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중독자가 될까 봐

04 나의 가짜 워킹홀리데이

by 잉플

일을 그만두고는 넘쳐나는 게 시간이었다. 일을 할 땐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는데, 백수의 삶은 당장 할 일이 없어서 날 초조하게 만들었다. 근 10년 만에 할 일이 없는 일상을 살게 되어 적응하는 데 꽤나 애를 먹는구나 싶었다. 습관처럼 해 오던 운동은 어느새 아무리 우울하고 무기력한 하루라도 24시간 중 1시간은 무조건 할애하게 해 줬다. 규칙적인 생활이 안 돼서 어느 날은 아침에, 어느 날은 점심을 먹고, 어느 날은 저녁 늦게 집에서 간단한 운동이라도 했다. 시간이 어찌 됐든 거지 같은 기분을 떨쳐내는 데 지금 당장엔 땀을 좀 흘리고 샤워를 하는 일이 유일했다. 직접 몸을 움직이고 나면 왜 사람들이 우울하면 밖에 나가라, 우울할 땐 운동을 해라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이런 말들이 가끔은 날 더 반항심 어리게 만들고는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하고 있다. 새삼스럽게 습관의 무서움을 체감했다. 운동을 안 하면 몸이 근질거리니 컨디션이 안 좋아도 운동을 하려는 내 모습이 가끔은 웃기기도 했다.


"이 시간에 뭐 해..."


새벽 다섯 시에 자다 깬 남편은 불 켜진 작은방에 얼굴을 들이밀고 졸린 얼굴로 물었다.


"잠이 안 와서 운동 좀 하고 씻으려고."


내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밤낮이 없어져 버린 내 일상에 남편은 걱정스러운 듯 못 자서 어떡하냐며 말을 흘리고 물 한 잔을 먹고 다시 가서 누웠다. 여섯 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남편이기에 그게 그 시간에 줄 수 있는 나에 대한 최선의 관심이었다. 1시간가량 홈트레이닝을 하고 샤워를 했을 무렵엔 좀 더 자다 일어난 오빠의 출근 준비가 시작됐다.


"달이 못 자서 어떡해. 지금이라도 좀 자야지."

"잠이 안 와."

"어떡하지. 약은 먹었어?"

"응. 먹었는데도 오늘은 잠이 안 왔어."


출근 전 우리의 대화는 남편의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럼 이따 졸려지면 낮에라도 좀 자야 한다며 갔다 올게 하는 남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남편은 출퇴근 시간이 왕복 두 시간 정도는 잡아야 했기에 늘 아침 일찍 움직여서 남들보다 늦게 귀가하는 매일을 살고 있지만, 힘든 내색 크게 없이 묵묵히 자기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면 백수가 된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하다가 눈이 피곤해졌어도 잠이 안 와서 운동을 하고, 이래 놓고 낮이 되면 또 별 다른 일이 없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할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신의학과에 가야 하는 날인데 걸어가기엔 멀고 버스를 타자니 애매한 경로였어서 남동생이 날 픽업하러 집으로 왔다. 부모님과 남동생은 내가 다시 정신의학과에 다니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나를 배려하는 게 일상에 배어 버렸다. 이런 가족들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고, 또 얼마나 미안한지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조차 미안한 마음이었다. 병원에 가서 접수를 하고 대기석에 앉아 있다 보면 다양한 연령층의 환자들을 볼 수 있다. 오늘은 청소년의 여자아이와 엄마, 중년의 여성과 남성,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각자 떨어져서 의자에 앉아 하나같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저번에 왔을 때 봤었던 병원 곳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을 훑어보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그중 제일 눈에 띄었던 건 금연에 관한 홍보물이었다. 금연을 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지만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나에게 담배, 술, 게임, 카페인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들의 중독에 내가 취약하단 점이었다. 한창 일 때문에 바쁜 시기엔 게임할 시간조차 없었고, 술을 마시게 되면 다음날 컨디션에 지장을 주니(알쓰 정도는 아니지만 술이 약하다) 안 한다, 아니 못 한다 쳐도 담배와 카페인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가 지나칠 정도로 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1리터짜리 커피를 세 잔 이상 마시는 건 확실히 과하다고 느끼기도 했었다. 디자인이라는 일이 정해진 시간을 앉아서 업무를 보는 게 아니라 그날의 컨디션과 기세(?)로 어느 날은 쉬는 시간도 없이 나에겐 하루 종일 몰두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정말 습관처럼 커피를 옆에 두고 일하다 보면 어느새 세 잔은 뚝딱이었다. 세 잔에서 한 잔을 줄여 두 잔만 마시는 것도 절제하기 힘들 정도였다. 작업할 때 커피가 없으면 불안하고 담배는 뭐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이 중독 아닌가?


