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22개월, 그리고
쓰기 위해 쓰는 휴가는 독립출판물을 만들기 위해 떠난 집필 여행의 기록입니다. [J]와 [ㅈ]가 함께 쓰는 글이라, 같은 제목의 글이 두 편씩 업로드됩니다. 에피소드 제목은 그날을 가장 잘 담은 노래이니 들으며 읽으시길 권합니다. - J
몇 년 전에 집에 도둑이 들었다. 집에서 혼자 뒹굴거리다 미용실에 가려고 내가 잠시 집을 비운 2-3시간 동안 다녀간 그분. TV에서만 보던 과학수사대를 우리 집에서 실사로 보게 되는 날도 오더라. 그날 빈집털이범이 남긴 건 두 가지쯤이다. 추리물을 좋아하는 나에겐 꽤 가혹하게 다가왔던 TV 과학수사대와 현실 과학수사대의 상당한 갭, 그리고 과학수사대보다는 옆집 아저씨에 가까워 보이는 그들이 내가 늘 뒹굴거리던 거실에서 찾아낸 그 크고 낯선 발자국.
그 이후로 집에서 잠을 편하게 못 잔다. 일찍 잠들면 두 시, 가끔은 자는 동안 누가 들어올까 봐 심장이 쿵쾅거려 새벽 네 시 넘어서도 눈을 못 감곤 했다. 여기만큼은 안전할 거라고 굳게 믿는 공간에, 내가 초대하지 않은 낯선 사람이 언제든 헤집고 들어올 수 있다는 건 가능성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꾸는 악몽의 대부분은 누군가 집에 들어오는 꿈이다.
잠을 잘 못 잔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좀 안타까워하거나 스트레스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그 이유를 집요하고 상세하게 물어본 건 ㅈ이 처음이다. 생각해보니 ㅈ이 묻기 전까지 나 스스로도 그 계기가 뭐였는지 찾으려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잠을 못 잔다고 생각했다. ㅈ에게 대답을 해주려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찾은 게 그 발자국이다. 그 전에도 불 끄는 걸 무서워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누가 쳐들어올까 봐 불안해서 잠 못 이룬 적은 없었으니까.
어젯밤엔 한동안 안 꾸던 악몽을 꿨다. 계기를 알게 된 이후로는 꽤나 뜸했는데, 휴가 때 악몽이라니. 자다 10번 정도 깼다. 그리고 다시 잠들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눈꺼풀은 무거운데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일찍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으로 먹을 토스트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ㅈ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새벽에 한두 번 정도는 깼을 ㅈ은 오늘따라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갈수록, 뒤를 돌 때마다 꿀잠을 자는 ㅈ을 보게 될수록 왠지 짜증이 났다. 잠에서 깬 ㅈ, 딸기잼을 토스트에 바르는 ㅈ, 버터를 바르는 ㅈ,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무는 ㅈ. 그 모든 ㅈ을 바라보는 시선이 평소보다 따갑다는 걸 눈치챘던지, ㅈ은 아침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나를 다시 재웠다. ㅈ은 참 상황 판단이 빠르다.
한숨 자고 나서도 여전히 눈꺼풀에 남은 피곤을 앗아간 건 맥북 키보드였다. 스페이스바와 아래쪽 방향키, 두 개의 키감이 단번에 느낄 정도로 무뎌졌다. 평소 타이핑하는 습관대로 치면 띄어쓰기 한 번을 위해 스페이스바를 두세 번은 눌러야 했다. 아, 어제 ㅈ이 맥북을 떨어뜨렸지 참.
옆자리에 앉아 평온하게 글을 쓰고 있던 ㅈ의 눈치를 살폈다. 이걸 어떻게 ㅈ 몰래 고칠 수 있을까. ㅈ은 향후 15년 간 고장이 나면 수리비는 자기가 내겠다고 했지만, 무거운 가방을 잠시 들어주겠다고 하다 일어난 사고를 가지고 ㅈ에게 수리비를 물어내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ㅈ은 착한 거짓말을 싫어한다. 같은 회사에 다녀 퇴근을 같이 하는 ㅈ을 따돌리고 혼자 맥북을 고치러 가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거짓말이 들켜 후폭풍이 오는 때는 ㅈ이 수리비를 내는 것보다 더 괴로운 순간이다.
