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브로콜리 너마저 -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J] 괜찮아

by Jay
쓰기 위해 쓰는 휴가는 독립출판물을 만들기 위해 떠난 집필 여행의 기록입니다. [J]와 [ㅈ]가 함께 쓰는 글이라, 같은 제목의 글이 두 편씩 업로드됩니다. 에피소드 제목은 그날을 가장 잘 담은 노래이니 들으며 읽으시길 권합니다. - J


엄마는 반에서 1등을 하면 내가 원하던 장난감 세탁기를 사주겠다고 했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 실제로 물을 넣을 수 있는 장난감 세탁기보다 좋은 미끼가 있을까. 엄마가 기대한 건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겠지만, 반에서 1등을 하려면 몇 개까지 틀려도 될지 알 수가 없었던 나는 그냥 시험을 다 맞아버렸다. 장난감 세탁기의 힘은 그랬다.


집에서 학교로 가던 길 중간쯤에 있는 문구점에서 그 세탁기를 팔고 있었다. 매일 학교를 오가면서 세탁기를 데리러 가는 날을 그려보곤 했다. 시험이 끝난 주말 엄마랑 언니들이 걷는 속도를 기다리지 못하고 나는 아빠 손을 잡고 신나게 앞장서서 걸었다.


문구점에서 나오던 엄마 손에는 세탁기가 없었다. 엄마는 화가 나 있었다. 먹고사는 게 빠듯하진 않아도 딱히 남는 것 없는 형편에 장난감 세탁기를 만이천 원이나 주고 살 수는 없는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만이천 원짜리 세탁기가 말이 되냐고, 정신이 있냐고 엄마는 화를 냈다. 정신은 있었다. 만이천 원이 어느 정도 비싼 건지 알기에 나이가 너무 어렸을 뿐이다. 아빠는 내 편을 들고, 중간에 서 있던 나는 난감했다. 장난감 세탁기를 사고 외식을 하러 가려던 우리 가족의 계획은 화가 나 집으로 가는 엄마의 뒷모습과 함께 끝났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다. 내 입장에서는 약속을 깬 엄마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자, 인생 최초로 '망했다'를 실감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보통 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그 이전의 행복한 순간이 길수록 처참하게 다가오는 법. 세탁기를 손에 들고 외식을 하러 뷔페에 가면, 돈까스를 많이 먹어야지 생각하며 그날 옷을 입고 양말을 신었다. 외출 준비를 하던 순간은 참 행복했다.


세탁기를 사러 가던 그때처럼, 오늘도 망했다.


어제 계획했던 대로 눈여겨봐뒀던 와플 가게에서 와플을 포장했고, 내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ㅈ은 빨래 정리를 했다. 와플을 사러 가던 길에 ㅈ은 언제나처럼 무거운 걸 옮기는 어른을 도와드렸다. 나는 내 옆에 있는 ㅈ이 마음 따듯한 사람이라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매일 마신 캡슐 커피 찌꺼기는 하루가 지날수록 늘어나고 있었고, 새삼 ㅈ과 보낸 휴가가 벌써 이만큼 지났구나 생각하며 커피 찌꺼기를 헤집어보았다. 큰 사건은 없었지만, 따분하지 않았다. 평화롭게 오후가 지나갔다.


저녁엔 새벽까지 글을 쓸 계획이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곳은 내가 ㅈ을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던 커피숍이었다. 추운 날씨에 걸어왔지만, 청계천이 잘 내려다보이는 커피숍 맨 위층은 글을 쓰기에 퍽 좋은 장소라며 둘 다 좋아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순간이었다. 세탁기 사러 가기 직전처럼.


어느 순간 엉망이었다. 좋던 분위기도, 즐거웠던 기분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엉망진창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ㅈ과 나는 나름의 이유로 서운하고, 상대방이 제 기분을 잘 몰라주어 또 서운했다. 가끔은 누가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피해자가 생긴다. 신나게 글을 쓰려고 펴둔 노트북 두 개는 목적을 잃고 화면만 밝히고 있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선택 중 최악이나 차악쯤에 속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나는 그만 집에 가야겠다고 했다. ㅈ의 기분을 망쳐버린 것 같아 미안하고, 동시에 엉망이 된 내 상태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ㅈ이 먼저 가라고 했을 때와 같이 가자고 했을 때는 각각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며 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심각한 표정으로 있던 ㅈ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볼링 치러 갈래?


냉랭한 분위기를 만드는 요소들은 가면 갈수록 기억에서 지워진다. 한참 기분 나빠하다 보면 도통 왜 그랬는지 기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은 생각보다 하찮고 어이없는 계기로 한방에 풀려버리곤 하는데, ㅈ의 난데없는 볼링 드립이 그랬다. 세상 맥락 없는 볼링 제안에 한참 망해가던 상황이 끝나버렸다.


레인을 꽉 채운 사람들 때문에 결국 볼링공 한 번 만져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집안 공기가 움츠러들었던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 따스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망했다. 글도 한 편 못 쓰고 볼링도 못 쳤다. 오늘 나가서 한 것이라곤 이 추위에 한참 걸었던 것뿐이다.


밀크티 만들어줄래?


ㅈ은 볼링에 버금가는 뜬금없는 제안으로 다시 슬슬 우울함에 빠지려던 감정의 흐름을 끊어냈다. 그간 지인들의 수명을 단축시킨 충격적인 맛의 밀크티와는 다른, 멀쩡한 밀크티를 만들어주려고 엄청나게 집중하고 나니 기승전망했다로 한없이 수렴하던 사고가 이미 멈춰있었다. ㅈ은 맛있다며 밀크티를 홀짝거렸다.



장난감 세탁기를 사지 못한 날. 세탁기를 사지 못한 아쉬움 대신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선명해졌던 건 뒷모습이다. 내가 갖고 싶은 세탁기 때문에 엄마와 아빠가 길에서 다투던, 그 망해버린 상황에서 내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화가 나서 뒤돌아 가버린 엄마의 뒷모습. 그 뒷모습을 보고 나는 계속 어쩔 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그날은 진짜 망한 날이었다.


머그컵을 들고 방 안을 유유히 걸어가던 ㅈ은 돌아서 다시 나에게 왔다. 밀크티를 만들어주고도 그날 길 위에서처럼 어쩔 줄 몰라 아직 쭈그러져 있던 나에게 ㅈ은 괜찮다고, 망한 날이 아니라고 해줬다. 괜찮다. 대단한 말이 아닌데 장난감 세탁기를 못 산 그날을 똑 닮은 오늘이 괜찮다는 말 덕에 거기서 멈췄다.


ㅈ이 와줘서 다행이다. 적어도 뒷모습을 두 번 기억할 일이 없어 다행이다. ㅈ이 괜찮다고 말해줘서, 오늘이 영락없이 망한 날이 되지 않아 다행이다. 아침처럼, ㅈ이 마음 따뜻한 사람이라 참 다행인 날이다.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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