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ㅈ] 투닥투닥 잠들기
쓰기 위해 쓰는 휴가는 독립출판물을 만들기 위해 떠난 집필 여행의 기록입니다. [J]와 [ㅈ]가 함께 쓰는 글이라, 같은 제목의 글이 두 편씩 업로드됩니다. 에피소드 제목은 그날을 가장 잘 담은 노래이니 들으며 읽으시길 권합니다. - ㅈ
잠 못 드는 밤이면 누나는 어김없이 H.O.T. 테이프를 틀었다. 어두운 밤이 무서웠던 초등학생 동생은 노래 제목은 물론이거니와 누군지도 모르는 목소리에 기대 이불을 뒤척였다. 누나의 손끝에서 재생된 테이프가 철컥- 소리를 내어 멈추면, 후다닥 일어나서 테이프를 B면으로 돌려놓는 건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그 짧은 틈에 누나가 잠들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동생 마음도 모르고 누나는 매번 B면이 다 끝나기 전에 잠들었다. 의리 없게.
H.O.T. 테이프를 끝까지 다 듣고서야 잠들 수 있었던 초등학생은 나이를 먹고 또 먹어 회사원이 되었다. 늘 피곤한 상태를 유지하게 도와주는 회사 덕분에 잠들지 못하는 걱정 따위는 깔끔하게 잊은 지 오래다. 잠은 언제나, 놀랍도록 하루도 빼먹지 않고 부족하다. 그나마 성인 3명 중 1명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을 겪는 나라에서 (아직은) 불면증에 걸리지 않아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때 그 테이프의 기억이 깊게 남았는지, 무언가를 들으며 잠드는 게 버릇이 되고 말았다. H.O.T. 테이프의 빈자리는 책 읽는 팟캐스트가 차지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1 ~ 5집 중 누나가 고른 앨범 대신 내가 좋을 걸 선택할 수 있게 됐다는 것과 1시간을 꼬박 들어야 잠들 수 있었던 재생 시간이 5분으로 줄었다는 점이다.
아니,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5분이 채 걸리지도 않는다. 3분, 어쩌면 2분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 5분 후 팟캐스트가 꺼지도록 취침 알람을 켜놓고 자는데, 5분을 채워서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한 시간을 뒤척이던 소년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베개에 머리면 닿으면 기절하는 만성피로만 남았다. 그런 내가 J와 재워주기 대결을 했다.
여행 내내 우리는 서로를 재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둘 다 회사 생활로 피곤에 쩔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상대방을 먼저 재워서 조금이라도 피곤을 풀어주려고 했었다. 해서 우리는 매일 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재워주기 대결을 했었고(머리를 쓰다듬으면 나도 J도 금방 잠든다), 이날도 어김없이, 누군가 봤으면 애정이 넘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치열하기 그지없었던 대결이 펼쳐졌다.
이야기에 앞서 간단히 선수 소개를 하자면 이렇다.
[ㅈ]
잠드는 시간: am 1:00
잠드는 속도: 매우 빠름(5분 이하)
잠의 질: 상
특징: 머리가 베개에 닿으면 바로 잠든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스치기만 해도 잠든다.
[J]
잠드는 시간: am 2:30
잠드는 속도: 느림(30분~@)
잠의 질: 하 (매일 3~4번 깬다)
특징: 피곤한데 잠은 못 자는 케이스. 조는 건 잘한다.
어딜 보나 내가 무척 불리한 조건이었다. 여행 중 보통 2시를 넘어서야 잤으니, 평소 같으면 나는 이미 꿈나라도 한참 꿈나라로 갔을 시간이었고, J는 막 잠이 올랑 말랑 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J는 잠에 천천히 드는 타입이고 잠에 들어서도 금방 깨서, 한 번 잠들면 기절하는 나와 달리 잤음에도 안 잤다고 우기기에 좋았다.
예상했듯 결과는 너무 빤했다. 이미 전날도, 그 전날도 먼저 잠든 나는 연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여행 온 이래 단 한 번도 내가 재워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 나를 괴롭게 했다. 오늘만큼은 내가 꼭 이기고 싶었다. 무엇보다 잠들고 싶어도 잠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친구였던 시절 J는 이런 말을 했다.
"나중에 만나는 사람이 나보다 늦게 자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밤에 혼자 깨어 있으면 무섭거든."
이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내가 J보다 먼저 잠들 수는 없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J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J도 나를 재우기 위해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2~3번 큰 위기에 빠져 의식을 잃었다 돌아왔음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J는 평소처럼 쉽게 잠들지 않았다. 먼저 자, 아니야 먼저 자, 아니야, 먼저 자,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머리를 쓰다듬고, 먼저 자라고 청하고 달래고 부탁해도 J를 재울 수는 없었다. 대신 졸려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곧 죽을 것처럼 굴면서도 잠들지 않는 나는 J의 꾸중을 들어야 했다. 나는 나대로 지금 자기 싫은데 왜 재우냐고 항변했고, 그렇게 우리는 누운 자리에서 투닥투닥했다.
결국, 친구 시절에 J가 했었던, 늦게 자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됐다.
그날 밤, 나는 재워주는 척하며, J는 잠든 척하며 잠에 들었다.
오늘도 여전히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