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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인희 Oct 06. 2020

그 시절, 우리의 섬 한가운데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아이를 안는 법


하이볼과 생맥주가 범람하는 이상적인 일본 여행은 아니었다. 아기와 함께 하는 여행은 배경만 바뀔 뿐, 평소보다 쉽게 지쳐 버린다. 분유와 이유식을 병행할 때였으니, 챙길 짐도 너무 많았다. 거기에 사돈이라니. 잔치 한 번이면 될 일을 괜히 고생만 하는 건 아닐까. 고민은 고민대로 흘러갔고, 우린 결국 우리대로 흘렀다. 돌잔치 대신 양가 부모님과 홋카이도(北海道)에 다녀오기로 했다.



드넓은 꽃밭에서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손을 번갈아 잡아주면 좋겠다. 그러다 넘어지면 혼자 일어서는 걸 지켜보자. 볕이 좋은 풀밭에 드러눕거나 보폭을 좁게 해 나란히 걷고 싶다. 어느 날 아침엔 커다랗고 축축한 초록색 잎사귀를 만지며, 별것 아닌 거에 배 아프도록 웃어 보는 건 어떨까. 초대장 대신 그런 바람을 나누었다. 숲과 물가가 있는 니세코가 알맞겠다. 나무들이 원 없이 숨을 뱉어내기 시작하는 길목에 작은 마을이라 했다. 거기에 며칠 둥지를 트고 오순도순 있어야지. 아이 너는 우뚝한 요테이산이 들어찬 창문에 손자국 그림을 그려 보렴. 지구가 돌고 있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말자. 쏟아질 듯 무수한 별이 우리 위를 둥글게 배회할 테니까. 역전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다가 몇 번이고 노래하며 초를 불면 되겠다. 하루는 나이든 바닷가 온천에서 따뜻한 저녁을 먹자. 술과 분유로 건배도 하자. 우리가 낳은 아이와 우리를 낳아 기른 어머니, 아버지 모두 큰 탈 없이 건강하다. 이 시절을 감사히 기록하는 여행이기로 하자.



부모님들은 의외로 쉽게 동의했다. 우리를 이해하는 데 반평생을 쏟아부었으니, 돌잔치를 패스하는 것쯤은 귀엽게 여겼을는지도. 누군가 그랬지. 자식은 뜻대로 되지 않는 거라고. 곧 타인이라고. 어쩌면 이젠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해했을지 모른다(나도 훗날 그렇게 해야 할 운명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이 녀석들이 또, 속으론 혀를 차면서도. 아이까지 낳았으면서 아직도, 조마조마하면서도. 한복 대신 기꺼이 배낭을 꾸려 채비했을 분들이다. 사람들을 초대해 손주 자랑을 하는 대신 또 한 번 자식을 이해해 보기로 마음먹었을 테다. 우리가 기약 없이 직장과 집을 정리해 홋카이도로 떠난다 했을 땐 이보다 더했겠지. 돌연 일 년 반 뒤에 돌아와 원룸에 짐을 쌓아두었을 땐 말도 못 했겠지.



발밑으로 별처럼 흩어진 마을들을 지나 우린 다시 북쪽으로 갔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사랑

했던, 이제는 ‘그 시절’이라 불러야 하는 때에 살았던 섬. 떠나왔으나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섬. 언제고 돌아가리라 습관처럼 되뇌었다. 우린 그곳에서 지독한 슬픔을 지나기도 했다. 보통의 삶이란 비틀리게 마련이니 하소연은 없다. 그저 그곳이 아니었으면 조금 더 비틀렸을 거라 짐작한다. 어차피 슬픔은 저물녘 해와 같이 이미 안녕을 고해버린 것. 검붉게 타올랐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 허나 다음날이면 다시 뜨겁게 떠올라 어쩔 수 없는 영역에 갇혀버리는 것. 한동안은 시간을 흘리며 슬픔이 삼켜질 어둠만을 바라야 했다. 마침내 떠오르는 해가 두렵지 않았을 때, 우린 둘을 반씩 닮은 아기를 만나고 싶었다.


나를 통해 세상에 나온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비행기 창을 어루만졌다. 오동통한 손가락 뒤로 녹색이 가득한 대지(大地)가 그어졌다. 이곳에서 넌 무엇을 바라보고 또 들이마실까. 어떤 물결과 윤슬이 너의 눈에 들어차 반짝일까. 우린 너르고 커다란 섬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착륙이 가까웠다. 작고 말랑한 아이가 그대로 땅의 품에 안기는 듯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


