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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Mar 09. 2020

입국 제한 조치 변경을 기다리는 여행자의 심정

거절이 살인이라면 유예는 고문이다.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곳이 있다면 연옥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알 수 없는 절차들에 온몸이 내맡겨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저 위의 누군가가, 혹은 무엇이, 어떤 조직이 판결을 내리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이를테면, 앞으로 2주 뒤에 입국 제한 조치가 풀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요새 새벽 3시 이전엔 잠을 잘 수가 없다. 밤마다 생전 처음 보는 곳에 가는 꿈을 꾸는데 늘 그곳에서 뭔가에 뒤쫓기면서 가슴에 압박을 느끼며 깬다. 웃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카카오톡을 보지 않은지 벌써 며칠째다. 아무에게도 대꾸하고 싶지 않다. 친구들은 내가 이미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에 가있는 줄 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두개골 안에서 뇌가 점차 쪼그라들고, 눈가가 황태 껍질처럼 바삭바삭해지고 있다.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하겠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은 지금, 어둠뿐인데.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이나 이미 결제가 끝난 항공권이나 숙소를 처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크게 걱정스럽지 않다. 현실적으로 더 생각하기 싫어서 다분히 고의적으로 미뤄놓고 있는 주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주요한 것은 아니다.

인정하지, 이 모든 반응의 원인은 내가 쓸데없이 예민하고 극단적인 인간 이어서다. 지난 몇 년간 온갖 종류의 신경증이 심해지기도 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 너무 많은 것을 걸었다.

- 우울증에서 날아갈 수 있는 도피처이자,

- 새 출발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로 여겼고,

- 앞으로는 내 앞날이 순조롭게 풀리리라는 운명의 전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려놓은 모든 미래가 박살난 것이다. 시작을 한 달 남기고.

그러나 무엇 때문에?

하잘것없지만 소중한 미래를 유예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는 거의 굴욕적이다. 증오를 쏟아보려 대상을 찾아도, 안갯속에다 기관총을 쏘아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아무도 없다. 누굴 미워한단 말인가? 잡아먹히는 가여운 박쥐들을? 몇십만 명이라는 멍청한 사이비를? 지리적으로 불운하기 짝이 없는 이 나라를? 아니면 뭐, 바이러스를?


이제는 이 모든 상황이 마치 부조리극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슬프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짜증을 넘어서 뭔가 초월적인 느낌마저 드는 광활한 감정.

대체 왜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누가 그런 거죠? 어째서요?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어떤 질문에도 답을 구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단순 명료한 오지선다의 유년 시절을 보낸 나는 처음으로 카프카를 이해하고, 공포가 안개를 닮았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나는 K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안갯속에서 성벽을 따라 계속 돌고 있다.




약 반년 전, 황량한 들판 너머에 서있는 거대한 산을 보고 감탄한 나는 가죽 표지의 작은 노트에 공교롭게도 이런 글을 썼다.


여기다 심장을 묻고 간다,라고.

제기능을 잃어버린 심장을 그 거칠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넘치는 땅 밑에 묻어두고, 어느 정도 탄성을 되찾을 즈음에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그렇다. 나는 그것을 찾으러 가야 한다.

.

.

.

.

(추가)

그러나 유예 기간이 유통기한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래서 지금 견디지 못하게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건 주문일 터다.

그것을 인정하고 불안과 걱정과 신경증을 털어놓기 위해 이 글을 쓰는 동안, 나의 고통은 아주 약간 나아지기 시작했다. 명료하게 정리된 감정은 아무것도 없고, 아득한 상황 역시 변하지 않았으나 조급증만큼은, 사람을 가장 미치게 만드는 그 증세만은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는다. 오늘은 조금 더 일찍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먼 곳에 놔두고 온 심장은 이제 파릇파릇하게 기운을 차려 너른 러시아와 중국 대륙의 지각 껍질 아래를 지나는 지진파처럼 나에게 박동을 전달하고 있다. 지금 당장 다리를 끊어서라도 날아가 땅을 파헤치고 싶은 본체의 충동과 별개로 오히려 그곳에 남겨둔 내 일부는 생각보다 아주 질기고 참을성이 많은 것 같다. 그 안정적인 소리는 끊임없이 나를 그 먼 곳으로 끌어당기면서도 서둘지 않고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금방 사라지거나 썩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와인의 고장이니 숙성은 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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