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세운 왕도 아들 교육을 실패한다. 2
이 글은 "나라를 세운 왕도 아들 교육을 실패한다"의 연장으로 쓰는 글이다.
나는 20대 때 인도에 배낭여행을 갔었다. 그게 내가 내 스스로에게 주었던 야생의 경험이었다. 나는 그 여행을 위해 그때까지 모았던 전 재산을 털었고 심지어 약혼까지 깼다.
아침에 눈을 뜨고 돈을 들고나가면 아무런 어떤 음식이든 사 먹을 수 있고 어딘가를 가고자 하면 택시가 미끄러지듯이 원하는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이 모든 자동화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답답해서 숨 막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돈뿐이었고 돈을 벌기 위한 단순노동만이 필요했다. 그리고 자동 컨베이어 벨트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이렇게 사육당하듯 그저 먹고 입고 자는 것 외에 사람다움, 세상 다움 그리고 삶 다움을 느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인도 여행에 대한 수많은 괴담들이 젊은이들이 기꺼이 자기 삶의 야생으로 나가는 것을 발목 잡고 있었다.
"인도 여행 가는 여자는 걸레다!" "인도는 정말 위험한 나라다." "조심해!" 인도를 가겠다고 하면 제일 먼저 하는 말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납치와 강간 같은 이야기였다. 심지어는 아주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의 어떤 여자가 어떻게 어떤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이야기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조심하라고 선의를 가지고 해주는 말이었지만 너무 끔찍한 이야기여서 여행 의욕을 꺾기 일쑤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여행 내내 만나는 한국 여행자들에게서도 또한 들어야 했다.
인도는 정말 내 삶의 야생이었다. 모든 게 충격이었고 상상을 넘어선 것들이었다. 칙칙하고 우중충한 회색빛 건물들과 땟국물이 흐르는 가난한 얼굴의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그들의 해맑은 얼굴이었다. 기차역 광장은 집이 없는 그들이 남자 여자 아이 엄마 아이 할 것 없이 즐비하게 누워서 잠을 잤다. 길거리를 가면 아이들이 돈을 달라고 몰려들었고 어떤 이들은 내가 탄 택시를 세우고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구걸을 하기도 했다.
"나는 가난하지 않는구나!"
인도는 나에게 첫 번째 치유와 해방을 주었다. 바로 '나는 가난하다'는 의식에서의 해방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쥐뿔도 없는 가난뱅이 청년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만 쌓아놓은 것이 없었을 뿐 하루하루는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여행하는 기간 동안이지만 나는 그들에게 뭔가 작은 것이라도 줄 수 있었다. 물론 더 줄 수 없을 때는 또다시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이 밀고 올라오긴 했다.
그곳에서 나는 생에 처음으로 완전한 자유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그것은 톰 행크스가 나오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느낄 수 있는 오랫동안 갇혀있던 좁은 감옥을 나와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그런 자유가 아니었다.
인도에서 느꼈던 그 자유는 뭔가 허전함이었다. 곁에 있던 것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 나를 지지하고 채워주던 것들이 사라져서 혼자 갑자기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허전함이 그 비틀거리는 느낌이 참 좋았다. 나를 채우고 있고 나를 붙들고 있던 것들은 나를 제한하고 구속하던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늘 친구인척 하며 곁에 있던 것들이었지만 사실은 나를 옭아매고 홀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것들이었다. 여행지에서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던 그 모든 것들 없이 혼자 기우뚱 거릴 때 나는 언젠가 내가 정신적으로 상쾌하게 홀로 설 수 있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 홀로 느꼈던 그 자유는 또한 불편함이었다. 물론 그 자유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와서 모든 것을 다 직접 수동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자유였다.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도시에서 도시를 이동하는 일은 엄청난 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물건을 사고 잔돈을 제대로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고 하룻밤 잠을 잘 곳을 찾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내 모든 감각과 기억과 정보가 온전히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자유였다. 나는 어떤 누구의 간섭 없이 그리고 광고나 정보의 간섭 없이 온전히 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내가 갈곳과 내가 만날 사람과 내가 먹을 것과 내가 가지고 싶은 것과 내가 머물 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온전히 그렇게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자유는 나를 느끼게 해주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내 중심이 되었고 내 자아의 토대가 되었다. 내 몸은 온전히 내가 100퍼센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내 것이었고 내 생각과 감정 또한 그랬다.
