게 공격받을 수 있는 취약한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근원적인 불안함을 몸으로 느끼지 못했을 거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내를 포함해 내 주변에 여성들이 보인 분노의 기저에는 실존적인 두려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 두려움을 잘 이해하지 못한 이들일수록 분노에 대해서 갸우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군대 다녀온 이성애자 남성으로만 평생 살았다면 분명 지금의 나보다 이해의 폭도, 약자가 느끼는 두려움에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의 품도 좁았을 거다. 경험한다고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경험하지 못하면 알기 어려운 것들이 분명 세상에는 있다. 


아내는 뉴스 좀 보라며 나를 깨우고는 날이 좋으니 혼자서 동네 한 바퀴 뛰고 오겠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의욕 넘치는 트레이닝 코치처럼 같이 뛰자고 설교하지 않는 아내가 고마웠을 텐데, 이 날은 달랐다. 아무 일 없을 거 알면서도 자꾸 걱정이 됐다. 그렇다고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같이 뛰러 나가기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약 7년째 준비 중이다.) 

아내는 한 시간 반쯤 지나 벌겋게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왔다. 힘들지만 소중한 성취를 이뤄낸 아침형 인간의 뿌듯한 표정이다. 지난번보다 1km당 기록을 20초 가까이 줄였다며, 직접 체험한 달리기의 효능을 조잘조잘 늘어놓는다. 올빼미인 내게는 아직 이른 시간, 늘 듣던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섞인 아내의 달리기 예찬이지금은 어느 때보다 반갑고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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