"요즘은 정말 운동하고 게임하는 일 말고는 제 일상에 뭐가 없어요."

"뭐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게임을 하다 보면 몰입할 수 있어서 시간이 잘 가니까 우울한 감정을 게임하는 동안에라도 잊을 수 있으니까... 누가 보면 중독자처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마음이 불편한가요?"

"네, 두려워요."

"게임 중독자가 될까 봐요?"

"네. 이러다가 정말 게임 중독자가 되어 버려서 하루 종일 게임을 안 하면 못 사는 사람이 될까 봐요. 사람들이 금연과 금주를 힘들어하는 것처럼요."

"게임을 안 하면 불안한가요?"

"게임을 해야 잡생각을 안 할 수 있어서 하는 것 같아요."


나는 이미 하루의 반 이상 게임만 하는 나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를 그렇게 지내보니 게임할 때만큼은 잡생각이 없어서 좋다고 느끼더라도 게임을 끄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공허함과 허탈감을 맞이해야 했다.


"열심히 일해 오셨잖아요. 나는 달 씨가 조금 더 이렇게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하루 종일 게임만 하더라도 달 씨는 게임 중독자가 될 것 같진 않은데요?"

"저는 담배에도 중독됐거든요. 끊기가 힘들어요. 저는 중독에 취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담배와 카페인에 중독됐으니 다른 것엔 중독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기피하며 살아왔거든요."

"음. 약은 어땠어요? 특별한 증상 없었나요?"

"아침에 약을 먹고 나면 미친 듯이 졸리긴 했어요. 근데 낮에 자면 저녁에 또 잠들기 힘들 것 같아서 어떻게든 참았는데, 너무너무 졸려요."

"약은 좀 조절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 약이 어떤 영향을 주는 건가요?"

"저번에 달 씨의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감정이 더 힘든 걸 거라고 말씀드렸듯이 그 균형을 맞춰 주는 약을 쓰고 있어요."

"그게 저를 졸리게 하는 거고요?"

"아무래도 신경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어서 졸릴 수 있어요."


선생님과의 진료 끝엔 새로운 숙제를 받은 게 있었다. '저는 이왕 일을 쉬게 된 기회가 생겼고, 쉬는 김에 달 씨가 원하는 만큼 게임하는 게 나쁘다고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럼에도 달 씨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지내시면서 게임 말고 다른 걸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싶네요. 쉽진 않겠지만, 달 씨가 느끼기에 죄책감이 없는 무언가가 없을까 한번 고민해 보세요.' 그 말이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졌지만 그 숙제가 마치 나의 할 일이 된 것 같아서 아, 이번 주는 게임 말고도 할 일이 생겼구나 싶어 그것만으로도 진료 후 마음이 편해졌다. 게임이 하고 싶은 건지 내가 감당해야 할 현실을 도피하듯 게임으로 온정신을 돌려 버리고 싶은 건지는 몰라도 늘 게임을 시작하기 전과 게임이 끝난 후의 마음은 찝찝하고 무거웠었는데,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만한 그럴듯한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숙제는 그 어떤 찝찝함도 죄책감도 없이 내가 기꺼이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병원을 나와 카페에 있던 동생을 만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담담하게 오늘 진료 내용에 대해 공유했고 동생은 나에게 말했다.


"누나가 가만있질 못하는구나."


