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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스 Nov 13. 2015

나라를 세운 왕도 아들 교육을 실패한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큰 아들 주표를  후계자로 정하고 교육을  시키는데 주표는 마음이 너무 곱고 심약하다. 

그는 아버지가 배신자들이나 간신들을 처벌하거나 처형할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주원장은 그런 아들 주표를 감싸고 다독이며 인내심을 발휘하는데 주표는 점점  힘들어한다. 


어느 날 주원장은 가시가 돋은 긴 풀을 뜯어서 아들 주표에게 주며 말했다.

"이 가지를 만져보아라."

 그러나 아들 주표는 

"가시가 많아 만지지 못하겠사옵니다. " 

하고 말한다. 

 

그러자 주원장은 자기 손으로 가시를 훑어낸다. 황제의 손에 피가 흐른다. 주표는 피를 보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주원장은 다시 가지를 건네준다. 

"이젠 만질 수 있겠느냐? 

"가시가 사라졌으니 만질 수 있사옵니다." 

주표는 두려움에 떨며 가지를 받아 든다. 


"이게 아버지 마음이다. " 

주원장이 주표를 보고 말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아들 앞에 생겨날 가시들을 미리 제거해 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너무 무섭고 잔인하게만 느껴진다. 


주원장은 주표에게  다시 묻는다.

 "그 풀 가지를 어디에 쓰는 건지 아느냐?"


"이 풀은 말을 채찍 할 때 쓰는 것이옵니다." 

아들  주표가 대답한다. 

황제인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간절하게 말한다. 

"그것은 말을 채찍 할 때 쓰는 것이지만 그것을 달여 마시면 속에 독을 풀고 혈액을 잘 순환하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서움에 벌벌 떨고만 서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을 만큼  내적 시야가 크지 못했던 아들은 착하고 좋은 아들이었지만 끝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의 왕국을 계승하지 못한다. 

그는 넋이 반쯤 나가버린 채 두려움에 떨다 끝내 죽어버렸다.


수많은 아버지들이 아들의 앞길에 가시를 미리 제거해 주려 한다. 자신은 아들보다 앞서 세상을 살아왔으니, 장차 아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아들 앞에 출현하게 될 가시를 미리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교육은 실패할 때가 많다. 


수도 없이 목숨을 내놓고 몸 숨길 곳 하나 없는 허허벌판을 달리며 적들을 베고 나라를 세운 황제는 자기 아들은 그런 모진 것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아들은 안전한 황궁에 두고 황궁을 위협할 간신이나 배신자들이 있으면 가차 없이 처형한다. 간신배들이나 배신자들 탐관오리들은 자신이 죽으며 분명히 아들의 왕국에 위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호위병을 붙여주고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세상에서 똑똑한 모든 선생들을 붙여주고 세상의 모든 책은 다 모아놓은 서가를 준다.  

그런데 그런 아들은 못 배우고 무식하고 배고프게 자란 아버지에 못 미친다. 나라를 세운 황제도 아들 교육은 실패한다. 


아들 앞에 가시를 제거해 주는 것이  채찍을 때리는 것과 같은 일만은 아니다. 황궁의 미래를 볼 때 그것은 오히려 황궁 내부의 독을 풀어내어 황궁의 모든 일들이 원활하게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사람들을 엄격하게 대하고 법률에 따라 판단하고 벌주고 죽이는 것이 무섭기만 한 것이다. 그것이 미리 나라의 독을 미리 풀어내는 일임은 볼 수 없다. 나라를 세운 강력한 황제가 죽은 후에는 또 다른 강력한 자가 나라를 탐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부릴 것이고 도전을 해 올 것인데 아들은 미리 그것을 알 수 없다. 아버지 혼자 속이 타 들어간다. 


이 교육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아들에게 물려 주었어야 하는 것은 황제의 자리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달리던 야생의 들판과 배고픔과 전우들의 우애와 맞서 싸우던 적들 또한 함께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아버지가 정말 아들에게 주고 싶었던 넓은 시야와 통찰력 지혜와 용기 그리고 대장부의 강단을 줄 수 있게 되고 그래야 황제의 자리를 물려줄 수 있는 것이다. 


야생을 잃은 남성을 불행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성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야생은 남자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야생을 뺏긴 남자는 성장하기 어려우며 용기와 통찰과 리더십을 기르기 어렵다. 황제 그 자신이 거친 야생에서 황제로 성장했음에도 야생이 너무도 좋은 배움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야생에 감사하고 야생을 내면으로 받아 들이지 못했다. 그곳은 죽음이 칼 춤을 추는 곳이고 배가 고파서 억울해서 나와서 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가시와 고통의 장소이기만 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 또한 아들에게서 야생을 빼앗았다. 그는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아들을 왕에 걸맞은 틀에 넣기 위해, 아들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정형화하려 했다. 이미 야생을 맛보고 야생에 마음이 가있는 아들은 아버지가 내미는 틀속에서 살 수 없다.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이 옳다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틀에 아들을 넣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야 안전하게 왕위를 물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조는 왕위를 얻으면서 두려움 또한 같이 얻었다. 그것은 어쩌면 왕위를 빼앗기거나  유지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그 두려움이 자신의 것이고 자신이 극복해야 하는 것임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는 자기 두려움을 넘어서는 대신 자기 두려움의 뒤주 속에 자기 아들을 가두려 했다. 그것이 아들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과 두려움을 겪지 않게 하는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주원장처럼 아들의 앞길에 가시(왕위를 잇고 왕위를 지키는 일)를 미리 제거해 주고 싶었다. 자신은 그 가시가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들이 뛰고 놀며 성장할 드넓은 야생을 빼앗고 뒤주 속에 가두면 결국 아들은 죽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왜 자기 눈으로 아들이 뒤주 속에 들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것일까? 그 자신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  아들이 죽을 거란 것을 결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가두어 목숨을 빼앗은 뒤주는 영조의 마음의 틀이다. 또한 상징적으로 영조가 아들에게 한 모든 행위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영조는 죽을 때 까지 이런 자기 무의식적 드라마를 현실로 실행하면서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수많은 부모들이 자기 무의식의 드라마를 자기 아이에게 실행하는 것을 본다. 강력한 무엇으로 두려움에 쌓인 그들의 신념을 깨트려 주지 않는 한 그들은 그 드라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부모는 아들에게 주려면 다 주어야 한다. 아버지가 주고 싶은 것만을 주는 것으로는 안된다. 통째로 주어야 한다. 아버지의 실패와 고통까지도 모두 주어야 한다. 아버지가 달리던 전쟁판의 위험과 들판의 고독 또한 줄 수 있다면 주어야 한다. 그곳에서 성장해 낸 아들만이 아버지의 성공을 물려받을 힘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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