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란 '자기 생각을 자신이 실현하며 사는 것!'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가? 아니면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가? 우리가 관계를 맺을 때 고통을 느끼고 힘든 것은 마음의 평화가 깨지기 때문이다. 평화란 무엇일까? 개인과 개인 간의 만남에서 평화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타인과의 만남에서 평화는 왜 그토록 실현되기가 어려운 걸까?
나는 평화란 ' 자기 생각을 자신이 실현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생각을 구현하며 살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기능을 동등하게 부여해주었다. 이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평등이자 평화이며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만약 하나님이 진흙을 빚어 숨을 불어넣었다면 ( 물론 이는 은유이며 상징이지만) 세상에 내려 보낼 때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얘야! 세상에 내려가 네 생각대로 살아보거라. 네 생각을 실현하며 삶의 궁극적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찾아보거라.'
달콤한 과실에의 집착이 삶을 잃게 하는 것!
그러나 사람들은 이 가장 기본적인 평화의 토대를 잊어버렸다. 부모는 아이가 어떻게 자기 생각을 실현해 가며 사는지에 관심이 없다.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 배우자 간에도 마찬가지다. 아담과 하와가 나무 열매의 달콤한 맛에 빠져 에덴동산에서의 평화로운 삶을 잃은 것처럼 사람들 또한 어떤 성공적인 '결과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그들이 원하는 과실에 비추어' 잘한다 못한다. 옳다 틀리다. 효율적이다 비 효율적이다'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타인의 생각과 삶을 서슴없이 부정하고 반박하고 무시하게 되었다. 이로써 관계의 폭력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옳은 과실을 얻어야 한다는 집착은 끊임없이 상대에 대한 침해와 간섭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서슴없이 '네 생각은 미숙하니까 혹은 네 생각은 틀렸으니까 내 생각을 따르라.'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이것이 폭력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달콤한 과실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게 옳은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자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보라고 모든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준 하나님의 법칙을 곧바로 깨부수는 것임을 모른다. 아담과 하와가 과실을 따먹을 때까지 그들은 자기들이 삶을 잃고 있는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 내면에 있는 '자기 생각의 자기실현' 욕구와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타인의 생각이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올 좋은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에 반발하게 되고 고통을 느끼게 되고 뭔가 '아니다!'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때 이 사람이 상대방의 생각을 거절하게 되면 이때 서로 각자 자기 생각을 실현하려는 욕구로 인한 밀고 당김이 시작된다. 어쩌면 한쪽은 '자기 생각의 자기실현 욕구'를 지키기 위해, 또 한쪽은 '자기 생각의 타인 실현'욕구를 관철하기 위해!
폭력이란 '자기 생각을 타인을 통해 실현하려는 것!'
사람은 개인이면서 전체적인 존재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위대한 일들은 한 개인의 뛰어난 생각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좌하고 실현하면서 이루어진 일들이 많다. 또한 이런 일들은 정치나 경제 사회 속에서도 실현되는 일이다. 누군가 한 사람의 뛰어난 아이디어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좌하여 구현해 내는 일들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각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합의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무조건 진리가 아니다.
또한 사람은 진보의 욕구가 있어서 ( 이 진보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과실을 얼마나 빨리 따느냐에 대한 것이지만), 합리적이고 뛰어난 생각을 하는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여 자기 생각에 접목할 수가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언제까지나 그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합의에 의한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이 또한 무조건 진리로 여겨 교육과 사회 활동에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폭력이란 결국 '자기 생각을 타인을 통해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관계의 평화를 깨는 주범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 자신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인간의 자기실현 욕구 내지 자기실현 의지는 계속 팽창된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여주게 되면 그들은 어느 선에서 멈추는 법을 잊는다. 결국 자기 생각을 온 세상이 다 실현해주길 원한다. 독재자나 정복자들의 욕구가 이렇게 발현되었던 것이다.
평화로운 관계란 첫 번째 타인의 생각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침해가 곧 강요고 강요는 곧 폭력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생각을 경험하고 실현해 나갈 신성한 불가침의 권리가 양쪽 모두에게 있다는 것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한다. 이는 곧 타자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는다.
