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Nov 12. 2017

인종차별은 여전히 아름다운지

Museum Garden, Dean’s Parks



내가 좋아하는 우즈 강 변 바로 옆에 뮤지엄 가든이 있다. 요크의 대표적인 공원답게 해가 쨍한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빨래처럼 늘어져 일광욕을 즐기며 풀밭을 촘촘히 메운다. 연인, 부부, 혹은 반려동물과 산책 중인 사람들. 이것 말고도 뮤지엄 가든엔 한 종류의 인간이 더 있다. 십 대 청소년 무리.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한국인 친구들이 뮤지엄 가든에서 십 대 무리를 만나 귀여운 수준의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듣고 나서 그곳을 예전만큼 즐겨 찾지 않았다. 인종차별은 우리 집 근처에서 겪는 걸로 충분했다. 아마도 아시안 야동을 많이 본 것 같은 젊은 트럭운전사가 지나가다가 자고 싶다고 소리친다든지, 그도 아니면 술에 쩔은 언니들이 지나가면서 내 옆에서 소리를 빽 지르고 내가 놀라는 걸 재미있게 바라본다든지. 그 정도는 그냥 넘겼지만, 어느 날 늦은 밤에 술 취한 남자가 실실 농담을 던지며 뒤를 따라온 날 이후로는 파란 눈의 사람들이 무섭기까지 했다.


성격이 소심하지도 않고 욕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할 수 있는데도 그런 뜬금없고 근거 없는 조롱에 나는 딱 굳어버렸다.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는 미친 아이들이 지나가면 그저 ‘에이 시발. 미친놈들 갔네.’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정도였다. 백인-이 명칭 자체가 좀 웃기지만- 비율이 높은 요크에서 단지 얼굴색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유색 인종에게 가해지는 그런 개똥 같은 차별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정확히는,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내가 바꿀 수 없는, 바꿀 필요도 없는 피부색을 근거로 내가 yellow monkey라 불리는 게 당연한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는 게 수치스러웠다. 나는 왜 머리가 까맣지? 나는 왜 피부가 하얗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상처를 받는 단계를 지나자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개똥 같은 차별은 점점 나를 파이터로 키웠다. 길에서 십 대 소년 무리가 내 면전에 대고 마구 욕을 뱉어대던 날 나도 눈을 마주 보고 구성진 한국 욕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날은 참 햇볕이 따뜻했는데 그 날씨에 걸맞는 화사한 욕의 향연이었다. 이걸 들었으면 아마 세종대왕도 기립박수 치셨을 텐데. 쌍시옷을 비롯한 각종 된소리에 당황한 그 십 대 소년 무리는 갑자기 말을 마치고 후다닥 가버렸다. ‘자고 싶다!!’며 본인의 성욕을 자랑하는 트럭운전사에게 씩 웃으며 내 세 번째 손가락이 얼마나 긴지 구경시켜준 것도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하지만 파이터가 되고 나서도 뮤지엄 가든은 아주 우글우글하게 몰려가는 게 아니라면 가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된 것 아닌가, 굳이 뮤지엄 가든까지 찾아가 창피를 당할 필요는 없지 않나. 이렇게 생각했다. 파이터가 되었다고 해서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게 요크 민스터 뒤에 비교적 아담하게 자리잡은 딘스 파크였다. 어린 아기가 있는 가족들이 많은 딘스 파크에는 유색인종에게 개드립을 칠 십 대 청소년이나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나에겐 뮤지엄 가든을 대체할 좋은 장소였다. 물론 여기서 대체하다라는 의미는 꿩 대신 닭이라는 뜻이 아니다. 뮤지엄 가든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딘스 파크는 고퀄리티의 평안함을 제공함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솔직하게 내 마음속에서만큼은 일종의 대체물이었다. 왜냐하면, 인종차별 얘기를 들을 후부터 몇 가지 예외 사항을 빼면 뮤지엄 가든에는 갈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나 자신을 딘스 파크로 유배 보냈다. 그만큼 인종차별이 여전히 수치스럽고 두려웠다.


이번엔 뮤지엄 가든에서 얼굴에 잔디 무늬가 생길 때까지 낮잠을 잤다. 영국답지 않게 날이 쨍하게 맑아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잔디밭에서 한참 뒹굴었다. 개드립을 날려대는 십 대들도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딘스 파크가 더 편했다. 아직도 나는 그게 그리 무서운가 보다.


딘스 파크는 평화롭지만 민스터에 가려 그늘이 꽤 많다. 뮤지엄 가든은 굳이 나무 그늘을 찾지 않으면 온통 햇살 받을 곳뿐이다. 그늘 따위 다른 이들에게 다 뺏기고 뙤약볕에 선글라스를 써야 하더라도 마음 편히 뮤지엄 가든에 가고 싶다. 둘 중 어디를 갈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그때처럼 결정하고 싶다. 나는 그늘보다는 영국의 흔치 않은 햇살이 좋다. 다음에는 마음에 들어앉은 묵직한 걱정 없이 그저 편한 마음으로 뮤지엄 가든에서 낮잠을 잤으면 좋겠다.





더하기,

요크의 모든 사람이 유색인종을 혐오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그건 사춘기 청소년들이나 스무 살쯤 된 서툰 어른 중 일부에게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지성과 교양이 생길 나잇대의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할 정도로 유치하지 않다. (이것은 내가 성악설을 조금 더 믿게 된 계기이자 지성과 교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게 된 계기이다.) 이 글이 요크에 사는 사람들을 상종 못 할 인간들로 만들지 않았기를 바란다. 실제로 인종차별은 요크에 국한된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어느 사회든 특정 연령대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어느 사회든 이라고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고, 보편적이라서 더욱 슬픈 그런 현상이라고 해두자.




매거진의 이전글 All these lonely peopl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