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조급한 하루
쓰기 위해 쓰는 휴가는 독립출판물을 만들기 위해 떠난 집필 여행의 기록입니다. [J]와 [ㅈ]가 함께 쓰는 글이라, 같은 제목의 글이 두 편씩 업로드됩니다. 에피소드 제목은 그날을 가장 잘 담은 노래이니 들으며 읽으시길 권합니다. - J
이것저것 다 잘 먹는 척하지만 실제로 음식 취향이 확고하다. 음식 취향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꼬깔콘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손가락에 하나씩 끼워 마녀 놀이하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그때도 손가락에 끼우는 걸 좋아했지 맛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마녀 놀이에 흥미를 잃은 지금, 꼬깔콘은 안 먹는 음식이다.
공식적인 휴가 첫날 아침, 나는 꼬깔콘을 두세 개씩 마구 쥐고 잔인하게 씹고 있었다. 눈치 없이 휴가까지 따라온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어젯밤이 늦도록 나를 도와주다 잠든 ㅈ이 깨기 전에 어떻게든 혼자 끝내버리고 싶었다. 어제는 나도 상당히 늦게 잠들었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잠들기 딱 좋은 상태였다. 갑자기 좋아하지도 않는 꼬깔콘을 와구와구 씹은 건 그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생명과 나의 각성을 맞바꾸고 있었다. 꼬깔콘이 가져온 불완전한 각성상태 때문에 또다시 잠들었다가 오전 10시 45분, 꾸역꾸역 일을 끝냈다.
아직 이른 시간. 만세를 불러 마땅한 일이었는데, 일이 끝나자 맥이 풀렸다. 털고 오고 싶었던 뭔가가 집필 여행을 따라왔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시간을 허비해버린 것 같은 기분.
얼마 전에 산 퍼즐, 해리포터 DVD, 하루에 한 번 쓰려고 가져온 일기장, 포장도 안 뜯은 건담까지. 암막 커튼 때문에 아직 컴컴한 방 안을 둘러보니 휴가가 무척 길거라 생각하고 가져온-아직 손도 대지 못한-것들이 있었다. 월요일이니까, 공식적인 휴가 첫날이지만 사실 지난 토요일부터 놀고 있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휴가 3일 차에 접어들었는대도 손을 못 댄 것들이다.
휴가는 길고 길어서 대단히 새로운 것들을 많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오늘 아침거리로 집 옆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살 때마저도 늘 내가 먹던 걸 골랐다. 몇 년째 이 빌어먹을 이탈리안 BMT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휴가 동안 저 많은 새로운 걸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다니. 아직 시작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나와는 다르게 과감히 신메뉴를 선택한 ㅈ을 보며, 나는 양상추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다.
새로운 것들을 못한 오늘, 새롭다고 할 만한 유일한 일은 ㅈ이 잠시 집에 다녀왔던 두 시간 남짓의 순간이다. ㅈ이 기르는 고슴도치를 돌보러 휴가 중에도 이렇게 가끔은 집에 다녀와야 한다. 이 시간이 아마도 내가 휴가 중 혼자 있을 유일한 시간이 아닐까. 나는 휴가 때 가능한 모든 것을 캐리어에 쑤셔 넣던 것처럼 백팩에 맥북과 노트를 잔뜩 쑤셔 넣고 ㅈ과 함께 집을 나섰다. 혼자서 무언가 엄청난 양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ㅈ을 지하철역까지 배웅하고 카페를 찾아 걸어가는 시간 등등을 빼면 약 한 시간 반 정도가 남는다. 써야 하는 글의 분량과 내 속도를 고려하면 엄청난 양의 글은 애초에 쓸 수 없는 거였다. 쑤셔 넣어 온 노트들을 오늘 안에 펼쳐볼 일이 없겠다는 걸, 카페에 도착해 30분 정도가 지나서야 깨달았다. 길지 않은 카페 영업시간 때문에 나는 30분 정도는 길을 걸으며 ㅈ이 오기를 기다렸다.
월요일 밤 12시가 넘은 시간, 일부러 볼륨을 낮춘 것처럼 조용한 광화문광장 가운데 서서 경복궁을 등지고 섰다. 퇴근하고 ㅈ과 매일 지나치는 광화문을 잠시 혼자 보려고 훔쳐온 듯 낯설었다. 낯설어 새로운 풍경을 보며 ㅈ을 떠올렸다. 이걸 보면 ㅈ이 좋아할 텐데. 지금 오면 좋을 텐데.
ㅈ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광화문역 7번 출구로 가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서있던 광화문광장으로 왔으면 했지만 ㅈ은 아직 광화문 지리에 서툴다. 광화문광장, 해치광장 등을 말했다가는 서울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 아쉽지만 고요한 광장 풍경을 ㅈ과 공유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7번 출구로 걷던 중 ㅈ에게 전화가 왔다. ㅈ은 이미 서울 미아가 되어 '그냥 가까운 곳'을 통해 지상으로 나와 있었다. 그렇게 대충 나온 ㅈ은 광화문광장에 서있었다.
7번 출구로 가느라 이미 광장 건너편에 있던 나는 ㅈ이 광화문광장에서 건너오면 보여줄 또 다른 풍경을 찾느라 세종문화회관 앞 높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지금이면, 이 위에서 보는 서울은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들지도 모르니까.
아무것도 없는 세종문화회관을 두리번거리다 광화문광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ㅈ이 길을 건너 달려오고 있었다. 불이 바뀌려면 아직 한참 남은 신호등을 바삐 건너고,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 그렇게 단숨에 달려와 앞에 서있었다. 늘 오던 모습처럼.
휴가나 여행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뭔가 새로운 것들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것을 해야만 잘 보낸 휴가인 듯한, 그런 게 없으면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 같은 그런 강박. 같이 글을 쓰면 충분한 집필 여행을 준비하면서 캐리어에 '휴가용' 놀거리를 챙겨 온 것도 그런 강박에서 나온 행동이다.
새로운 일을 하지 않아 조급하고 울적했던 하루가 저물 무렵, 길을 건너 달려오는 ㅈ을 보며 생각했다. 굳이 새로운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익숙한 모습을 보느라 지나가는 시간도 이렇게 좋은데. 지금은 휴가용으로 가져온 퍼즐 몇 조각을 더 맞추는 시간보다, 늘 오던 속도로 웃으면서 달려오는 ㅈ의 모습을 보며 보내는 시간이 훨씬 반갑다.
There were signs all around
It really got my mind rac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