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의 의미
요크에 도착한 첫 날, 내 호스트 맘인 사라 아줌마는 나와 친해지기 위해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수줍게 내보였다.
Q1. 차 좋아하니? 여기 차가 아주 많아. 니가 차를 좋아하면 언제든 나랑 얘기하면서 차 한잔 하자.
A1. 전 커피만 먹어요.
Q2. 영화 좋아하니? 난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 집에 없을 땐 셋톱박스에 설정해두고 녹화해서 보거든. 어떤 영화 좋아해?
A2. 영화는 지루해요. 전 공연이 좋아요. 생동감 있거든요.
Q3. 와인 좋아하니? 저녁 먹고 한 잔씩 하면 아주 좋은데.
A3. 전 술을 못 먹어요.
대화는 참 짧게 끝났다.
사라 아줌마는 밤 늦게까지 영화를 보고,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늘 차를 끼고 살았다. 아줌마와 달리 한국에서 커피만 마셨던 나는 학교 옆 카페 네로(Cafe Nero)에서 아메리카노나 라떼를 마셨다.
사실 차를 빼고 영국을 말하기는 어렵다. BBC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하루에 영국에서 소비되는 차는 하루에 1200만 컵도 아닌 1억 2천만 컵이다. 당장 사라 아줌마만 보더라도 눈을 뜨자마자, 아침을 먹으면서, 오후에, 저녁 식사 후에, 자기 전에 한 잔씩 차를 마셨다. 집에 동시다발적으로 소비되는 티백 상자만 4-5종류였다. 영국에서 차는 단지 기호식품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일상 그 자체였다.
내가 처음 차를 마신 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써클카페Circles Cafe였던 것 같다. 그냥 그날은, 나도 현지인처럼 “a pot of tea, please.”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뭐가 그렇게 맛있어서 모든 사람이 홀린 듯이 a pot of tea를 주문하는지 좀 궁금하기도 했고. ‘대체 얼마나 잘났나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차를 주문했다.
적당히 손 때 묻은 찻잔과 함께 소담한 티팟에 티가 가득 담겨 나왔다. 요크 한복판에 자리잡은 Betty’s tea room같은 곳이 아니라 보통의 카페나 티룸에서 파는 차는 화려하지 않다. 싱가폴이나 고급 티룸에서 볼 수 있는 고급 식기가 필요했다면 애초부터 일상에 스며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딱히 매력적이지 않은 티팟에 담긴 차는 생각보다 떫지 않았다. 설탕을 넣으니 따뜻한데 달달한 맛이 더해졌다. 사라 아줌마가 알려준 것처럼 우유를 타니 먹기 적당하게 미지근한 온도에 맛은 부드러워졌다. 커피를 마실 때와는 또 다른,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후로 나는 혼자 써클카페를 찾아 a pot of tea, please.를 말하곤 했다.
비가 오는 날 괜히 울적한 마음이 들면 내 방에서 차를 한 잔 놓고 초코 쿠키와 함께 먹었다. 비 오는 날은 우울하고 습하다고 생각했는데, 차를 마시며 바라보는 비 오는 풍경이 늦여름 밤 바람처럼 기분 좋게 시원했다. 방에 앉아 창문까지 열어놓고 해가 지는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비를 감상했다. 그때 한창 하던 고민도 시원하게 씻겨가고 없었다. 손끝이 시린 날은 집에 돌아와 차 한 잔을 홀짝였다. 추운 날씨에 굳어버린 몸과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가끔은 사라 아줌마와 차를 마시며 아무에게도 말 못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차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다시 돌아간 요크는 너무 추웠다. 초여름이 아니라 시린 초봄 날씨였다. 가벼운 옷차림을 예상하고 갔지만 매일 가진 옷을 최대한 껴입었다. 우리는 저녁 시간을 늦추고서라도 티타임을 갖곤 했다. 잔뜩 움츠러든 우리의 굳은 몸을 차 한 잔이 녹여주었다. 티타임은 걷느라 지친 다리, 어제 미처 풀지 못한 피로, 그 때문에 약간 예민해진 마음까지 쉬는 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차를 그냥 마시는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 차는 어떤 의미로든 참 따뜻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몸보다는 마음이 지쳤을 때 누가 ‘차 한 잔 하자’고 말해주면 좋겠다. 물론 혼자여도 괜찮다. 비만 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