그 야생은 내 정신의 탄생지였다.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 스스로 절제하고, 두려움과 부딪히고 넘어서며 나름대로 세상을 깨치며 온 세상에서 온 사람들과 사귀며 흠씬 사람 냄새를 맡았다.
인도는 온 세상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한국인들은 20대가 넘어서 여행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십대들이 아주 많았다. 영국에서 온 친구들은 그곳에서 히말라야를 오르고 래프팅을 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 야생을 마음껏 즐기고 놀이터로 만들고 있었다. 미국 친구들은 히말라야 산속 곳곳에 숨은 티벳 절이나 명상센터를 모조리 점령하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만나면 서로 포옹하고 정보를 교환했다. 이스라엘 친구들은 그 지방의 주요 보석들을 싸들고 다녔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만나면 언제나 인도의 불편함에 대해 불만투성이였다. 그들은 위험한 것과 속은 일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것들에 대해 불평했다. 그들은 불만이 가득한 미성숙한 어린아이 같아서 끊임없이 투덜댔다. 그들은 야생을 즐기기는 커녕, 야생에 맞서 자신을 확장시키고 강하게 단련시키기는 커녕 온통 야생이 가진 위험에 대해서만 촉각을 곤두세우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야생을 이길 힘도 없으면서 매사 늘 싸우고만 있었다.
이태리 남성들은 매력적인 여성이 있으며 온갖 깜짝 놀랄 방법을 만들어 여자를 감동시키는데 한국 남성들은 자신들을 선택하지 않고 외국 남성과 친구가 되는 여성들을 비난하기만 했다. 한국인들은 가지고 온 음식은 나누어 먹었지만 좋은 스승이 있는 곳이나 좋은 장소에 대한 정보는 감추었다.
한국인들은 야생의 경험이 적었고 야생에 대해 무지했다. 야생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자기 매력을 발산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비자를 연장하는 등의 문제가 생기면 돈을 주고 쉽게 해결하려다 오히려 더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인도나 네팔에 나가 있는 한국인 기업의 직원들은 왕자나 황태자처럼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야생으로 나가는 문을 일찌감치 닫아 버린 한국적 상황에서 자란 한국인들은 일처리 방식과 대인관계 그리고 자기 인생을 즐기고 향유하는데 훨씬 미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이스라엘 교육이 질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것은 비단 탈무드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녀들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여행을 보내는 관례가 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온 세상을 여행한다. 여행지의 인사말을 배우고 토속 음식을 먹어보고 나태해보기도 하고 그들은 기꺼이 모든 모험과 경험을 자신들에게 허락한다. 그들은 그렇게 야생에서 성장하고 살아가는 법을 깨우치며 교역하고 교류한다.
그렇게 야생을 정복하며 자란 아이들은 낯선 사람을 보고 수줍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차분하다. 그들은 당황스러운 일이 생겨도 마치 구루처럼 초연한 자태를 보이기도 한다. 야생에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믿는 믿음의 크기를 충분히 키워가기 때문이다. 또한 야생에서 성장한 남성은 자신의 정신적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긴다. 미지의 세상을 즐기고, 모르는 것을 즐기고, 신을 즐기고, 신의 탐구를 즐기고, 자신을 탐구하고 내 던지고 느낀다. 그런 그들은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들과의 대화 자체가 풍요였고 그들 자체가 선물이었다. 그들과의 교류는 늘 행복했다.
그들은 여자든 남자든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거나 패션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없다. 오히려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이었다. 그 존재 자체가 그토록이나 생생하고 아름다운데 그위에 화장을 하는 짓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정하고 감추는 짓이었다. 화학적으로 만들어 팔아먹는 파우더 따위가 얼굴의 잡티를 가린다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대신할 순 없었다.
난 야생에서 빛이 나는 아이였다. 야생은 순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내 안에 어떤 보석이 들어있는지 궁금해했고 느끼고 싶어 했고 말해주길 기다렸다. 수줍음이 많았지만 나는 그들과 마음을 열고 교류했다. 그러면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것들을 뛰어올랐다. 그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마치 과거의 허물처럼 벗어버렸다.
그곳에서 경험들이 내 자아를 형성하고 빛나는 정신을 형성하고 그리고 내 삶을 살아나갈 힘의 원천이 되어 준것들이 실로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