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24 minutes

셜록, Sherlock S03 E03

그의 마지막 서약, His last Vow

by Jay


한동안 닥치는 대로 영국 드라마를 봤다. 시대극, 판타지, 수사물… 한 마리 잡식 동물이 되어 영드를 소비했다.

러닝타임 24분. 그 24분 동안 귀를 스친 말들 중 몇 개의 아까운 대사가 노트에 쓰여있다. 보통 그건 드라마 전체의 스토리 대신 나의 특별한 기억을 불러내는 문장이다. 화면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그 대사들에서 퍼져나간 개인적인 기억.

24 minutes는 그런 기억을 모은 글이다. 24분짜리 드라마의 일부에서 태어난 주관적 드라마를 한 편씩 소개하려고 한다. 아쉽게도 드라마를 소개하는 글은 아니다.



편지 쓰기를 좋아한다. 사라 아줌마가 살아 계실 땐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샀다. 여행을 간 도시에서 썼던 엽서들, 생일카드, 별 이유 없이 썼던 편지까지. 몇 년 동안 아줌마에게 보냈던 것들은 많지만 크리스마스 카드는 좀 특별하다. 보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길다. 느리디 느린 영국의 일처리 속도와 카드 쓰기를 나만큼 즐겨하는 그들의 습성이 긴 크리스마스 휴일을 만나면 크리스마스 지옥문이 열린다. 일찌감치 서둘러 12월 초에 보내지 않고서야 내 카드가 제시간에 도착할 가능성은 없다. 거의 매년 사라 아줌마에게 보낼 카드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는 12월 중순이었다. 보내기엔 한참 늦어버린 카드를 쓰고 며칠 고민하다 왠지 부끄러워 서랍에 넣어두었다. 1년 후 새로운 12월 중순이 오면 나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서랍 속에 든 작년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꺼내 찢어버렸다. 그 자리는 올해도 늦어버린 크리스마스 카드로 대신 채웠다. 내 카드가 없이도, 사라 아줌마는 문을 닫은 우체국과 함께 잘 쉬며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주말에도 곧잘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아줌마의 가족들은 크리스마스도 거실에 모여 보냈을 거다.


휴일을 집에서 보내는 그들의 여유를 떠올려볼 때마다 나는 텅 비었을 거리도 동시에 그려보았다. 거리엔 불 꺼진 건물만 덩그러니 있을 거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 물건을 사는 사람들 모두 집으로 숨은 후일 테니까. 휴일은 늘 그랬다. 좀비가 습격한 듯 깨끗하게 비어버린 거리를 생각하면 좀 부러웠다. 한국에선 마비라고 생각했을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꽤 잘 살고 있었다. 좋아 보였다. 그들의 크리스마스만 한 휴일이-쉬는 일수로만 따지자면-우리에겐 없다. 굳이 꼽자면 설날이나 추석 정도.


Microft Holmes: Oh, dear God, it’s only 2 o’clock. It’s been Christmas Day for at least a week now. How can it only be 2 o’clock? I’m in agony.
마이크로프트 홈즈: 이럴 수가, 겨우 두 시라니. 크리스마스인지 일주일쯤은 된 것 같은데 어떻게 두 시일 수가 있지? 너무 괴롭구나.


우리 가족은 명절에 제일 바빴다. 부모님이 10년 동안 지킨 식당은 터미널에 있어서 남들 쉬는 날이 대목이었다. 언니들은 새벽잠을 줄여가며 일을 돕느라 명절을 오롯이 바쳤다. 막둥이라서 집에서는 마냥 아이 취급을 받는 나는 설날과 추석이면 찾아오는 노동력 대잔치에서 늘 열외였다. 나에게 명절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늘어져 자다가 일어나 라면을 끓여 먹고, 느지막이 퍼즐을 좀 맞추다가 다시 자다 보면 하루가 지나곤 했다. 명절의 내 삶은 말을 좀 할 줄 안다는 것을 빼면 동물원 나무늘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적만 내려앉은 골목길을 창문 너머로 내다보며 가끔은 동네에 살아남은 인간이라고는 나뿐인 건 아닐까 바보 같은 생각을 해보곤 했다.