그런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일을 못 했다. 누군가에게 소파에 누워 유튜브를 보는 일이 힐링이라고 하는데, 나에게 그건 그냥 가만히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유튜브를 보고 있자면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에 일어나 뭐라도 다른 할 일을 찾고는 했다. 마땅한 할 일을 찾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해지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가만히 있는 걸 못 하는 것도 맞는 것 같고, 일 그만두고부터는 더 중심을 못 잡겠긴 해. 아직까지 내가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해서 다 받아들여지지도 않은 것 같고."

"누난 열심히 했어.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쉬어가도 괜찮을 만큼 바빴잖아. 아니, 좀 쉬어야 될 정도로 바빴어 누난."

"일을 안 하니까 그 일 대신해서 다른 일 같은 걸 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예를 들면?"

"그냥 뭐... 이로운 거?"

"자기 계발이 하고 싶은 거야?"

"뭐 그런 걸 수도 있고. 근데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래서 게임을 하나 싶기도 하고."


동생과의 대화에서 오늘 진료 내용이 한 번 더 머릿속에 정리가 되었고, 그날 집에 가자마자 나는 노트를 꺼내 들고 이것저것 적어 보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대로 마인드맵을 그려서 어떤 키워드들이 있는지, 내가 할 만한 것들을 찾을 수 있는지 기대를 걸었다. 그날은 결국 마음에 드는 걸 찾지 못한 채 나는 다시 게임을 켰다. 아, 몰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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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그렇게 못 잤는데도 잠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여덟 시간째 게임을 하고 있지만 이제 자야겠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온라인에서 같이 게임하던 사람들은 하나둘 내일 출근을 위해 나가 보겠다며 인사를 했고, 나는 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꺼야 하나. 어차피 혼자 하는 게임은 재미가 없는데. 꺼야 하나? 더 해야 하나? 잠은 안 오는데. 어떡하지? 끄는 게 맞나? 이 별 시답지 않은 고민을 하며 세상 최고 선택장애인 양 불안에 떨었다. 컴퓨터 끄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이것 봐, 나 벌써 중독인 것 같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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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의 힘은 실제로 존재했다.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던 순간들이 점점 빈도가 줄었고, 대부분의 하루가 우울했던 때와 달리 약이 몸에 맞고부터는 하루 중 잠깐 동안 센티해졌다가 말거나 할 일이 없어서 불안할 때 빼고는 대체적으로 담담한 감정들이 더 많았다. 그 담담한 감정을 가지고 고민을 할 때와 지하에 처박힌 우울감을 안은 채 고민하는 일은 달랐다. 나는 꽤 깊이 있는 고민을 해 보겠다며 책상에 앉아 다시 마인드맵을 그리면서 내 할 일을 찾는 것에 몰두했다. 일 - 휴식 - 백수 - 취업 - 공부 - 자기 계발 - 영어공부 - 독서 - 여행 같은 단어들이 노트에 얹어지면서 나는 그것들을 한참을 바라봤다. 여행은 싫었다. 귀찮았다. 가서는 모르겠지만 준비가 귀찮았다. 집을 나가는 일 자체가 귀찮아서 운동도 집에서 하는 나인데, 게다가 지금 돈도 안 버는데 여행은 부담이었다. 탈락. 일만 하던 때 집 바로 옆에 있는 도서관에 한 번쯤 가 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내일은 도서관을 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도서관도 외출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영 부담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집 코앞에 있는 데다 공간 특성상 그리 혼란스러울 곳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 볼성 싶었다. 그 적막한 공간에서 조용히 책을 구경하는 일이 나쁘지 않겠다고 느껴졌다. 그래, 내일은 도서관에 가자. 오랜만에 도서관 냄새나 좀 맡고 오자.


내 10대의 우울증과 지금의 우울증이 다른 게 있다면 스스로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우울 경험치에서 나온 건가 싶기도 하고, 나 진짜 어떻게든 살고 싶은가 싶기도 하고, 어쩔 땐 한없이 가라앉아서 그냥 다 하기 싫다, 삶이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있는 날엔 난 이제 뭘 하면서 살아야 할까를 고민한다.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나는 결국 도서관에 가지 못했다. 오늘은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었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이젠 어렵지 않은 루틴이 되어 버린 운동을 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쉽지가 않았다. 몸살기운 같은 으스스함이 머리까지 지끈거리게 했다. 그날은 그렇게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암막커튼을 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나에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