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장기하와 얼굴들 - 뭘 그렇게 놀래

[J] 원래 뭐든 잘 한다니까요

by Jay


쓰기 위해 쓰는 휴가는 독립출판물을 만들기 위해 떠난 집필 여행의 기록입니다. [J]와 [ㅈ]가 함께 쓰는 글이라, 같은 제목의 글이 두 편씩 업로드됩니다. 에피소드 제목은 그날을 가장 잘 담은 노래이니 들으며 읽으시길 권합니다. - J


볼링을 처음 배운 건 영국의 작은 도시, 요크에서였다. 오락거리라곤 학교가 끝나면 와인을 먹는 것 밖에 할 게 없었던 정적인 도시에서 볼링은 꽤나 흥분되는 놀이였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야 했지만, 그 당시 누구도 귀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첫 점수는 42점인가, 34점인가 그랬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초보 볼러들을 이끌었던 월리 오빠-진짜로 월리와 똑같이 생겼다-는 우리에게 바른 포즈를 알려줬다. 은혜로운 월리 오빠의 덕분에, 기복이 심하긴 하지만 아주 가끔은 좀 친다.


드디어 볼링장에 갔다. 이미 두 번이나 꽉 찬 볼링 레인을 바라보다 돌아섰기 때문에 오늘은 기필코 볼링을 치고 싶었다. 볼링은 우리의 휴가에서 거의 유일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사람이 없는 시간에 맞춰 가려고 일부러 점심을 먹고 바로 볼링장으로 향했다. 자리가 충분한 볼링 레인을 바라보니 너무도 뿌듯해 아침 일찍 가려다 실패한 목욕탕 따위는 아쉽지도 않았다.


나는 늘 8파운드짜리 공을 쓴다. 레인 끝 4걸음쯤 전에서 시작하고, 볼링장에서 3 게임을 친다. 그리고 3 게임 중 마지막 게임을 가장 잘 친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늘 똑같이 일어났다. 오늘도 그랬다. 온 우주의 기운이 나를 향해 몰려왔다는 것만 빼면.


8파운드짜리 공을 들고 늘 출발하던 대로 레인 끝 4걸음 전에서 시작했는데, 좀 이상했다. 처음부터 스트라이크. 내가 원래 이랬던가? 스트라이크나 스페어 처리는 물론이고, 평소에는 두세 번씩 무너지던 멘탈도 멀쩡했다. 세 게임 중 각자 성적이 좋은 두 게임의 점수 합산으로 승패를 따지기로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내가 세 게임 죄다 이겨버려 점수 합산의 의미가 없었다. 승리감에 취해 ㅈ이 내 멱살을 몇 번 잡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평생 볼링을 네 게임 쳐 본 적은 처음이었고, 내리 세 게임을 이긴 후 흥이나 풀자고 시작한 네 번째 게임까지 이긴 적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더 이상 구구절절 자세히 쓰지 않는 게 좋겠다. 자고로 승자가 너무 말이 많으면 패자에게 상처를 주는 법이니. (그런 의미로 오늘 ㅈ의 글은 상당히 길 수도 있겠다.) 그저 이런 마무리 정도는 쓰고 싶다.



그건 게임이 아니라, 압살이었다.



그날은 볼링에서 연패를 거듭한 ㅈ의 마음만큼이나 추운 날이었다. 휴가 중 맞았던 바람 중 제일 세찬 바람을 맞아서인지 볼링이 내내 왠지 나를 째려보는 것만 같았던 ㅈ과 달리 나는 걸으며 별것 아닌 것에도 웃음이 터졌다. 무엇보다도 사기꾼이라 돌고래 비명을 지르며 멱살을 잡던 ㅈ의 쿨하지 못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우리가 같이 보낸 제일 더웠던 날에도 ㅈ은 내 멱살을 잡았었다. 아직 덜 친해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새벽까지 수다를 떨던 날 중 하나였다. 우리는 그날 자기 주변의 재능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보며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질투 등에 대해 얘기했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은 있었지만 내가 남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다, 라는 말을 내 딴에는 꽤 돌려 돌려 최대한 겸손하게 표현했던 것 같은데 ㅈ은 내 멱살을 잡았다. 그때도 사기 치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사기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려고 '원래 저 뭐든 잘한다니까요'라는, 겸손함을 미처 끼얹지 못한 날것의 문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수록 ㅈ은 더 멱살을 꽉 잡았다. 수다를 떨 때 거의 앞만 보고 말하던 ㅈ은 그날 처음으로 말하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사실, 내 볼링 점수는 그다지 좋지 않다. 기복이 심해 50점대에서 100점을 널뛰기하듯 오르내린다. 그래서 세 게임 다 100점대였던 오늘은 정말로 온 우주의 기운이 도와줬다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행이다. 볼링을 치기 전까지 ㅈ을 상대로 날렸던 허풍이 낱낱이 밝혀지지 않아서 다행이기도 했지만, 내가 진짜 볼링을 잘 친다고 ㅈ이 믿게 되어서 다행이다.



원래 저 뭐든 잘한다니까요


그땐 멱살을 잡더니 그날의 충격으로 어느새 세뇌가 된 것인지 ㅈ은 늘 나에게 재능이 많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내가 뭔가를 잘 해내는 모습을 진심으로 좋아해 준다. 내가 뭔가를 잘했을 때 ㅈ이 늘 짓는 표정, 그 코를 찡긋하면서 웃는 모습이 참 좋다. 뿌듯함 섞인 그 표정을 보면 내가 대단히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ㅈ 때문에, 나는 내가 정말로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잘 들어 미안하지만 니가 보고 있는 것들은 꿈이 아냐
그리고 잘 봐 낯설겠지만 니가 보고 있는 사람이 진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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