사돈 간의 적절한 거리와 친밀감을 위해 숙소에 특히 신경 썼다. 화장실은 둘 이상이어야 하고, 둘러앉을 커다란 거실이 필요했다. 아이의 컨디션과 각자의 취향을 잘 버무릴 수 있도록 동선도 세심하게 짰다(차라리 돌잔치가 편했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돌잡이는 빼놓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거였다. 생일마다 난 뭘 잡았냐고 묻곤 했다. 엄마는 매년 다른 답을 내놨다. 실이었나, 아니 연필이었다. 아닌데, 백설기 한 덩이를 막 쥐고 먹었는데. 아빠한테 한번 물어봐. 바람이 섞인 기억이다. 한 살이 된 아이는 공을 잡으려다 말고 엽전 꾸러미를 움켜쥐었다. 그걸 탬버린처럼 흔드니 반짝였다. 코까지 찡그린 채 입속을 훤히 드러내며 웃어 젖혔다. 우리도 잠옷 바람으로 환히 웃었다. 모두의 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항과 니세코를 오가는 길엔 호수 두 개를 지났다. 도야와 시코츠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꺼진 곳에 물이 고여 생긴 칼데라 호수다. 거기로 흘러든다는 강 이름은 이제는 맥이 희미한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족의 말이었다.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비후에, 오코탄페, 니나루, 후레나이……’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아이도 옹알거렸다. 사라져가는 말과 아직 말이 되지 못한 소리 사이에서 아이를 꼭 안았다. 파고들수록 어떤 기운에 빨려드는 듯했다. 그 힘은 전혀 몰랐던 너비와 깊이로, 또 무서운 속도로 확장하고 있었다. 벌판의 능선같이 보드랍다가도, 금세 협곡처럼 가팔랐다. 분명했지만 형태나 이름은 없었다. 다만 어머니, 아버지 품 안에서 오래도록 고동치던 무언가와 닮았으리라 여겼다.



홋카이도 중부의 초여름은 적당히 습하고 따사로웠다. 느리게 터져 나온 봄꽃이 시들고,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섬에는 온건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바람이 여전했다. 자연은 계절을 따라 유유히 흘렀다. 반년 동안 내린 눈이 덜 녹아 골짜기마다 하얬다. 홋카이도의 후지산이라 불리는 요테이산이 정면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뒤로는 안누푸리 산악이, 좌우론 언덕이 물결쳤다. 습지에선 숨이 터져 나왔고, 고요와 정적 속에서도 물은 어딘가로 흘렀다. 풍경을 읽는 법이 있다면 성실히 배워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달빛, 그보다 더 무수한 별빛, 그보다 더 헤아리지 못하는 바람의 일에 대해서도 종종 생각했다. 그건 마치 한 아이가 자라는 모습과도 같았다. 한 사람이 그의 결대로 살아가는 일. 온전한 자신의 공간을 획득하고 지켜가는 일. 그렇게 세상에 몇 개의 빛을 발하는 일. 그게 잘 되길 소망하지만, 부모가 된 나는 무얼 어찌해야 좋을지 잘 모른다.


오묘하고 미묘한 기도


사실 우린 슬픔과 절망,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사이기도 했다. 충분히 어른의 나이가 된 뒤엔 가족의 일이란 게 그렇게도 느껴졌다. 그저 그 테두리 안에선 얼버무려 잊힐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각자의 궁색한 단면이 핏줄로 이어진 걸 목격했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 서로를 가두기도 했다. 여행은 낡은 상흔을 말끔히 지워주진 않았다. 오래된 연대감이 무용해지지 않도록 집안에 빛 들 자리를 내어주었을 뿐이다. 가족은 언제나 그랬듯 간결하지 않다. 뚜렷하지도 않다. 아른거리는 채로 끝끝내 어딘가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와 부모, 아이와 나는 섬과 섬 사이 같다. 밀고 밀리는 물결을 사이에 둔 채 세월을 보낸다. 영원히 형용하기 어려운 드넓은 여백 속에서. 우리는 맺음말이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과 그림자는 뿌리가 하나
<상무주 가는 길>, 김홍희


마지막 날엔 늦은 밤도 이른 새벽도 아닌 때에 혼자 깨어났다. 풀이 자라며 그해 여름만큼의 녹음(綠陰)을 짓고 있었다. 창문에 기대어 기도했다.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오묘하고 기묘한 소망이었다. 박명의 새벽빛에 다시 잠을 청했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방문을 드나들었다. 그 작은 숨이 가족의 울타리에 뭉근한 열을 지폈다. 아이의 정수리에선 흙 내음이 났다. 이로써 새날이었다.

 

일곱 명이 탄 비행기가 다시 이륙했다. 각자 그려낸 마음의 무늬가 섬 위로 새겨졌다. 아무도 말을 꺼낸 적 없지만, 우린 그런 걸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 무늬들은 곧 어디론가 떠다니며 섞이다 흩어지기도 하겠지. 파도 속을 헤엄치거나 구름을 피어내기도 하면서. 그러다 어느 날, 훌쩍 커버린 아이를 꼭 안아줄 수 있기를. 부디 따사롭게 어루만져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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