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스 Dec 19. 2015

금수저, 흙 수저

난 본래 유행에는 민감하지 않다. 유행하는 옷이나 말이나 드라마 등 그것들이 유행할 당시에는  모르쇠하고 있다가 유행이 한참 지난 후에나 한번 흘낏 쳐다보는 스타일이다. 금수저 흙 수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수도 없이 들었다. 난 그 말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젠 흙 수저에 지친 청년들이 자살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뭐가 잘못되었는지 아침에 조금 생각해 보았다. 


금수저 물고 태어났냐? 는 하나의 은유다. 태어날 때의 부모의 물질적 능력과 환경을 이르는 말이다. 그에 반대하여 부모가 돈이 없고 물질적 환경이 좋지 않으면 흙 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말이든 유행을 하다 보면 그게 절대 사실이고 절대 진리인양 힘을 얻게 된다. 이때부터가 프루크루테스의 침대와 같은 폭력이 나타나는 때다.  


나는 치유가다. 치유의 가장 기본적인 스텝은 자기 수용이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금수저들과 흙 수저들의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왔다면 나는 '흙 수저를 사랑하라.' 혹은 '흙 수저를  받아들여라 라'고 제일 먼저 말해야 한다. 그러면 이 세상의 불평등하고 불균등한 경제구조와 부의 분배구조를 찬성하고 지지한다는 말이냐 하고 반발이나 저항이 올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이건 서로 포인트가 엇나가서 엉뚱한 것으로 결론을 갖다 붙인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구조가 불평등하고 악법이 많고 개선해야 할 여지가 많으며 노동 착취구조를 가지고 있고 부의 분배 또한 지나치게 부자들에게 몰려있다는 관점을 지지한다. 그리고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모든 불행과 고통의 문제가 금수저가 아니어서 생겨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나의 흙 수저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흙 수저다. 그게 나는 좋다. 내 어머니 아버지가 가진 것 없이 산에 기대에 약초 뜯어 우리를 키우고 땅 파서 농사지어 목숨을 연명하게 해 주신 것이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 죄 지은것 없고 세상을 속인것이 없어서  좋다 고 생각한다.  


자신의 흙 수저를 사랑하고  받아들인다고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을 바꾸려면 자신의 흙 수저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누군가는 금 수저부터 시작하지만 나는 흙 수저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누군가 오히려 흙 수저가 아니라 금 수저부터 시작해서 다행이다. 내가 금 수저고 그가 흙 수저였다면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또 나는 얼마나 정신없이 천방지축으로 이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 잘났다 생각하며 상처를 주고 불평둥 구조를 유지하는데 힘을 쏟으며 살았을까? 또한 금수저로서 더 나아갈데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의미없고 허망할까? 또한 금수저로 태어났다면 지금까지 경험해왔던것들은 절대 맛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저항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규정 한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은 거부하고 저항하는것으로 바꾸어지 지지 않는다. 수용하고 사랑하고 자원화해야 고통을 만들어내기를 멈추고 변화를 향해 나갈수 있다.  


금수저들은 행복하지 않다. 나는 수도 없이 불행한 금수저 물고 태어난 그들을 보아왔다. 좋은 집 좋은 차 돈 걱정 없는 것이 결코 행복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금수저들에게 힘을 주는 것은 흙 수저들의 부러움이다. 흙 수저들이 금수저를 부러워하면서 그 세계로 진입하려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그들은 그것으로 자기들의 존재 명분을 삼을 뿐이다. 오히려 흙 수저들의 부러움과 좌절이 금수저들의 세계를 지탱해줄 뿐이다. 


금수저들의 성에 쌓인 부와 물질들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평등하게 배분되고 골고루 나누어져야 한다.  그 뿐이다. 이 세상에서 물질은 사람 몸의 혈액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온 몸을 골고루 순환해야 하는 것일 뿐 그게 특정 장기에만 몰려있으면 그 장기도 병이 나고 온 몸 자체가 결국 병에 쓰러지는 것과 같다. 어느 특정 장기에 혈액이 모두 몰려있다고 혈액이 부족한 장기가 그 장기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똑같이 병이 나서 함께 쓰러질 것이 뻔한 일이다.  금수저가 부러울 것도, 좋을 것도, 더 나을 것도, 더 행복할 것도, 더 고귀할 것도, 더 도덕적이고 더 선 할 것도 하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현실을 우리가 바라는 이상으로 만들어 가는 한 걸음씩을 쌓아나가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금수저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흙 수저들에게 치명적인 고통이자 약점을 줄뿐이다. 그것은 흙 수저가 금수저에 종속되도록 만든다. 부러움 자체가 금수저가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꼴이 된다. 반대로 흙 수저를 불행한 것으로 규정짓게 된다.

 

흙 수저는 흙 수저를 사랑해야 한다. 철저하게 흙 수저들끼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참된  삶과 사랑의 의미가 흙 수저에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무도 금수저를 부러워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면 금수저들은 경계를 풀게 될 것이다. 구태여 그토록 높고 날카롭게 자기들의 경계를 쌓아 올린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삶을 살아가는 개인의 마음 상태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경제적 정치적 제도에 대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경제적 정치적 제도 또한 이런 흙 수저들의 마음의 상태를 바탕으로 바꾸어 나가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히말라야 신비의 경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