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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스 Dec 21. 2015

흙수저에게 영광을!

지금 검색해보니 내 기억속의 그 책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이란 책이다. 내 기억속에는 "꽃들에게 영광을!' 이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몇권의 책이 어쩌면 내 삶의 틀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중 하나가 이책이다. 


저 꼭대기는 분명 하늘에 닿아 있을 것이고, 그곳은 분명  천국 일것이다. 그 천국이 있음을 믿고 그 꼭대기에 있는 천국을 보기 위해 벌레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탑이 쌓여지고 있었다. 검은 줄무니 애벌레는 태어나서 그저 먹고 자고 시간을 보내는 무의미한 일을 떠나 뭔가 의미있는 일을 찾아 길을 나서 이 거대한 탑과 마주 하게 되었다. 

인간으로 치면 이 거대한 탑을 마주했을 때는 아마도 유아기와 아동기를 벗어난  청소년기나 청년기쯤 될 것이다. 청소년기나 청년기가 되면' 어디에 어떤 어떤 탑들이 있다. 그리고 그 탑 꼭대기에는 뭐가 있다!'하는 소리들을 듣게 되고 급기야 '성공하려면 어느어느 탑을 반드시 올라야 한다.'는 압박에 쫒기게 된다. 누구든 어느 날엔가는 어떤 탑 아래에든 서게 될것이다. 탑을 오르기 위한 나름대로의 탐색과 준비를 마치고 그리고 보통의 청년들이라면 그 탑을 올라가는 일이 시작될것이다. 


탑은 아래서 올려다보면 끝이 없어 보이고, 거대하고, 미끄럽고, 오르는 일이 쉽지 않다. 수많은 벌레들이 경쟁을 하며 서로의 몸을 밟고 올라간다. 경쟁에서 진 놈은 탑의 일부가 되고 경쟁에서 이긴 튼튼하고 센 놈은 계속해서 동료의 몸을 밟고 탑을 올라간다. 탑을 오르다 미끄러져 떨어져 죽는 벌레들도 부지기 수다. 부지런히 오르지 않으면 다른 벌레에게 밟히게 된다. 자신의 발에 밟혀서 수도 없이 아야! 아야! 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흘리고 못 들은 채 하며 계속해서 올라간다. 


우리 부모 세대는 한때 그렇게 탑을 올라 자식에게 금수저로 밥을 먹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탑 위에 오르면 금수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런 기대와 희망이 우리를 끊임없이 탑을 오르게 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인간 세상의 탑은 더욱 높고 더욱 가파르게 세워졌다. 탑을 오르는 온갖 편법들이 난무하기도 한다. 그 탑을 오르다 흙 수저를 금수저로 바꿀 수 없다는 회의를 품고 탑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속출하기도 한다. 


탑을 오르던 검은 줄무늬 애벌레는 문득 그 안에 있던 작은 양심을 깨워냈다. 자기가 밟고 올라서 있던 작은 노란 줄무늬 애벌레의 아야!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 있을 천국, 금수저에 대한 기대가 동료의 몸을 밟고 올라설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회의한다. 그래서 노랑 줄무니 애벌레와 함께 탑을 내려와 숲으로 들어간다 


숲에서 둘은 함께 살고 사랑하고 행복하게 지낸다. 행복은 저 탑을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둘은 깨우쳤다. 탑이란 그저 부질없는 소문과 어리석은 기대에 의해 세워지는 것 뿐이며 동료의 몸을 밟고 떨어트리며 기어 올라가 경쟁에서 이기고 승리하여 탑 위에 우뚝 선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땅을 기고 나뭇가지 위를  기어오르고 나뭇잎을 먹고 나뭇잎 위에서 사랑을 하는 이 흙 수저의 삶보다는  더 의미가 있거나 더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두 애벌레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흙 수저의 삶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찾고 추구하던 성질 급한 검은 줄무늬 애벌레는 그 평범한 흙 수저의 행복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  저 탑 위에는 뭐가 있었을까? 다 채우지 못한 호기심이 자꾸  불쑥불쑥 일어났고 급기야 중간에 그 탑을 내려온 것을 후회했다.그때 만약 저 탑을 내려오지 않고 끝까지 올라갔다면 어쩌면 지금은 탑 꼭대기의 천국에서 살고 있을지도 몰라. 검은 줄무니 애벌레는 스스로 포기한 금수저에 대한 미련과 회한이 남아서  사랑하는 노랑 줄무니 애벌레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검은 줄무니 애벌레는 천신만고 끝에 탑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탑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천국도 없었고 천사도 없었고 지금까지 올라온 것보다 더 높은 하늘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믿지 않고 아래에 있던 애벌레들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탑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 평원에 수도 없이 비슷한 크기와 높이의 탑들이 세워져 있었다.  검은 줄무니 애벌레의 모든 생의 의미가 한 순간 무너져 버렸고, 허무했고 살아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가질 수 없던 순간이었다. 


