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홈 대 렌홈, Reynholm vs Reynholm
한동안 닥치는 대로 영국 드라마를 봤다. 시대극, 판타지, 수사물… 한 마리 잡식 동물이 되어 영드를 소비했다.
러닝타임 24분. 그 24분 동안 귀를 스친 말들 중 몇 개의 아까운 대사가 노트에 쓰여있다. 보통 그건 드라마 전체의 스토리 대신 나의 특별한 기억을 불러내는 문장이다. 화면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그 대사들에서 퍼져나간 개인적인 기억.
24 minutes는 그런 기억을 모은 글이다. 24분짜리 드라마의 일부에서 태어난 주관적 드라마를 한 편씩 소개하려고 한다. 아쉽게도 드라마를 소개하는 글은 아니다.
예전엔, 아니 예전이라 하기엔 좀 멀고 먼데, 하여간 크레파스로 뭘 그리던 시절엔 집을 참 많이 그렸다. 우리 가족을 그릴 땐 우리 집을 배경에 그려 넣었고, 미래 세상을 그릴 땐 미래에 있을 법한 공중부양 주택을 그려 넣었다. 사람이 살려면 집이 필요하다는 게 너무 당연한 상식이기도 했겠지만, 지금처럼 집이 금값이 되어 '집님'이 될 줄은 몰라서 그랬기도 하다. 집은 누구나 갖는, 그런 당연한 거였다. 그래서인지 그때 내 그림엔 아파트나 원룸 같은 건 없다. 그냥 우리 가족만 사는 단독주택 집 한 채. 그때는 나도 크면 당연히 한 채쯤 가지고 있을 줄 알았지.
내가 집 그림을 그렸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간 전세살이와 이사는 남들 부럽지 않게 했다. 지금까지의 이사는 늘 통보였다. 집을 보는 일은 어른들의 몫이었다. 이사 갈 집이 정해지고 위치와 날짜를 통보받으면 그때부터 짐을 싸고 내 방 살림을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집을 구하는 데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면서 나도 마음속에 몇 개쯤은 간직하고 있었다. 또 집을 구하게 되면 체크해야 할 것들을. 언젠가 내가 살 집을 구하게 되면, 정말이지 아무 실수 없이 집을 구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 반 전쯤, 마침내 처음으로 내가 살 집을 보러 다녔다. 어쩌면 그날 보는 집 중 하나는 곧 내 살림으로 채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모와 부동산으로 갔다. 아빠와, 아빠가 아는 공인중개사를 기다리면서. 즐거웠다. 내 집이라니. 앞으로 낼 관리비까지도 달콤했다.
새로 지은 오피스텔은 생각보다 인기가 많은지, 평일 아침이었는데도 집을 보겠다는 사람이 꽤 많았다. 부동산 안에 있는 테이블 세 개가 꽉 찼다. 나를 빼고는 모두 비슷한 연령대인, 우리 아빠 나이쯤 돼 보이는 사람들끼리는 초면인데도 대화가 이어졌다. 이 집을 사면 오를까, 이 집을 사면 월세를 얼마 정도 받을까, 내가 살긴 좁지만 사두면 젊은 사람들이 월세로 들어와 살지 않을까. 슬슬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Douglas: You can't be serious!
더글라스: 지금 나랑 장난하냐고!
그래도 집 구경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지만, 오피스텔 안 풍경은 더 괴이했다. 이 집에 관심을 가질법한, 혹은 살아야 마땅할 나이의 젊은 사람들은 죄다 알바생이었다. 실제로 집을 보러 온 사람 중 젊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다 우리 아빠 나이, 혹은 그 이상이었다.
그 60대 이상의 사람들과 우르르 몰려가 집을 봤다. 고작 6평짜리 오피스텔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겠어. 아유, 그래도 다 빌트인이니까 침대 하나 놓고 하면 젊은 사람들 살 만하겠네. 지하철 역 바로 앞이니 한 채 사두면 월세는 꾸준히 나오겠어. 엘리베이터에서도, 복도에서도, 집 안에서도 대화가 이어졌다. 확실한 건, 이 집에서 '진짜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거였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린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 빌트인 된, 역세권의 6평짜리 신축 오피스텔을 사면 지속적으로 월세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만 닥치고 좀 다 꺼져줬으면 했다.
같은 건물 안, 찍어낸 듯 똑같이 생긴 집이 500개가 넘었다. 집 방향과 층에 따라 가격은 이리저리 날뛰었다. 매매가도 미쳤지만 전세가는 더 미쳐 조금 낮춰보려고 하니, 나이가 지긋한 집주인은 500만 원을 낮춰줬다. 대출도 없이 하겠다니 특별히 500만 원은 낮춰주겠다고. 이 집주인은 이 건물에 꼭 붙은 오피스텔 벌써 2개나 가지고 있다. 그는 월세를 놓으려다 법인 설립하는 데 자금이 급해 특별히 전세로 내놓았다고 한다.
Lawyer: Now, you're asking for quite a large amount.
변호사: 지금 당신은 엄청난 양의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Victoria: I think it is an appropriate amount.
빅토리아: 적절한 금액이라고 생각하는데요.
Lawyer: Why do you say it is an appropriate amount?
변호사: 왜 그것이 적절한 금액이라 말씀하시는 거죠?
Victoria: I'm entitled to some restitution.
빅토리아: 전 그 정도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며 집주인이 그랬다. 이 집에 사는 동안 좋-은 기운 받아 돈 많이 벌고, 좋은 일 생겨 나가길 바라겠다고. 처음 보는 사이에 고마운 일이다. 다만 그러겠노라 쉽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 집주인 세대가 오직 투자하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두 채씩 사버리는 짓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아마 나 같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은 쉽게 생기지 않을 거다. 내 부모가 건물을 사고 나 같은 애들에게 다달이 돈을 뜯어 모아주기 전까진.
그날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 중, 귀동냥으로 열심히 부동산 공부를 하던 한 아주머니가 그랬다. 여기에 내가 살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 가격에 이렇게 안정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곳은 오피스텔뿐이라고. 그분은 그날 즐겁게 아주 좋은 층과 방향의 집을 골라 계약을 마쳤다. 그렇게 집값이 오른다. 전세나 월세가 미친 게 아니라 사람이 미친 거 아닌가 싶다.
Douglas: Bollocks to be telling me to calm down, my old chap. She wants 220 titty million quid and you tell me to calm down!
더글라스: 진정하라니. 개소리하네, 이 늙은 놈이. 저 자식이 2억 2천만 파운드를 달라는데 나보고 진정하라고?
'집주인 연령대'로 붐비던 입주 관리실 안에서 어깨띠를 한 젊은 사람들은 구석에 끼리끼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6평 오피스텔 거주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 오피스텔을 사들이는 동안, 정작 거주와 관계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관리사무실 구석이 전부다. 어깨끈을 두르고 오피스텔 몇 채를 안내해야 이곳 관리비와 월세를 감당하며 살 수 있을지 까마득하다.
사무실 구석으로 밀려난 이들이 마침내 월세로 이 오피스텔에 거주하게 되면, 아마도 집주인은 웃으며 안녕을 빌 거다. 그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안녕을 빌기만 할 거다.
이제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다면 감히 집을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Douglas: Bollocks!
더글라스: 개소리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