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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Mar 23. 2020

세상은 최선의 상태인가


오늘 아주 이상한 일이 있었으므로 기록을 남긴다.




원래는 오늘 비행기를 타러 가야 했다.

원래는 금요일에 만날 약속이었다.

원래는 다른 곳에서 차를 마실 계획이었다.


상황이 이리저리 휘어지고 돌고 돌아 간 다른 가게,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작고 아늑한 카페에서 세 시간 동안 (여전히) 조지아, 러시아, 이탈리아, 스탕달, 일본어 그리고 범죄소설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느지막이 일어났을 때, 내가 뒤를 돌아본 순간. 

하얀 벽에 걸려 있는 낡은 포스터에 적힌 붉은색의 조지아 알파벳을 보았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은 33자를 다 외우지도 못했지만 다음에 올 때는 푸딩을 먹으며 저 글자를 다 읽어봐야지


이거 조지아에서 사 온 거냐고 물은 손님은 아마 내가 처음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렇다고, 조지아에 다녀왔다고, 그곳을 좋아하냐며 주인 부부가 지었던 미소를 본 것도 우리뿐이겠지.


카페에 놓여있던 '통신문'


세상은 최선의 상태로 되어있는가.

볼테르의 <캉디드>다. (이 책을 불과 이틀 전에 읽었는데 이건 또 무슨 예정의 조화람)


여태껏 내 인생에 어떤 계시적인 영감이 있었던 적은 없었고 나는 숙명도 믿지 않지만, 이 일만큼은 정말 무언가 어떤 거대한 계획의 일부 같은 희한한 경사와 각도를 보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미뤄진 약속과 돌아간 가게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한국의 카페에서, 내가 오늘 갔어야 하지만 가지 못한 나라의, 다른 누군가에게 나라 이름 100개를 대라고 하면 잘해봤자 90번째 즈음에 나올 법한 그 작고 먼 나라의 문자를 본다고? 보통 안 이러지?


그리하여 나는 아주 조금은 믿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났으며, 또 그렇게 되기 위한 일들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카페를 나와서 밤 산책을 하며 동행이 했던 말 한마디를, 나는 세상이 내게 보내는 최소한의 성의 표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ㅡ가게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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