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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스 Apr 19. 2018

 슬픔의 치유

언젠가 남편과 감정 치유를 하게 된 적이 있다. 우연히 티브이에서 동물과 소통하는 여성 하이디가 방송되었었다. 이상 행동을 하는 고양이나 개 같은 반려 동물들,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주인들이 고생을 하고 돕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이디가 고양이나 개와 소통을 하면 동물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문제의 원인을 추적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하이디는 정말로 동물들하고 소통을 했다. 그녀가 제시한 해결책들은 모두 탁월한 효과를 냈다. 그런데 그녀가 사람 말을 못 하는 동물들하고 소통을 할 때면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우리도 그 과정을 지켜보면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  한국 방송분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찾아서 보았다. 


 어느 날 남편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노트북을 켜고  하이디 방송 편을 찾아 켰다. 하이디가 일본에 가서 방송한 것은 굉장히 많았다. 우리는 웃으며 보다가 또 눈물을 흘렸다.  차를 마시고 쉬다가 방송을 보면 또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그녀의 방송을 보면서 계속 울었다. 그러나 머리나 마음이 우는 게 아니었다. 그냥 몸이 울었다.  뭔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울음을 밀어 올리는 것 같았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남편은 아예 노트북을 켜고 나를 부르면서 "자! 울 준비되었지?" 하고는 티슈를 가져다 놓았다. 우리는 "이번에는 울지 말자" 하고 다짐을 하며 웃으며 말했지만 어김없이 또 울었다. 한없이 울었다. 눈물이 나는 만큼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슬퍼서 , 혹은 상실감 때문에 나오는 울음이 아니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그 생명과 소통하는 그 깊고 순수한 사랑,  종을 넘어서 기끼어 마음을 열고 하이디와 소통하는 동물들의 영혼의 순수함이 계속해서 우리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슬픔이 많았다. 성장과정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방향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책의 영향이기도 했고, 내 감수성 때문이기도 했고, 주변 환경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고 한국인이라는 무의식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의 무의식에는 너무 많은 슬픔이 잠재되어 있다. 조선왕조 500년간의 서민들을 억누른 문화,  그리고 일제 침략 등과 남북 전쟁 등등 조상들이 겪었던 슬픔은 우리 내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렇게 울고 나면 마음이 청량해지고 가벼워졌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렇게 하이디의 치유작업을 시청하면서 울고 또 울었던 것은  나에게 대단히 필요한 치유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난 계속해서 슬픔이나 부정적인 감정과 정서를 털어내고 긍정적 감정이나 정서를 키우는데 초첨을 맞추고 있다. 질병을 겪고 있는 시기에 이것은 나에게 더욱 중요한 치유작업이다. 


나는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 수용하고 허용하는 긍정적인 감정이 주가 되도록 하고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정서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여긴다. 이렇게 해서 예전에 비해 많은 긍정적인 정서를 가지게 되니까 부정적인 생각을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과 정서가 얼마나 무겁고 사나우며 사람을 파괴하는지 아주 쉽게 느낄 수 있다. 우리 어깨를 쳐지게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부정적인 감정이다. 전에 상담할 때에도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도록 도우면 내담자는 몸에서 한 20kg 정도의 무게가 사라진 것 같다고 말하는 민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처럼 청량해졌고 가뿐해졌다. 


우리는 이토록 민감하면서도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우리 감정에 들러붙게 허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모든 정서를 지배하게 하고 무의식 깊이 스며들어 두려움과 불안 분노 같은 것들을 제 멋대로 작동하게 한다. 이것들은 분명하게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스트레스가 되며, 우리의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고 소진시켜 결국 우리를 몸 혹은 마음에 병이 생기도록 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감정적 치유를 하기를 원한다. 한때 웃음 테라피가 유행했다. 요즘도 유행인지는 모른다. 이제 코칭의 세계를 기웃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과 내가 무조건 몸으로 울었던 것처럼 웃음 테라피는 무조건 몸으로 웃는다. 어떤 이유나 조건이 만들어지지지 않아도, 그게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또한 우리가 했던 울음 테라피만큼 참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울음이 일어났던 것처럼 그냥 웃음과 행복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처럼 가볍고 맑고 순수해지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쉬면서 에너지가 충전되니까 종종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난다.  어릴 적 빼고는 다시 그렇게 쉽게 가볍게 웃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과 산책을 하면서 하하하, 하고  웃는 일이 많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 가지고 웃음보가 터진다. 산위를 올라가는 토끼 궁둥이나 내 마늘 밭을 망쳐놓은 고라니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리는 한참을 웃는다. 통장에 생활비가 간당간당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리는 웃는다. 나는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게 나에게는 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10대 때나 어릴 적처럼 그렇게 웃을 수 있음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약 20년 전부터 남편은 고양이를 키우게 했다. 난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그러나 아기 고양이를 보고 키우기 시작했다.  그때는 너무도 진지하고 너무도 무거운 상태였는데 고양이의 천진난만함을 보면서 종종 웃었다.  고양이가 얼마나 내가 감정적 무거움을 빠져 들지 않게 도와주었는지 이제는 잘 안다. 그리고 요즘도 그렇다. 지난 일 년은 미미가 무려 세 차례나 아기 고양이를 낳아서 키워 입양 보내느라고 바빴지만 보내기 전까지 그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했다. 

그 아이들은 나를 삶과 생명이 본래 가지고 있는 조건 없는 기쁨과 행복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 아이들이 나에게 준 것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질병으로 그 무거움으로 가라앉아가던 나를 붙잡아 주었다.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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