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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Sep 04. 2023

박찬욱의 지독한 결심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작년에 개봉한 <블랙위도우>였으니 거진 1년 만이다. 언젠가부터 영화관을 찾아가는 일이 무서워졌다. 코로나 시국 동안 지극하게 한 편을 다 보지 못하고 산만하게 이것 저것 돌려보게 되는 넷플릭스식 시청법에 너무 익숙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설레지 않는다. 하루 중 가장 편한 순간이 집에 있는 순간이니 말 다했다. 이러다 순도 100% 내향인의 길을 걷게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들에게는 집에서 잠자고 있는 내향인들의 발걸음을 이끌게 하는 오라 같은 무언가가 있다. 박찬욱도 역시 그런 감독이다. <아가씨> 이후 무려 6년만에 찾아온 박찬욱의 11번째 장편영화라는 사실보다 더 호기심을 더 자극했던 것은 바로, 탕웨이와 박해일이 주연이라는 점이었다. 국적이 다른 두 배우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지, 어떤 식으로 극의 전개를 이끌어갈지가 궁금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고, 두 배우가 대면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탕웨이의 서툰 한국말이 먼저 들렸고, 그렇게 궁금증은 싱겁게 해결되나 싶었다. 바로 그때, 탕웨이는 스마트폰을, 그것도 아이폰을 꺼내더니 아주 능숙하게 번역기 어플을 사용해 자신의 말뜻을 전했다. 그래, 바보같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야 당연히 스마트폰을 쓰면 되지! 그야말로 21세기에만 가능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1세기에는 뭐든지 편하다. 심지어 사랑조차도.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에 써놓았으니, 영화가 더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하시면 된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용의자와 사랑에 빠진 형사'의 이야기다. 어쩐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소설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줄거리다. 사랑은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솔직히 용의자와 사랑에 빠지는 형사라니, 너무 진부하잖아. 하지만 박찬욱은 그런 것도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야?라며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완벽하게 나를 포함한 관객 모두를 설득시킨다. 


마지막 파도 장면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 이게 사랑이구나.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아서 그런지, 롯데시네마의 음향시설이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스크린 속 파도는 진짜 파도보다 더 파도 같았다. 새하얗게 부서진 파도 속에서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탕웨이를 찾아 나서는 박해일의 모습을 보자니 아련한 감정이 들었다. 전혀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박해일이 탕웨이를 찾아내 둘이 사랑을 완성하는 해피엔딩도 생각해 보았다. 그럼 그렇지. 영화는 거기서 막을 내렸다. 당연히 그러는 게 맞기도 하고.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더 놀랐던 점은 두 배우의 외모다. 박해일은 여전히 19년 전에 찍은 <살인의 추억>처럼 풋풋함이라고 해야 할지, 곱상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매력이 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대단한 배우다. 19년 전의 매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니. 탕웨이는 눈이 정말 예뻤다. 그 순둥순둥한 눈망울 속에 어떤 독기가 숨겨져 있어도 따라갈 것 같은 눈이다. 영화 속 박해일의 행동이 납득이 되지 않다가도, 탕웨이의 눈빛을 보여주는 씬 몇 개만 있으면 나도 모르게 설득되어 버린다. 배우에게 외모는 이래서 중요한가 싶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서, <헤어질 결심>은 정말 영화관을 찾은 보람이 있는 영화였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자막이다. 분명 들릴락 말락 한 대사들이 몇 개가 있어서, 영화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어려웠다. 동시녹음과 후시녹음까지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타 스태프들과 스태프들의 비영화인 친척들을 초대해 확인까지 했다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넷플릭스의 자막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스크린 아래쪽을 자꾸 흘낏흘낏 쳐다보게 된다. 


그런 것을 제외하면 영화는 너무 좋았다. 오랜만에 짙은 여운이 남는 영화다. 어떻게든 대중과의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박찬욱의 지독한 결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거장은 참 여러모로 어렵다. 본인만의 예술세계를 만들면서도, 대중들에게 그 예술세계를 납득시켜야 하고. 영화감독의 꿈을 접었던 게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오늘도 어디선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미래의 영화감독님들에게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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