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까만 고양이
홀리는 애교가 없었다. 처음에 나는 홀리와 친해지려고 가끔 그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안아보거나 내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래도 홀리는 나를 멀리서 감시할 뿐이었다.
그런 홀리가 돌변하는 시간은 밤 12시 이후였다. 어두운 밤, 홀리는 내 창문 밖에서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창문을 열라는 신호였다. 내가 창을 열면 홀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방에 들어왔다. 마치 우리가 매우 오래전부터 매일 이런 야행성 모임을 가져왔던 것처럼. 홀리는 내 방에서 이리저리 뒹굴고 노트북 앞에 엎드린 나를 방해하다가 코를 골며 몇 시간 숙면을 취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면 떠났다. 낮에 그렇듯 쿨하고 시크하게.
펍에서 여흥을 즐기느라 새벽 두 시에 조용히 들어오는 날이면, 홀리는 내 방으로 가는 계단 중간쯤에 앉아 늦게 들어온 딸을 쳐다보는 엄마의 눈빛으로 나를 지긋이 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방에 들어가면 방문이 닫히기 전에 후다닥 뛰어들어와 늘 하던 방해와 코골이를 했다. 아무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곳에서 홀리는 나를 기다려주는 유일한 생명체였다. 밤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나는 계단 중간쯤에 앉아 나를 기다릴 털 뭉치 홀리를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내가 없으니까 문 앞에 서 있지 마. 나 가고 나면 너 밤에 어디서 코 골고 잘래?
떠나기 전날 밤에 나는 홀리를 껴안고 영어에 길들여진 12살 고양이에게 그녀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가 떠나던 아침에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그렇게 쿨했다.
다시 돌아간 요크에서 홀리를 만났다. 해가 뜨는 날에는 천국 같던 사라 아줌마네 뒤뜰에 홀리가 묻혀있었다. 홀리는 그 뒤뜰 바닥에 누워 배를 다 드러내고 햇빛을 즐기곤 했다. 그다지 정갈하지 않던 까만 털 뭉치를 손으로 만져볼 수 없어 허전했다.
그래도 그걸로 됐다. 매일 밤 12시가 지나 내 방 창문 앞에서 기다리진 않을 테니까. 이제 홀리는 바람이 솔솔 부는 뒤뜰 정원에서 부비적거리며 밤새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던 그 까맣고 묵직한 궁둥이를 흔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