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절약왕 시절 이야기 (2)
월세 30만 원. 내가 일본 생활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구한 맨션은 지은 지 30년 정도 된 작은 원룸이었다. 일본 집은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곳이 많아서 오래된 맨션이 낡기는 해도 깔끔한 편이라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일본에 오기 전까지 본가에 있었기 때문에 독립을 해본 게 처음이라 낡고 작은 집이었지만 너무나도 소중하고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하카타구 (후쿠오카에서도 인구 밀도가 높은 중심가 중 하나)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서 하카타역에서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는데 그래서 주변이 조용하고 살기 좋았으며 근처가 다 주거지역이라 슈퍼 같은 편의 시설도 많고 아주 오래된 상점가도 있었다.
내 방은 9층이었는데 밤이 되면 달빛이 베란다 창문으로 환하게 비쳐서 가끔은 일찍 잠들었다가 달빛에 깰 정도였다. 또 맨션 바로 뒤로 나가면 나카스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날씨 좋은 날은 강에서 물고기 튀어 오르는 것도 구경하고 해 질 녘에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멋진 석양도 봤다.
남의 나라에 내 보금자리가 있다는 게 소중했다. 물론 부엌이나 욕실은 녹슬어 있거나 낡았기는 했지만 그만큼 월세가 저렴했고 가스를 사용하지 않는 전기로만 전력을 쓰는 집이라 공과금도 저렴했다.
절약을 최우선으로 하던 나에게 가장 살기 좋은 집이었다.
평소처럼 외출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나는 당황해서 얼른 비상벨을 울렸는데 곧장 수리하러 오겠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수리할 사람이 온다고 하니 일단은 안심했지만 엘리베이터를 둘러보면 사람이 3명만 타도 꽉 찰 정도로 굉장히 좁아서 갇혀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살짝 엘리베이터가 내려앉았는데 그때부터 패닉에 빠져서 겁에 질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창문이 뚫려 있는 옛날식이었는데 아침 청소를 하던 관리원 아저씨가 연락을 받고 오신 건지 엘리베이터에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울면서도 괜찮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관리인 아저씨가 멘션에 사는 사람들을 불러서 이 안에 아가씨가 갇혀 있는데 울고 있다고 다 같이 위로해 주자는 제안을 했다.
"괜찮으세요?", "힘내세요~" 맨션에 사는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엘리베이터 창문을 통해 울고 있는 나에게 응원을 해주는데 창피하기도 하고 이게 뭔가 싶어서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금방 수리기사가 와서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줘 나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수리 중이라 한동안은 9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해야 했고 나는 이후에도 한번 더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되는데 금방 다시 문이 열리긴 했지만 이때 집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이사를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부동산 사람이 집 컨디션을 확인하러 왔을 때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엘리베이터가 올라가 있는 상태라 부동산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좋은 집이었지만 이사는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절약을 위해서도 그렇고 언제 일본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집에는 냉장고도 세탁기, 전자레인지 등 기본적인 가전제품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사 짐을 쌌는데 이삿짐센터를 부르기에는 적은 양이어서 한인 커뮤니티에서 차를 잠시 태워주는 조건으로 적은 금액을 지불하고 간단하게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새롭게 이사 간 곳은 하카타에서 전철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이전에 살던 곳보다는 시골이었지만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 당시 나는 이동 거리 1시간 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자전거로 하카타역까지 1시간 정도 걸렸기 때문에 교통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나는 무조건 월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저렴한 곳으로 이사하고 싶었는데 월세 30만 원은 정말 저렴한 가격이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월세 30만 원의 셰어하우스였다.
내가 구한 셰어 하우스는 멘션처럼 각자 집이 있었고 다인원이 거주하는 곳이라 프라이버시가 보장될 것 같아서 좋았다. 원룸이었고 내 집 안에 욕실도 있어서 맨션과 다른 점이라고는 부엌이 공용 공간이라는 것뿐이었다.
그 당시 나는 요리를 만들어서 이걸 소분해 놓고 아껴먹었는데 공용 주방이다 보니 사람들이 친해지려는 마음에 요리를 하고 있으면 먹어보겠다는 경우가 있었는데 굉장히 난감했다. 나는 이때 100엔짜리 빵 하나를 한 끼로 먹거나 편의점에서 야키토리 하나 사서 저녁을 대신하고 했을 때라 누구에게 먹을 걸 나눠 줄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지금이라면 음식을 나눠주고 그랬을 텐데 그때는 나 먹을 것도 없었던 가난한 외국인이었다. 그래도 월세 30만 원의 작은 집에서 아무것도 없으면서 마음 편하게 지냈던 그때의 경험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