브런치를 썼고, 밥을 먹고, 볼링장 앞까지 갔다가 오늘도 레일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고 돌아섰고 하는 등의 자잘한 일들이 있었지만 자세한 순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이 어느 쯤엔가 내가 고민 끝에 ㅈ에게 맥북이 이상해졌다는 걸 고백했고, ㅈ의 낯빛이 창백해지는 걸 봤다는 것만 똑똑히 기억한다. 낯빛은 창백해졌지만 여전히 상황 판단이 빠른 ㅈ이 맥북 수리비를 알아보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한 후에 우리는 맥북이란 얼마나 유지하기 힘든 물건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ㅈ은 키보드 하나에 드는 수리비용을 지불하는 것보다는 새 맥북을 사고 내가 쓰는 맥북을 자기가 쓰겠다고 했다. 많이 놀란 ㅈ의 상황 판단 능력이 무뎌져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수리비용이 과도하게 드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고 새 맥북을 사는 건 그것대로 엄청난 지출이었다. 게다가 계획에 있던 일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새 맥북을 사주겠다고 했으면 듣자마자 광화문 한복판에서 무반주 댄스라도 췄겠지만, 소비습관이 어떤지 뻔히 알고 있는 ㅈ이 새 맥북을 사주겠다니 갑자기 이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다. 한참 토론을 하다가 맥북을 끌어당긴 지구의 중력마저 원망스러워지던 그때 ㅈ이 말했다.
너한테 새 거 사주는 건 안 아까워. 기분 좋게 쓰는 거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오픈마켓에서 제공하는 것 중 제일 긴 할부기간인 22개월을 택한 ㅈ은 홀연히 주문을 마치고 고슴도치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갔다. 22개월 동안 맥북 값을 내야 하니 그동안은 잘 만나자는 조건을 남기고.
집에 다녀온 ㅈ은 나와 새벽 2시까지 카페에서 글을 쓰고, 그날도 언제나처럼 졸려서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누가 누구를 재워줄 것인가에 대해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동시에 잠이 들었다. 그날은 한 번도 깨지 않았고, 개운하게 ㅈ보다 먼저 눈을 떴다.
자고 있는 ㅈ을 돌아봤다. 오늘도 죽은 듯이 자고 있다. 어제 서로 재워주겠다 실랑이를 벌일 때, ㅈ은 내가 밤에 잘 잠들지 못하니 이제 나보다 늦게 자는 것에 익숙해져야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ㅈ의 눈꺼풀은 당장이라도 내려올 것 같았다. 맥북 사건으로 미안해서 시무룩한 나에게 몇 번이고 기분 좋게 쓴 거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던 ㅈ의 옆에 놓인 ㅈ의 휴대폰. 그 깨진 아이폰 액정을 수리하는 데 몇 개월이 걸렸다. 기분 좋게 썼다는 돈의 액수가 ㅈ에게 갖는 크기를 생각할 때, ㅈ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굳이 졸리지 않다고 우겨대던 이유를 생각할 때, 나는 새삼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된다.
가끔 기분 좋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코팩을 해주거나, 이상하게 멘 목도리를 내가 다시 고쳐 메주는 따위의 사소한 일에 ㅈ은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감동하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 쪽은 나보다 ㅈ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할부가 끝날 때까지는 약속대로 ㅈ을 잘 만나야겠다 생각했다. 아침으로는 역시 어제 산 누룽지를 끓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22개월쯤 될 때 다시 맥북이 든 가방을 ㅈ에게 슬며시 맡길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난 특별한 것 같진 않아
그래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