평온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명절의 고비는 좀이 쑤셔 밖으로 튀어나가는 순간 찾아왔다. 현관문 밖의 세상은 내 방과는 너무도 달랐다. 일부러 귀 기울이지 않아도 자글자글 기름 튀어 오르는 소리, 평소에 들리지 않던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길가의 모든 집이 창문을 열어둔 탓에 거리에는 음식 익어가는 냄새가 풍겼다. 중국집, 치킨집도 문을 닫아 명절에는 편의점 도시락이나 라면 말고는 먹을거리가 없던 내 방과는 달랐다. 복닥거리는 분위기에서 매년 느끼는 외로움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이 아니라 명절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소외된 인간이었다. 외로웠다.


Microft Holmes: Why are we doing this? We never do this.
마이크로프트 홈즈: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크리스마스에 이런 적 없었잖아요.



온 가족이 터미널에만 붙잡혀있던 10년 이후에도 딱히 만날 친척이 없는 내 명절은 늘 비슷한 풍경이었다. 딱 하루만 빼고. 2006년 추석, 그날도 나는 여느 명절처럼 집에 혼자 남아 오늘은 어떤 라면과 삼각김밥으로 세끼를 버텨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ㅇ이 집으로 찾아왔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불우한 친구를 돕겠다며 손에 음식을 한가득 싸들고서. 그날의 일기에는 ㅇ이 과자와 술도 사 왔다고 적혀있지만 내 기억에 남은 음식은 집에서 만들었다며 꺼낸 송편이었다.


ㅇ은 냉랭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였지만 맹세컨대 한 번도 ㅇ에게 인정머리 따위가 있을 거라 느껴본 적이 없다. 특히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능력이 심하게 떨어져 소시오패스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ㅇ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ㅇ의 피가 0도였다면 ㅇ의 엄마는 마이너스 13도쯤 되는 피를 가졌을 거다.


그런 ㅇ과 ㅇ의 엄마였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절대 그런 인정을 베풀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그런 ㅇ이 서울을 가로질러 송편을 들고 왔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어서 그 송편을 잊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ㅇ의 엄마가 직접 송편을 싸주셨단 말이 더 충격적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송편은 참 맛있었다. 먼 거리를 오느라 적당히 식어버린 송편의 미지근함이 이상하게 참 따뜻했다.



Mary Watson: Oh, are we doing conversation today? It really is Christmas!
메리 왓슨: 오, 우리 오늘 드디어 대화하는 거예요? 진짜 크리스마스네!



ㅇ은 평소와 다르게 청소 좀 하라느니 이딴 음식만 먹다간 병이 난다느니 따위의 말을 했다. 잔소리라면 질색을 하는 성격인데도 그날은 듣기 싫지 않아 ㅇ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강북구 끝까지 돌아가야 하는 ㅇ을 광화문까지 바래다주고 고요한 내 방으로 돌아오는 길은 평소처럼 외롭지 않았다.


비로소 인간의 감정이란 걸 이해하게 된 듯한 ㅇ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정말 고마웠다.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혼자 있는 나를 위해 뭔가 싸들고 굳이 여기까지 와준 마음이. 모두 쉬지만 모두가 바쁜 날, 나를 떠올려줬다는 것도. 10년이 넘게 보낸 명절 중 특별했던 날이 그때뿐인 걸 보면, 혼자라 내 마음대로 명절을 보내면서도 동시에 혼자라서 외롭기만 하던 명절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나는 그 후로 쭉 누군가 ㅇ처럼 내 고요하기만 한 명절에 쳐들어와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뜨끈뜨끈하게만 느껴졌던 그 미지근한 송편을 들고.


Sherlock Holmes: I’m not a hero… I’m a high-functioning sociopath.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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