자기중심 위에 '타인 중심'의 관계 맺기
이 타자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깨어 있으면 관계를 맺을 때 자신이 '자기중심'으로 관계를 맺는지 '타인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생각의 타인 실현'에 집착하면 관계에서 '자기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자기 자신은 그에 대해 선하고 합리적이라고 자기정당화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 저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갖게 될 거야!'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자기 속임수다. 달콤한 과실에 집착하는 것 또한 자기 생각일 뿐이다. 자기 생각은 자기가 실현하면 되는 것인데 타인이 실현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상대가 자기 생각으로 달콤한 과실을 얻든 시큼한 과실을 얻든 그것은 전적으로 상대의 것이다. 설사 그의 생각의 잘못으로 그가 죽게 되어도 그것은 그의 것이다. 하나님도 그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살고 죽는 게 큰 문제가 아니다. 삶의 기간 동안에 얼마나 자기 생각을 실현하며 스스로 의미 있는 것을 찾아내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건강보조식품을 파는 사람이 있다고 치다. 이 사람은 이 식품을 먹고 의사들도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쳤고 그래서 이 식품을 파는 일에 대단히 열성적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이것을 먹기만 하면 병이 나을 텐데 왜 안 먹을까 한 사람이라도 더 이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하고 정보나 자료를 주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무조건 믿고 일단 한번 먹어보라고 설득한다. 상대방이 거절하면 이 사람은 정말 마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자기를 오해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절망하기도 한다.
이 경우 이 사람은 정말 선한 사람인가? 정말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인가? 내가 볼 때 이 사람은 관계에 대해 평화를 깨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의 타인 실현을 위해 애쓰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여 건강보조식품을 먹고 건강하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얻고 자기 자아의 실현을 하고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얼마간의 금전적 이익도 얻게 될 것이다. 그를 위해 상대방의 '자기 생각의 자기 경험, 자기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고 자기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특히 부모에 의해 아이들에게 그리고 교육자들에 의해 학생들에게 특히나 더욱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의 평화로운 관계 맺기
그렇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할까?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자기 선택과 자기 선택에 의한 협력이나 결정은 자기중심이나 타인 중심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상대의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이 온전히 존중되면 비로소 그 관계는 평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는 그 평화로운 관계의 토대 위에서' 자기 생각의 자기실현' 방식을 통해 나아가게되는 것이다.
삶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은 이 세상에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을 차이게 되면 그들은 돌을 쓰다듬으며 돌에게 사과한다고 한다.
그들은 관계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타자 중심의 사고를 한다. 그렇다고 자기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타자 중심의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건강하고 성숙한 자아를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오늘날 이 세상의 수많은 폭력과 문제 갈등 그리고 고통들이 타자에 대한 역지사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이코패스 또한 그래서 문제가 된다. 우리의 의식은 얼마나 작고 편협하게 자기중심에 붙들려 있는가? 이것을 볼수 있거나 혹은 때때로 돌아보는 사람도 흔치않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타인에게 선물을 주고자 할 때 직접적으로 건네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그 사람이 잘 다니는 길목에 자기가 주고 싶은 선물을 놓아둔다고 한다. 그러면 상대방이 그 선물이 마음에 들면 가져갈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거나 받고 싶지 않으면 그냥 놔둘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강요도 없을뿐더러 어떤 자기실현도 없다. 오직 온전한 타자 중심의 사고가 있을 뿐이다. 온전하게 '타자의 자기 생각의 자기실현'이 존중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도 순수하게 온전히 평화로운 것이다. 선물로 인해 상대방은 어떤 마음의 구속도 부담도 리액션의 의무도 가지지 않는다. 누가 선물을 주는지 조차 알지 못하게 때문이다. 그것은 허공을 흐르는 바람과 같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것이다.
이런 관계의 아름다움은 먼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주고싶은 마음(생각)에 의해 시작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온전히 타자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경험되고 실현된다. 온전히 나의 욕구가 존중됨과 동시에 타자 또한 존중된다. 관계란 이렇게 나와 타자가 함께 씨실과 날실을 엮어 짜는 아름다운 문양의 직물이다.
이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개인간의 관계에서의 비침해적인것에 대한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동의 것, 즉 타 부족에 의한 자기 부족의 침략등에 대해서는 또한 공동체 의식으로 함께 했음을 무시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