그때 한번도 보지 못했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름다운 날개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노랑나비를 보게 된다. 아! 저게 천사인걸까? 그러나 그 노랑나비는 노란줄무니 애벌레가 탈바꿈 한것이었다. 검은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나비를 보고 그것이 모든 벌레들의 궁극적 운명임을 알게 되었다. 벌레의 운명은 그저 신물나게 땅위를 기어다니다 일생을 마치는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것을 벗어날 유일한 길은 동료의 몸을 밟고 올라서는 탑이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탈바꿈이 있었다.온전히 자가자신을 받아 들이고 땅을 기고 나뭇잎을 갉아먹고 잠을 자고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그 무의미한 것 같은 삶의 끝에는 찬란한 변형의 시간이 있었다. 그 변형을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고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었다. 


 검은 줄무니 애벌레는 그 변형을 위하여 다시 탑을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을 내 팽개쳤던 흙수저의 숲속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것 보다 더 어렵고 더 위험천만했다고 전해진다. 


 탑을 내려와 숲으로 들어간 검은 줄무니 애벌레는 나무위로 기어 올라간다. 그리고 아주 많은 나뭇잎을 갉아먹고 토실토실 살이 찐다. 그리고 계절이 되자 자기 몸에서 실을 뽑을수 있게 되었다. 


자기 몸에서 실을 뽑을줄 알게 되는 때가 사람으로 치면 언제가 될까? 사람에게도 이런 때는 필연적으로 온다.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이 몸을 키우고 그리고 쌓아왔던 지식들과 경험들이 뭔가 신비로운 물질로 변해 그것을 세상으로 끄집어 낼수 있는 때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어떤 이들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회의 약자를 위한 희생이나 봉사로 그것들을 끄집어 낼것이다. 이때가 어른이 되고 이때가 자기삶을 위한  변형을 하는 떄이다.  


우리들의 삶을 어떤가?  과도하게 탑으로 내몰린 삶, 탑을 결코 떠날수 없게 하는 편협한 정보들과 현실 구조. 끝없이 먹고 먹고 먹으라며, 부족하다! 부족하다! 모든게 부족하다! 외치는 광고들에 폭격당하는 일상들, 그래서 결코 자기 힘으로 흙수저로 되돌아가지도 못할 뿐더러, 죽으면 죽었지 스스로 자기 삶의 변형을 위한 전환점을 만들어 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자기 몸에서 뽑아낸  실이 자신의 고치가 되고 검은 줄무니 애벌레는 고치속에서 겨울을 난다. 이 고치는 변형을 위한 장소다. 그안에서 자신과 연결되었던 모든 환경적인 것들이 끊어진다.먹이, 음식, 수분, 사랑과 지지,온기없이 오직 그 자신 내면의 힘으로 겨울의 그 시간을 버티어 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몸이, 새로운 정신이, 새로운 삶이 만들어진다.  외부의 그 어떤 물질적 공급을 모두 없애자 그동안 거친 나뭇잎을 먹고 만들었던 몸속에서,  가장 정묘하고 신묘한 물질의 정수를 빨아 올려 새로운  몸을 만들어 내게 되는것이다.  


때가 되자 애벌레의 외피가 갈라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연금술적으로 변형된 새로운 나비의 몸이 탈피의 갈라진 틈으로 나온다. 변형이다. 그리고 연금술적 탈바꿈이다. 그리고 해탈이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경쟁에 이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실현에 있다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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